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경우의 수는 없다.
안태리는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이순신, 손민흥을 투입했다.
스코어가 8:0이 될 때쯤에는 후보 골키퍼를 투입했다.
오늘 경기에서 주전 골키퍼인 주우현은 출전하지 않았다.
안태리는 기자회견에서 병역 면제를 위해서가 아닌 실력으로 선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심하게 선수들을 챙기는 면모를 보였다.
필드 플레이어들은 출전 기회가 좀 더 있는 반면, 세 번째 골키퍼가 뛸 일이 적었다.
첫 경기가 약팀인 바누아투였기에 다행이었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기에 부담 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향후 경기에서 좀 더 선수 운용에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주우현이 부상당하지 않는 한 골키퍼를 투입해야 할 상황은 없게 됐다.
‘이제 메달만 따면 된다!’
안태리는 굳게 다짐했다.
그 역시 어찌 메달에 욕심이 없겠는가?
다만 선수들이 병역 면제가 아닌 올림픽 정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2차전 상대는 강호 독일이었다.
대한민국이 속한 조는 1강2중1약.
다들 바누아투를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8강에 오르려면 최소 2승을 거둬야 했다.
그런데 다소 셈법이 복잡해졌다.
한 수 아래의 기량이라고 생각했던 이집트가 독일을 상대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독일이 약한 것일까?
이집트가 생각보다 강한 것일까?
축구는 이런 변수가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헐. 독일이 3전 전승을 예상했는데…”
덕분에 대한민국이 깜짝 조 선두를 달렸다.
골 득실차는 무려 10골 차!
“우리가 조 1위래. 그것도 골득실차가 10골. 이거 실화냐?”
“어. 그런데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은 부담스러웠다.
‘혼전이 되겠군.’
안태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독일이 3전 전승, 혹은 2승 1무를 예상했다.
그 1무가 자신들과 비기는 것이지 이집트와 비기는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슬슬 언론들의 입질이 시작됐다.
경우의 수.
“한국 팀은 독일전을 포기하고, 1승 1패로 이집트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최선.”
“독일을 이겨도, 이집트한테 지면 탈락…”
안태리는 제목만 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에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훈련이 끝나고 모인 선수들에게 안태리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경우의 수는 없다. 우리는 독일도 꺾고, 이집트를 꺾어서 3전 전승으로 조 1위를 한다.”
“우리가 조 1위를요?”
선수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들 은연중에 1위는 독일이 하겠지라고 생각했지?”
대다수 선수들은 뜨끔했다.
사실 안태리도 그랬으니까.
“우리는 4강까지 올랐던 팀이다. 19세 대표 팀은 준우승까지 했었다. 너희에게 묻겠다. 우리가 약팀인가?”
선수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김혁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약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몇몇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같은 생각이야?”
“저희는 강팀이 아닙니다.”
이순신이 말했다.
“그럼 약팀이란 소리야?”
안태리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독일을 이겨서 강팀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이순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훗.”
손민흥은 코웃음을 쳤다.
이순신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나이도 어느새 20대 후반.
매년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도전정신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이번 시즌은 더 잘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 대표 팀의 주장이다.’
왕관의 무게가 무거웠고, 혹 후배들에게 자신의 목표를 강요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해봅시다. 독일 잡아보겠습니다.”
주장인 손민흥이 선전포고를 했다.
왕관의 무게는 잠시 내려두고, 어릴 적 분데스리가에서 고군분투하던 그때를 떠올렸다.
패기의 손민흥이 돌아왔다.
“좋다! 난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본다!”
안태리의 말에 선수들의 마음은 요동쳤다.
‘우리가? 설마…’
안태리의 말에는 근거가 있었다.
독일은 분명 세계적인 강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투지가 강한 팀에게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고 여긴 전력의 팀을 무시하다가 의외의 패배를 많이 당했다.
한국 팀 역시 이상하게 독일만 만나면 강한 면모를 보였다.
심지어 지난번 월드컵 때도 한국이 2:0으로 승리하며 독일의 16강 진출을 막아냈다.
안태리의 와일드카드는 다소 독일전을 염두에 두고 뽑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일의 슛을 모조리 막아내며 악몽을 안겨준 주우현,
다급한 독일 골키퍼의 공을 빼앗아서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킨 손민흥을 포함, 현재 독일에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정대건까지 있었다.
안태리는 코치 전과 함께 독일전을 대비했다.
손민흥은 선수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
“대한민국과 독일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대한민국은 이번에 4-2-3-1이 아닌 4-4-2 전술을 들고 나왔다.
노련한 손민흥과 몸싸움과 활동량이 좋은 장승빈이 투톱으로 섰다.
이번에는 정대건을 오른쪽 미드필더, 이강인을 왼쪽 미드필더로 배치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김혁규를 조커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중앙에는 다소 수비력이 좋은 선수를 넣었다.
더블 볼란치였는데 둘 다 수비에 치중한 앵커형이었다.
그 뒤를 이순신이 받쳐주는 형태였다.
한 명은 중앙을 견고히 하고, 다른 한 명은 측면의 이기지와 임단결이 공격에 나가거나 수비를 도울 일이 있을 때 협력하는 역할이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독일의 공격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독일의 헤딩슛!”
“이순신이 경합해서 막아냅니다!”
독일은 높이와 힘을 앞세워서 한국 골문을 공략하고자 했다.
이순신의 빠른 스피드로 그들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냈다.
“단결! 달려!”
이순신은 길게 패스했다.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아갔다.
공을 잡은 임단결은 측면에서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적어도 한국의 스피드는 독일보다 빨랐다.
하지만 높이와 피지컬에서 밀렸다.
측면을 뚫으려는 한국과 견고하게 중앙에서 방어하는 독일의 대치가 이어졌다.
“이기지 선수와 임단결 선수가 계속 독일의 측면을 두드리고 있네요! 조만간 뚫릴 거 같습니다!”
하지만 해설자의 바람대로 쉽게 되진 않았다.
장승빈과 손민흥에게 패스는 연결됐지만, 독일의 수비가 필사적이었다.
특히 손민흥에게는 두 명씩 달라붙었다.
“젠장!”
적어도 오늘은 개인기가 번번이 막혔다.
그만큼 독일 수비수들도 긴장감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막았다.
‘괜히 자신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지.’
손민흥은 수비를 유인하고 장승빈에게 공을 돌렸다.
그가 뛰어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어린 티가 났다.
의욕은 과다했고, 몸은 경직됐다.
“승빈아! 무리하지 말고 주변으로 공을 돌려.”
손민흥이 침착하게 지시했다.
장승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진 않았다.
‘뭔가 보여줘야 해!’
독일전에 선발로 출전했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면 벤치만 지키게 될 거 같았다.
“아 장승빈 선수. 옆에 정대건 선수에게 주는 게 더 낫지 않았나요?”
“이광인 선수의 돌파. 수비수를 제치고, 장승빈 선수에게 패스!”
“아 슛! 골대를 살짝 빗나가네요!”
장승빈은 아쉬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감독님. 승빈이가 많이 흔들리는 거 같은데 교체할까요?”
“아니.”
안태리의 대답은 단호했다.
“승빈이가 여기서 중압감을 이겨내야 해. 그래야 8강, 4강에서 우리 팀의 무기가 될 수 있어.”
자칫 여기서 장승빈을 교체한다면 오히려 자신감을 잃을 수 있었다.
안태리는 믿고 또 믿었다.
이러한 경기의 판도를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이었다.
“승빈! 침착해!”
[호랑후가 발동했습니다.]
이순신은 수비라인에서 장승빈에게 호통쳤다.
그제야 자신이 골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 나 말고 골을 넣을 선수는 우리 팀에 얼마든지 있어.’
장승빈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달려오는 독일 선수들을 가볍게 제쳤다!
“장승빈 선수의 개인기!”
화려함에 해설자가 흥분했다.
장승빈은 그대로 손민흥에게 패스했다.
‘이제야 쓸 만한 패스를 하는군.’
손민흥이 웃었다.
그 역시 장승빈을 믿고 기다렸다.
시야에는 이광인이 보였다.
이광인, 이기지, 중앙 미드필더, 다시 손민흥으로 패스가 이어졌다.
“손민흥 선수 슛!”
손민흥이 좋아하는 오른발 감아 차기 존이었다.
나선형 궤적을 그리며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독일 골키퍼 몸을 날립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골대를 맞았다.
“장승빈 선수 달려갑니다. 그대로 슛!”
펑!
장승빈이 찬 슛은 독일 수비수의 발에 맞고 높이 떠올랐다.
“아! 안타깝게 수비에 막혔습니다!”
높게 떠오른 공은 하프라인까지 날아갔다.
독일 선수가 공을 받기 위해 가슴을 내밀었다.
그런데 공이 닿기도 전에 거대한 물체가 자기 앞으로 나타났다.
뒤에서 달려온 이순신이었다.
“이순신 선수가 먼저 커트합니다.”
공을 잡은 이순신은 상대 수비가 제대로 갖추지 않은 걸 파악했다.
“이순신 선수의 드리블!”
이순신이 빠르게 달렸다.
독일의 수비수는 다소 많았다.
이순신이 순간 공을 멈췄다.
독일 수비수들이 흠칫 놀랐다.
‘우리가 나가면 패스하려고 하는 거지? 그런 얄팍한 수에 당하지 않아.’
이순신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러더니 슛을 때렸다.
[지자포가 발동했습니다.]
“이순신 선수의 중거리 슛이 아쉽게도 골키퍼의 손에 맞고 벗어납니다!”
이순신은 코너킥 찬스에서도 헤딩을 날렸다.
이번에도 독일 골키퍼한테 막혔다.
“이순신 선수도 공격에 적극 가담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전반전이 0:0으로 끝났다.
후반전에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이순신은 후반에도 두 번의 중거리 슛을 날렸다.
[국왕의 축포]
[슈팅 성공률이 20% 누적됐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고대했던 순간이 왔다.
“대한민국이 프리킥 기회를 얻습니다!”
이광인, 정대건, 이순신, 손민흥 등이 대기했다.
손민흥이 슛을 차는 척 앞으로 달려나갔고, 이순신이 공을 찼다.
[비격진천뢰를 사용했습니다.]
[횟수를 모두 사용했습니다.]
[슈팅 성공률이 추가됩니다.]
이순신의 공은 위에서 아래로 툭 떨어지는 포물선을 그리며 몸을 날린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철렁!
“경기 시간 85분. 이순신 선수의 멋진 프리킥 골로 독일에게 앞서갑니다! 대한민국 8강 진출이 눈앞입니다!”
이순신이 두 손을 올리며 환호했다!
선수들이 달려와서 이순신을 감쌌다.
“잘했어. 순신아!”
손민흥의 특급 칭찬이었다.
잠시 후.
독일이 킥오프를 했다.
이순신은 수비라인을 정비했다.
“정신 바짝 차리자!”
[호랑후가 발동했습니다.]
남은 시간 5분.
추가시간 1분 정도까지 합쳐서 6분 정도였다.
독일의 슛을 주우현이 연속으로 막아내자, 독일 팬들은 악몽이 떠올랐다.
경기 종료 1분전.
이순신도 이제 다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