105화. 누구를 위하여 뛰는가?
콩닥콩닥.
‘나대지 마라. 심장 새끼야. 경기할 때보다 더 나대면 어떡하냐?’
이순신은 빠르게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후읍.”
심호흡하며 생각했다.
보고 싶어도 애써 참으려고 했다.
대회가 끝난 후 연락하려고 했다.
그래서 개막식 이후로 핸드폰을 꺼놨었다.
‘침착하게 받는 거야. 쿨하게!’
이순신은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얼른 버튼을 눌렀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빨간색 버튼을 눌러서 통화를 끊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자연스러운 멘트였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는 것만 빼면…
“순신아!”
전화기 너머로.
지구 반대편에서.
8시간의 시차를 사이에 두고 신자영이 밝은 목소리로 순신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순신의 가슴이 뭉클했다.
“누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너야말로 이 시간에 웬일로 핸드폰이 켜져 있어?”
이순신의 두 눈이 커졌다.
‘무슨 뜻이지? 설마 매일 전화해본 걸까?’
이순신은 딱히 부재중 통화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아. 엄마한테 전화해봤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얼~ 우리 순신이 효잔데?”
마치 신자영이 옆에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시간이면…?”
마드리드는 지금쯤 아침 시간이었다.
“아. 민흥이 감기 걸려서 경기를 못 뛴다는 게 사실이야?”
순간 이순신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뭐야. 내 소식을 물어보려는 게 아니라 민흥이 형 소식을 물어보려던 거였어? 그런데 민흥이? 뭐야. 친한가?’
물리학자나 탐정이 된 것처럼 수많은 가설과 추측이 이순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여보세요?”
“아, 듣고 있어요. 대외비긴 한데 누나한테만 말해줄게요. 아쉽게도 경기 못 뛰긴 해요.”
“역시…그런데 대외비라고 하기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기사가 엄청 나고 있거든.”
“아…”
물론 추측성 기사나 안태리 감독이 언론을 통해 연막작전을 펼친다는 식으로 기사가 났다.
“그래도 소식이 참 빠르네요. 스페인까지 소문이 날 줄이야.”
“순신아. 네가 너무 소식이 느린 거야.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이겼는데 여기까지 소문이 안 나겠니? 우리 지금 조심해서 다녀야 해.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스페인 애들이 화가 엄청났어.”
“그런데 민흥이 형하고 친해요?”
“응. 리포터 생활할 때 좀 친해졌어. 나이도 같고…밥도 같이 먹고…”
“아… 그렇군요.”
이순신의 마음속에서 묘한 질투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신자영의 말에 이순신의 질투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신아. 너는 괜찮아? 민흥이한테 감기 옮고 그런 거 아니지?”
“물론이죠. 난 튼튼하니까요.”
“다행이다. 혹시나 너도 감기 걸린 줄 알고 걱정했어.”
이순신은 대답하면서 씨익 웃었다.
“나 걱정해준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잠시 신자영이 머뭇거렸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참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고마워요. 구멍이랑 다른 애들도 잘 있죠?”
“물론이지. 여기서 열심히 너 응원하고 있어. 남은 두 경기도 잘할 거라 믿어. 기대할게. 아 너무 부담 준건가?”
“전혀요~ 부담감 같은 거 없어요.”
“그래. 여기서 보여줬던 것처럼 기적을 보여줘.”
“누나. 기적이라뇨! 노력의 결과인데!”
“아차! 내가 실수했네.”
신자영이 웃었다.
이순신의 허세가 너무 귀여웠다.
“전 이만 자야 될 거 같아요. 누나.”
“어? 어.”
이순신의 갑작스러운 통화종료시도에 신자영은 전화기 너머에서 당황했다.
“응. 그래. 잘 자고…”
“그런데 누나.”
“응? 왜? 무슨 할 말 있어?”
“나 열심히 할 거예요. 그러니까 본방사수 꼭 해요!”
“당연히 계속 본방사수하고 있었다고.”
이순신은 생각했다.
‘그 시간이면 스페인은 새벽일 텐데?’
이내 곧바로 대답했다.
“엇! 고마워요. 누나.”
“그런데 순신아. 너 누굴 위해서 열심히 할 거야?”
그 순간 이순신의 머릿속엔 한 사람밖에 안 떠올랐다.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신자영의 얼굴이 더 먼저 떠올랐다.
‘누나를 위해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수작질 같았다.
그 뒤로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해야 할 대답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너를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요. 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보고 싶어요.”
“순신아. 너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으니까.”
이순신은 순간 울컥했다.
생각해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걸까?
아니었다.
그저 이순신이 바뀌었다.
과한 욕심과 패배감에 찌든 모습에 사람들이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단순히 이순신이 잘나가서 사람들이 응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이순신이 지금 같이 성공 가도를 달리지 않았어도, 이순신의 도전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주변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은 분명 많았을 것이다.
이순신이 감상에 빠져있는 사이에 마치 어디선가 보고 있는 듯한 신자영의 말이 이어졌다.
“순신아. 난 네가 영광의 순간이든 실패했든 순간이든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아요. 누나. 현재가 중요하다는 거. 전 지금 현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두 사람은 동시에 씨익 웃었다.
비록 다른 시간과 장소에 있어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순신이 파이팅. 좋은 꿈 꿔.”
“덕분에 그럴 듯요! 누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순신은 씨익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뭔가 가슴이 벅찼다.
스트레스가 확 풀린 기분이었다.
이순신은 침대에 누웠다.
손민흥이 없기에 얼떨결에 독방을 쓰고 있었다.
핸드폰을 다시 끄기 전에 자신에게 온 SNS 메시지를 살펴봤다.
꽤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신자영의 메시지는 없었다.
매일 전화를 걸어봤기에 핸드폰이 꺼져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이미 응원은 충분히 했기에 매일매일 메시지를 남기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너무 티 나니까.’
비즈니스 관계의 단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순신은 서운하지 않았다.
방금 신자영의 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단톡방이나 좀 볼까?’
단톡방에는 많은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순신 시주. 경기 잘 보고 있소. 메달 따서 꼭 맛난 소고기를 사주시우.-
구멍다운 말투였다.
-다른 놈들한테는 다 져도, 일본 놈들한테는 지면 안 된다. 간바떼!-
조문돈의 모순적인 응원 글을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형. 올 때 피겨 잊지 말고!-
하비는 아직 천상 애였다.
-나 머리 잘랐다.-
이순신은 보경풍의 단발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형…머리 빨이었구나. 요즘 개그 욕심이 상당한데?’
긴 머리에서 풍겼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이순신 기준에서는 너무 웃겼다.
-모두 고맙습니다. 좋은 소식 가지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꺼놔서 답장 늦은 거 미안해요!-
이순신은 메시지를 남기고 핸드폰을 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남은 시간은 오롯이 대회에 집중하고 싶었다.
***
브라질과 경기 하루 전날이 되었다.
안태리와 선수들은 끝까지 기대감을 놓지 않았다.
“콜록콜록.”
아쉽게도 손민흥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민흥아. 아쉽지만 4강전을 포기해야 할 거 같다. 교체 명단으로도 뛸 수 없는 상태다.”
“어쩔 수 없죠.”
손민흥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출전을 감행해서는 안 됐다.
자신이 뛰어야만 브라질과 해볼 만하다는 오만함을 그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 형, 동생들이 잘해줄 거라고 믿어요.”
손민흥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런데 민흥아. 혹시 주장은 누가 하는 게 좋겠냐?”
“감독님은 미리 정해놓고서는 왜 저한테 물어요? 당연히 그 녀석밖에 없지 않아요?”
“그냥 한 번 물어봤어. 혹시나 하고~!”
“어쩌면 브라질전은 대한민국 축구계의 미래를 보는 거네요.”
안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 동의했다.
현재 국가대표 팀 전력의 50%는 손민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손민흥이 몇 년은 더 뛸 수 있는 나이였다.
오히려 지금이 최전성기였다.
그런데 손민흥이 대표 팀에서 못 뛰게 된다면, 다음 세대는 누가 이어갈 것인가?
안태리는 이순신에게 주장 완장을 채워줬다.
“순신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겠지만, 너라면 이겨내리라고 본다.”
안태리는 이순신을 브라질전의 주장으로 발탁했다.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기지와 주우현도,
청소년 대표 팀에서 형들보다 어리지만, 주장을 맡았던 이광인도,
이순신이 주장을 하는 데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주장은 순신이 형이 해야지.’
이광인은 씨익 웃었다.
무엇보다 이광인 역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냉정히 말해서 자신의 현재 위치는 모든 팀에서 주장을 맡을 순 없었다.
즉, 팀에 녹아들더라도 청소년 대표 시절에 보여줬던 퍼포먼스를 내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이순신의 팔뚝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렸다.
“순신아. 주장으로서 한 마디 해보렴.”
안태리는 이순신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했다.
“후-”
이순신은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순신이 쫄았나 보네. 흐흐.”
김혁규가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주고 싶어 했다.
“하하하.”
다들 긴장한 이순신을 풀어주고자 같이 웃어줬다.
그 순간이었다.
이순신이 눈을 부릅떴다.
“브라질한테도 져도 우리에겐 한 번의 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브라질을 꺾고 당당히 결승전이라는 축제를 즐겨보자!”
이순신의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주우현과 이기지가 있어서 존댓말을 할 법했지만,
경기에서 명령을 내려야 할 사람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또한, 선수들은 내심 브라질에게 져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준3.4위전에서 일본이나 멕시코를 이기면 되겠지.’
그런 안일함이 결국, 패배를 부른다고 이순신은 생각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잡고 가야 해.’
필드와 벤치의 선수들이 한뜻으로 모일 때 비로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 해보자! 우리는 대한민국이다!”
“전대의 업적을 뛰어넘고 사상 최초로 올림픽 결승전이라는 무대를 밟아보자!”
선수들이 강력한 의지를 다졌다.
누구 하나 져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라. 괜히 다치면 결승전에 출전 못 할 수 있으니까.”
안태리 역시 브라질을 이기고자 마음먹었다.
“네!”
선수들의 눈빛이 호랑이처럼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