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가장 무서운 개는 선입견
기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다니엘의 말에서 나온 건 낭만 그 자체였다.
“희망입니다.”
기자들이 이해가 안 됐는지 재차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다니엘은 웃으면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팀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다면, 자국의 아이들에게 축구=돈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나이가 많아도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자신의 몫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원 클럽팀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계의 로맨티시스트로 불리기에는 충분했다.
냉철한 기자들의 가슴이 잠시나마 따뜻해졌다.
“휴-”
이순신은 한숨을 쉬었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선수였다.
김혁규, 이광인 등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투지를 잃은 느낌이었다.
“무슨 성인군자 팀도 아니고…”
“저건 내가 아는 브라질의 이미지가 아니야.”
“클럽에서 놀다가 와서 공차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손민흥을 제외한 김혁규와 장승빈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장승빈이 말했다.
“왠지 의욕이 안 생기는걸…”
그 말에 대다수 선수들이 동의했다.
상대가 강하면 투지가 생기는 법인데 이건 정반대의 경우였다.
결코,
멜루와 다니엘의 실력이 떨어지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종족 특성 중 하나인 ‘신데렐라 증후군’이 발동했다.
과거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갑자기 동정심이 생기는 현상.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하고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제치고 슛까지 넣으면 벌써부터 괜히 미안해졌다.
“아- 어쩌지.”
시간이 지날수록 사기가 계속 저하되었다.
[충무공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 상태로는 전쟁을 해봤자 패배가 뻔하다고 경고합니다.]
이순신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럴 땐 가장 말을 잘 듣는 친구를 본보기로 설득하는 게 최고였다.
이순신은 김혁규에게 다가갔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자 김혁규가 돌아봤다.
“혁규 쫄?”
“쫀 건 아니고…”
“골 넣고 욕먹을까 봐 쫀 거 아냐?”
“…”
콰과강!
이순신은 정확하게 진실이라는 패트리엇 미사일을 김혁규의 가슴에 폭격했다.
“젠장. 딱히 부정할 수가 없잖아. 과연 브라질을 상대로 이길 수 있나 싶어.”
브라질에서 유학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브라질 선수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존감이 급격히 떨어졌다.
브라질에서 당한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 초기에 열심히 했다.
잘한다고 칭찬도 들었다.
그것이 접대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더 열심히 했다.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악마 같은 새끼들!
축구를 기가 막히게 잘해서 짜증 나고 미웠다.
그런데 다니엘 같은 선수가 있다고?
‘축구도 잘하는데 인성도 좋을 리 없을 거야!’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그동안 자신이 정립한 브라질이 무너지자 정신도 무너졌다.
[김혁규의 정신상태가 엉망입니다.]
이순신이 허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신체적인 부상은 고칠 수 있어도, 마음과 정신의 병은 약이나 침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허준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허준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은 자고 나면 정신도 신체도 회복하는 법입니다. 수면 침을 놓을 수 있습니다.]
허준이 30cm 옆구리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것도 좋아. 하지만 자고 나서 기다리는 건 악몽보다 지독한 현실이지.’
4일 내내 잘 수도 없는 법.
그렇다 한들 갑자기 상황이 좋아질 리도 없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끊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김혁규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자괴감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걸 막은 건 다름 아닌 이순신이었다.
“혁규야. 쉬운 팀은 없어. 상대가 예수라고 해도 공격수는 골을 넣어야지. 난 욕 먹어도 골 넣을 거야. 두 골 넣을 거야.”
[호랑후가 발동했습니다.]
이순의 말에 김혁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막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다.
“그래. 우리가 축구하러 왔지. 인간성 배우러 온 거 아니잖아!”
김혁규가 의지를 불태웠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전 그럼 해트트릭을 하겠습니다.”
막내인 장승빈이 호기롭게 선언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아모르와 경기를 뛴 게 큰 자극이 됐었다는 걸!
자기보다 더 어린 나이임에도 ‘빅 리그’에서 뛰는 것도 모자라서 ‘빅 클럽’에서 뛰었다.
하지만 장승빈의 현재 위치는 수원의 홈구장인 ‘빅 버드’라는 게 내심 열 받았다.
덕분에 이번 올림픽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다짐했다.
호랑후의 발동으로 선수들은 정신 차렸다.
자발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광인아. 달려!”
이순신의 패스를 받은 이광인이 거침이 없이 달렸다.
“대건아. 이쪽으로 돌려.”
상대를 등지고 공을 받은 정대건이 김혁규에게 리턴패스를 했다.
“좀 더 빨리 돌아와 단결아!”
공을 빼앗긴 임단결이 재빨리 수비 진영으로 돌아왔다!
“넵!”
“기지 형. 성질 멈춰!”
“노력해볼게!”
이기지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거 진짜 브라질 이기는 거 아냐?”
훈련을 지켜보던 안태리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브라질이라는 강팀에 쫄지 않았다.
선수들이 아직 배가 고프다는 걸 느꼈다.
코칭 스태프도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상대 팀 분석 자료를 만들었다.
저녁이 되자 선수들은 휴식을 가졌다.
그때 선수 중 하나가 SNS를 하면서 브라질 선수들이 지금 뭐 하는지 알아냈다.
“와! 지금 브라질 애들 뭐 하고 있는지 알아?”
“뭐 하는데?”
“풀장 빌려서 바비큐 파티하고 있데. 예쁜 애들도 장난 아니게 많아. 이런 씨…”
선수들은 상상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개 부러워.”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장승빈의 생각에 동의했다.
‘나도 그래…’
이순신조차도 말이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삼바 춤을 추고 있겠지.
젠장! 선수들은 생각할수록 엄청 부러웠다.
그것도 매우 매우 엄청!!!
“우이씨- 우리 또 무시당하는 거냐?”
불만은 꼬리를 물고, 다른 방향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건 아니야. 원래 걔네들 스타일이 그래.”
손민흥이 웃으며 팀원들을 다독였다.
재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역시 팀 사기가 저하될 수 있었다.
“각 나라마다 분위기를 유지하는 방법, 긴장을 푸는 방법이 다르잖아.”
대한민국 같은 아시아는 텐션을 유지하면서 정신력을 날카롭게 다듬는 걸 선호했다.
“사실 나는 브라질에서 제일 처음에 충격받은 게 그거였어. 이 자식들은 성적이 중요하다면서도 할 건 또 다 해!”
김혁규는 유학 시절이 떠올랐다.
남미 선수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끔 차라리 실컷 놀고 경기 때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자! 일찍 쉬고 내일 한 번 더 맞춰보자.”
“넵!”
손민흥의 지휘로 각자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손민흥도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순신과 같은 방을 썼다.
그 순간이었다.
“콜록콜록.”
손민흥이 갑자기 기침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이순신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형 괜찮아요?”
“응. 괜찮아. 갑자기 사레가 들렸나 봐.”
“어? 형 목소리가?”
손민흥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콜록콜록.
[허준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손민흥의 상태가 …]
이순신은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당황했다.
***
다음날.
선수들은 훈련을 이어갔다.
하지만 분위기는 하루 만에 급격히 다운됐다.
‘도대체 얼마나 잘 풀리려고 이러는 거지?’
올림픽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팀의 최대 위기였다.
이순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민흥이 감기에 걸려버렸다.
전염병은 아니고, 단순한 독감이었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감독인 안태리는 머리를 감싸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연일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손민흥 선수가 연습에서 안 보이는데 혹시 부상인가요?”
“함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브라질을 상대로 플랜 B가 있는지요?”
안태리는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었다.
겨우. 겨우 참아냈다!
코칭 스태프들과 긴급회의가 열렸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했는데…하-”
“개가 아니니까 걸린 게 아닐까요?”
“김 코치. 그거 지금 농담이라고 해?”
“죄송합니다!”
안태리가 좋아하는 티키타카가 이어졌다.
위이이잉-
여름이라 그런지 모기가 극성이었다.
손민흥은 얼마 전에 모기에 물렸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웬 모기가?”
“형. 상처에 손톱으로 십자 모양 자국을 내야 빨리 나아요.”
“크크. 됐고 약이나 가져와.”
“아. 진짠데!”
이순신은 투덜거리며 약을 가져와서 직접 발라줬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뇌염이었다.
평소에는 감기와 똑같았다.
제대로 걸리면 갑작스러운 고열로 헛소리도 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게 만들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게 만드는 병이었다.
진짜 운이 없다면 감기로 시작한 병이 뇌수막염으로 번질 수 있었다.
37.5도.
손민흥은 고열에 시달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감기 선에서 끝났다.
“젠장.”
누구보다 가장 안타까운 건 바로 본인일 것이다.
대한민국팀에도 안 좋은 효과가 미쳤다.
에이스가 경기를 뛸 수 없다는 건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손민흥은 다른 선수들에게 혹시라도 옮길까 봐 격리됐다.
같은 방을 쓰던 이순신은 허준이 체크했을 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평소에 관리가 잘 된 편이었다.
“하… 하필이면 이럴 때 제대로 된 의사라도 있었으면…”
이순신은 고개를 돌렸다.
허준과 눈이 마주쳤다.
“동의보감에 감기 치료제 같은 건 없어요?”
허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러면 빨리 좀 만들어줘요!”
[국내 한정이라 해외에서는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분개했다.
“아니 국내 약재라고 해도 중국산이 태반일 텐데! 강황이나 울금은 인도에서 왔을 텐데! 산삼 대신에 마카라도 쓰면 되잖아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막말이 쏟아졌다.
이순신이 논리적으로 따졌다.
허준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에이띠- 물 건너오면 그 안에 경기가 다 끝나겠네. 그럼 나중에 우리 엄마 보약이나 좀 지어줘요!”
[그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이순신은 멍 때렸다.
그러더니 밤하늘을 보았다.
갑자기 별구경을 하고 싶어진 건 아니었다.
그리운 이름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잘 지내겠지?”
일본에 오면서도 전화도 못 했다.
‘고작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놀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은 해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핸드폰을 들어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 …금 통화를 할 수 없사오니 다음에 다시…-
아쉽게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
이순신이 시계를 살펴봤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
“가게 문 닫을 시간이네.”
이순신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밀린 메시지를 쓰윽 보고 훑어봤다.
그 순간이었다.
이순신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엄마가 아니었다.
핸드폰에는 ‘신자영’이라고 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