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96화 (97/161)

96화. 올림픽 본선

“아니.”

이순신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진짜?”

이순신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거나 호감 단계는 이미 넘어선 단계거든.’

이순신은 다만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신자영과는 좋은 파트너 관계도 유지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이 딱 좋을 수도 있어. 누나도 바쁘고, 나도 바쁘니까.’

“순신아. 그럼 나 좀 밀어주면 안 될까?”

“솔로 지옥 낭떠러지로 밀어달라고?”

물론 앞에 솔로 지옥이란 단어는 이순신의 속마음이었다.

“이 잔인한 놈아! 그거 말고. 너 자영 누나랑 되게 친하잖아.”

“누나 남자친구 있어.”

“진짜?”

이순신은 거짓말을 했다.

신자영을 지키기 위함과 김혁규의 진심을 알아보고자 했다.

“쩝. 그럼 안 되겠네.”

단 한마디에 김혁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작 그 정도였다.

공격수치고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나이스.’

이순신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올림픽에서 꼭 좋은 성적을 거둬야지. 자영이 누나 목에 메달을 걸어 주고 프러포즈하고 싶다.’

이순신은 상상으로만 그쳤다.

책으로 배워서 잘 알고 있다.

- 여자들은 오히려 공개된 장소에서 프러포즈를 하는 걸 싫어합니다. -

책에는 빨간색으로 극혐이라는 별도의 표시도 있었다.

그때 폭죽이 터졌다.

개막식도 거의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좀 더 멋진 사람이 되어서 누나 곁에 있고 싶어. 아직은 나를 동생으로만 생각할 테니까.’

이순신은 분함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다!’

충무공이 이순신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했다.

이순신의 눈빛은 비장해졌다.

내 한 몸 건사하기 바쁘기도 하며, 아직 한국 축구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멀었다.

‘근본적으로 어릴 때 말했던 것과 바뀐 것이 없긴 해.’

스타플레이어 중심의 한국 축구.

손민흥이 참가했다고 메달을 기대하는 거 자체가 웃겼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충무공이 했던 말이다.

그가 없었으면 임진왜란 때 조선이란 이름은 지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괴롭히는 간악한 무리보다 그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병사와 백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임진왜란을 이길 수 있었다.

팀플레이.

충무공이 자나 깨나 이순신에게 강조했다.

“순신이 형!”

이광인이 말을 걸었다.

“응? 왜?”

“형이랑 이번에 대회 같이 뛰어서 좋아요.”

“나도 그래!”

“형 이번에 우승으로 제의 많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혹시 생각해둔 곳은 있어요?”

“아니, 난 이번 시즌에 이적하지 않을 생각이야.”

이광인의 동그란 두 눈이 커졌다.

“네? 형 실력이면 3부 리그에 있긴 아쉬운데.”

“이름값보다 꾸준히 뛸 수 있는 팀이 내겐 더 중요하거든.”

이순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광인은 다소 이해가 안 됐다.

“올림픽 끝나면 국가대표도 소집될 텐데…”

이광인은 이순신이 최고의 폼을 유지해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길 바랐다.

올림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대표 감독이 스페인 3부 리그 선수를 뽑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경기는 유로파에서 쌓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이순신은 꿈FC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생각이다.

자신들의 도전이 헛되지 않았으며, 설령 2부 리그에 진출하지 못하더라도 여운은 남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행정문제일 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투자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겠지.’

주최 측이 준비한 쇼가 끝나갔다.

이제는 그토록 바라왔던 경기를 뛸 시간이 다가왔다.

이순신은 꿈FC와 올림픽이 유망주들에게 좋은 교두보가 되길 바랐다.

“형. 저한테는 이번 올림픽이 무척 중요해요.”

이광인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현재 소속팀에서 입지가 불안했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서 이적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순신은 씨익 웃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광인아. 너 만약에 우리가 메달 따면 꿈FC에 임대 올래?”

이광인은 순간 흠칫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기도 했고, 1부 리그 선수에게 3부 리그로 다운그레이드할래? 란 말을 너무나 쉽게 말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광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은메달 이상 따면요!”

이광인은 씨익 웃었다.

그의 웃음은 의미심장했다.

은메달은 현실적으로 못 딸 거 같으니 일단 말해본 걸까?

아니면 이번 기회에 호흡을 맞춰본 뒤, 같이 가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약속했다?”

“콜!”

이순신과 이광인은 계약의 의미로 서로 주먹을 부딪쳤다.

이제 개막식이 끝났다.

이순신은 정말 이게 200만 원짜리 침대가 맞나 싶은 골판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

올림픽 조별예선이 시작됐다.

한국 팀의 상대는 바누아투, 독일, 이집트였다.

언론은 늘 그랬듯이 8강을 넘어서 벌써 메달 분위기였다.

특히 바누아투를 상대로 대량 득점을 기대했다.

선수단 내부에서도 약간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해트트릭을 기록하기 좋은 기회였기에 김혁규의 의지는 남달랐다.

“상대가 약한 팀이라고 방심하지 마라. 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대충하면 바로 빼버릴 거니까 명심하고!”

안태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섰다.

포메이션은 4-2-3-1이었다.

최전방에는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유망주가 출전했다.

3명의 미드필더 자리에는 김혁규, 이광인, 정대건이 출전했다.

이순신, 손민흥, 주우현은 벤치를 지켰다.

전반전에 주요 전력들의 체력을 최대한 아낄 생각이었다.

“이광인 선수와 정대건 선수가 같이 출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두 사람 다 스케줄이 안 맞아서 동시에 소집된 적은 없었다.

매번 교차 소집됐는데 그때마다 둘 다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잘해보자.”

“응. 형도.”

정대건의 격려에 이광인이 화답했다.

오랜 외국 생활에 이광인은 동년배끼리는 존댓말을 잘 안 했다.

하지만 이순신한테만은 예외였다.

포지션은 다르지만 선수로서 이순신을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이광인이 힐끗 벤치를 바라보았다.

이순신, 손민흥, 주우현이 3대장처럼 앉아 있었다.

‘역시 순신이 형. 민흥이 형이랑 우현이 형한테 전혀 안 꿀려.’

이광인은 이순신의 패기에 감탄했다.

“순신아. 너 활약은 들었다. 대단하더라.”

손민흥이 먼저 이순신에게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형도 영국을 씹어 먹고 다니던데요. 뭘~”

“아냐. 난 아직 멀었어.”

손민흥은 소속팀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팀 자체는 약한 팀이 아니었다.

다만 투자의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탈출을 하고 싶긴 했으나, 어려운 시절에 자신을 도와준 팀이라 헌신했다.

즉, 한국인 특유의 정 때문에 떠나지 못했다.

“순신아. 형이랑 같이 뛸래?”

손민흥이 이순신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네?”

이순신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다.

“알다시피 우리 팀 수비가 좀 개판이야. 너라면 충분히 우리 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일 수 있을 거라서 그래.”

“어~ 순신이. 재민이 제치고 민흥이한테 선택받은 거야?”

주우현이 장난치며 거들었다.

“저는 가지 않습니다.”

너무나 빠른 거절에 오히려 손민흥이 놀랐다.

“왜?”

“토트넘이 저를 천억 주고 영입할 리가 없잖아요.”

이순신의 당돌함에 손민흥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손민흥의 몸값이 얼추 그 정도 됐다.

“짜식. 좀 건방진데?”

“야. 건방진 게 아니라 미친 거지.”

“사실 제가 영어를 잘 못 하기도 하고…”

그 순간이었다.

손민흥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신자영과 멀어질 거 같았다.

에이전트 제안은 이순신이 했지만, 현재 신자영은 꿈FC 선수들을 전반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토트넘으로 가면 더는 볼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갈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신자영에 관련된 것만 빼고.

“오. 꽤 낭만적인데?”

손민흥은 슬쩍 웃었다.

비록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이순신은 축구계의 로맨티시스트였다.

자본주의에 움직이지 않는 게 점점 마음에 들었다.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대한민국이 2:0으로 앞섭니다.”

선수들이 벤치로 들어왔다.

2:0이지만 불만이 가득했다.

좀 더 넣었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라커룸에서 안태리의 훈계가 이어졌다.

“그 많은 기회를 놓쳤다는 건 경기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이나 이집트전 때도 이럴래?”

안태리가 팔짱을 끼고, 눈을 부라렸다.

“죄송합니다.”

선수들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사과는 나한테 하지 말고, 관중들한테 해라. 너희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란 말이야!”

안태리의 말에 선수들은 침묵으로 답변했다.

“후반전에는 선수교체가 있다. 손민흥, 이순신.”

“넵.”

“준비해라. 골을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줘.”

잠시 후.

손민흥과 이순신이 경기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캡틴 손민흥 선수와 떠오르는 수비수 이순신 선수가 동시에 들어옵니다!”

대한민국의 응원단인 붉은 악마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우와와아!”

손민흥과 함께 이순신은 선수들과 어깨동무했다.

“똑바로 해. 알았지?”

이순신은 손민흥이 찬 주장 완장이 부러웠다.

“순신.”

“네.”

손민흥이 진지한 얼굴로 이순신을 불렀다.

“방심하지 마라. 공격수한테 묻어갈 생각하지 말고.”

그 말에 이순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입니다.”

이순신이 씨익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손민흥도 웃으면서 등을 두드려줬다.

이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시간이 왔다.

“손민흥 선수. 달립니다. 바누아투 선수들이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대로 슛!”

“고오오올!”

“이순신 선수 30M 지점에서 슛을 날립니다!”

“들어갑니다! 대한민국 팬들은 이 장면을 기다렸습니다!”

손민흥과 이순신은 마치 경쟁하듯 골을 넣었다.

“역시 손민흥! 너만 믿는다!”

“쏴라! 이순신!”

이순신이 비격진천뢰를 날렸다.

“후반 35분! 이순신 선수가 후반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역시 대한민국의 저격수! 이순신입니다!”

이에 질세라 손민흥도 후반 43분에 추가 골을 넣고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본선 첫 경기에서 바누아투를 10:0으로 이기고 기분 좋게 출발합니다!”

혁규는 비록 이번 경기에서 골을 넣진 못했지만, 어시스트를 3개나 기록했다.

이광인 역시 1골 3도움으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정대건 역시 1골을 넣으며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우리 팀 최고다!’

이순신은 이 순간을 즐겼다!

관중들도 두 손을 하늘 높이 뻗으며 외쳤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경기장에는 대한민국의 이름이 널리 울려 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