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와일드카드
호텔에 기자회견장이 마련됐다.
잠시 후.
안태리 감독이 정장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찰칵찰칵.
기자들이 누르는 카메라 셔터 음과 플래시가 팡팡 터졌다.
“후웁.”
안태리는 심호흡했다.
오늘 이곳에서 올림픽 최종 멤버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기자들과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와일드카드를 누구로 선정하느냐!
와일드카드는 24세 이상 선수를 최대 3명까지 선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우선 와일드카드 첫 번째 선수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 많이 공개됐지만, 공격수 손민흥 선수입니다.”
손민흥의 사진이 스크린에 뜨자 기자들은 찰칵 소리를 내며 셔터를 눌러댔다.
손민흥은 현재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다.
만약 그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해서 병역을 면제받지 못했다면, 손민흥 개인한테도, 한국 축구한테도 크나큰 손해였을 것이다.
그의 연봉은 현재 108억 원, 주급이 약 2억 원이었다.
그가 군대를 갔다면 월급은 약 45만 원 선으로 떨어졌다.
주급은 12만 원… 2000배 정도 차이가 났다.
주급으로 환산하면 더더욱 말할 가치 없는 그야말로 폭망 그 자체였다.
그런 그에게 올림픽은 이제 병역 면제의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영광이자 나라의 영광을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선수들을 위해서 자신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소속팀을 설득했다.
“계약 연장이든 뭐든 할 테니까 올림픽에 출전시켜주십시오!”
“알았네. 난 쏘니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굳게 믿어.”
소속팀인 토트넘은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손민흥이 합류했다고? 16강은 확정이네.”
“무슨 소리! 최소 동메달이지. 애송이들이 어떻게 손민흥을 막아!”
“다른 나라는 와일드카드 안 쓰냐!”
“손민흥이 있으니 이번엔 금메달 이상 가자!”
16강을 넘어서 벌써부터 메달확정이라니…
그의 합류로 동치미를 크게 한 사발 들이킨 팬들과 기자들은 침을 질질 흘렸다.
행복회로가 타버리다 못해 불이 날 지경으로 풀가동됐다.
그만큼 대한민국 팀의 목표치가 상당히 높아졌다.
안태리는 덤덤하게 두 번째 선수를 발표했다.
“두 번째 와일드카드는 울산의 골키퍼 주우현 선수입니다.”
주우현의 이름이 호명되자 기자들은 술렁거렸다.
지금 올림픽 대표 골키퍼들도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을 만큼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에서 두루 활약했기 때문에 안태리는 주우현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주우현 선수가 들어오면 다른 골키퍼들은 어디서 국제 경험을 쌓아야 합니까?”
한 기자가 질문했다.
“소속팀에서 쌓아야죠!”
안태리의 짧고 간단명료한 대답에 기자들이 웃었다.
“그리고 그들도 한두 경기는 출전할 거니 그때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면 됩니다.”
물론 안태리는 다른 두 명의 골키퍼를 버스 태우려고 뽑은 건 아니었다.
한 명은 승부차기에 강하고, 다른 한 명은 주우현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언제든 교체하고자 한 5분 대기조였다.
“아시안컵 와일드카드가 둘이나 뽑혔네?”
기자들은 마지막 와일드카드로 누구를 뽑을지 궁금했다.
“와일드카드로 황찬희와 황조 선수 중 한 명은 떨어진다는 거잖아?”
황찬희는 독일, 황조는 프랑스에서 맹활약하고 있을 정도로 폼이 올라온 상태였다.
둘 중 하나만 뽑혀도 국가대표 공격진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한 수준이었다.
“혹시 나머지 한 명은 황찬희와 황조 선수 중 누구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지만 안태리 감독은 황찬희와 황조를 선발하지 않았다.
“공격진은 손민흥을 중심으로 김혁규, 장승빈, 이순신이면 충분합니다.”
“잠깐만요. 이순신 선수요?”
“네. 이순신 선수는 수비수이기도 하지만, 저격수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공격자원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저게 지금 제정신인가?”
기자들은 어이가 없었다.
동네방네 소문내는 저격수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와일드카드 세 번째 선수는 수원의 풀백 이기지 선수입니다.”
하지만 안태리의 선택은 황찬희도, 황조도 얼핏 거론된 권방훈도 아닌 수원의 이기지였다.
이기지의 발탁에 기자들은 웅성거렸다.
이미 공익복무를 마친 선수였으며, 조현우와 더불어 30세를 넘긴 선수였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기자들이 질문했다.
“군 면제가 필요한 권방훈 선수도 아니고, 수비의 핵심인 김재민도 아닌 이기지 선수를 뽑은 이유가 있습니까?”
안태리는 마이크를 잡았다.
답은 간단명료했다.
“가장 취약한 포지션에 가장 잘하는 선수를 선발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기지는 훗날 대기만성의 좋은 예시가 됐다.
얼마 후 국가대표에 선발되지만, 이 시기의 이기지는 안태리가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뽑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익을 다녀온 30세 풀백보다 김재민이나 권방훈이 더 낫지 않습니까?”
“차라리 23세 선수들을 넣어서 한 명이라도 더 병역 면제받도록 하는 게 나은 거 같은데요?”
“그럼 당신이 감독하시던가요.”
급기야 안태리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결국, 폭발했다.
“병역 면제? 아직 올림픽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메달을 땄습니까? 병역 면제를 위해서 올림픽을 출전합니까? 그것은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
기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올림픽이 광고와 폭탄 돌리기가 됐어도 선수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그렇기에 올림픽은 감동이 있는 것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최종 멤버를 호명하겠습니다. 공격수는…”
안태리가 넥타이를 고쳐 맨 후 발표를 이어갔다.
기자들이 깜짝 놀랐다.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이우승 이름이 안 불린 거 같은데?”
파격 선발이 이어졌다.
이광인, 장승빈, 정대건 같이 굳이 지금 아니더라도 4년 후를 기약할 수 있는 선수들의 명단이 호명됐다.
기대를 모았던 이우승과 천승호는 대표 팀에서 탈락했다.
“이상입니다.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안경을 낀 기자가 물었다.
“안 감독님.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이광인, 장승빈, 정대건 선수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그들한테는 아시안 게임도 있고, 다음 올림픽, 다음 올림픽의 와일드카드로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태리는 단호했다.
“병역 면제나 나이가 아닌 현시점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를 뽑는다는 것이 저의 방침입니다.”
안태리는 기자들의 표정을 봤다.
‘호의적으로 기사를 내보내 주진 않겠군.’
이제 안태리는 결과로 자신의 픽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다.
***
도쿄 올림픽이 개막됐다.
1월까지만 해도 신종플루가 돌아서 올림픽을 연기 하느냐, 마느냐로 논쟁이 있었다.
인류의 과학과 단합은 생각보다 위대했다.
초기에는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다행히 금방 사그라들어서 현시점까지 마스크를 끼거나, 거리 두기를 하는 인류 비상사태인 펜데믹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축제라는 이미지에 딱 맞는 이벤트가 열렸다.
다시금 인류는 하나가 되고, 스포츠를 통해서 전쟁이 아니라 교류와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개막 쇼가 펼쳐졌다.
“선수 입장이 있겠습니다.”
알파벳순으로 각 국가의 선수들이 입장했다.
이제 대한민국이 입장할 차례가 됐다.
세계에서 모인 관중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순신아. 나 이런 거 처음 해봐.”
“혁규야. 나 떨고 있냐?”
“응. 겁나 떨고 있어.”
이순신과 김혁규는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도 모르게 관중들에 손을 흔들었다.
한 손으로는 입장 과정을 핸드폰에 담았다.
축구뿐 아니라 사격, 야구, 태권도 등 다양한 선수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였다.
“순신이다!”
꿈FC 숙소에서 단체로 개막식을 관람했다.
이순신의 모습이 약 5초 정도 비췄다.
“순신이 형. 이제 인싸를 넘어서 월클이 됐는데?”
하비가 굉장히 부러웠다.
“나는 처음부터 알았소. 그는 해상제독이라는 것을.”
구멍이 눈물을 흘렸다.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감동이 눈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나에게 꿈이 생겼소.”
모두들 구멍을 주목했다.
“열심히 해서 순신이랑 같이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아니오. 나도 순신 시주처럼 월클이 돼서 저기 관중석에 있는 파라과이 미녀랑 꼭 결혼할 것이오. 순신 시주는 이제 여자들이 줄을 서겠지…젠장!”
구멍의 엉뚱함에 선수들은 당황했다.
“물러가라 음란 마귀!”
선수들이 구멍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신자영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이내 씁쓸함이 밀려왔다.
‘순신이는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야.’
올림픽 대표가 되어 떠날 때도 이순신은 신자영에게 연락조차 안 했다.
최근에는 마음이 식은 거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순신에게 문자가 왔다.
-누나. 자요?-
신자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답장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기 너무 지루해요. 빨리 경기나 치르고 싶어요. 혹시 TV에서 나 봤어요?-
-응. 봤어. 5초 정도.-
-그렇구만. 어땠어요?-
-너무 순식간이라서 잘 못 봤어.-
신자영은 5초가 50초처럼 느껴졌지만, 거짓말을 했다.
-그래요?-
이순신이 사진을 전송했다.
-단복 잘 어울리나?-
이순신은 어색하게 V를 하고 있었다.
-응. 멋있네.-
-다행이다^^ 히힛.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기념품으로 사 갈게요!-
-일본은 초콜릿 유명하긴 해. 그런데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다치지나 마.-
신자영은 그 뒤에 뭔가를 쓰려다가 지웠다.
-널 영입하고 싶다는 팀이 많으니까 절대로 다치면 안 돼!-
‘너무 비즈니스적으로 보일 거야.’
신자영은 방금 보낸 문자도 훑어봤다.
‘이모티콘이라도 좀 쓸 걸 그랬나…’
-난 너만 무사히 돌아오면 그게 최고의 선물이야.^^ 이순신 최고다!-
신자영이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너만 있으면 된다고?’
그러나 이순신은 문자를 자기 멋대로 읽었다.
“아. 잘못 읽었네?”
“뭘?”
김혁규가 이순신의 핸드폰을 보자 냉큼 숨겼다.
“뭐야? 뭔데?”
“그냥.”
개막식은 지루했지만, 이순신의 가슴은 콩닥거렸다.
신자영의 격려와 혁규에게 들켰나 싶은 두려움이 공존했다.
“순신아. 나 이번 올림픽에서 꼭 잘할 거야.”
“그래. 열심히 해라. 나도 얼른 경기 뛰고 싶다.”
“그래서 자영 누나한테 고백할 거야.”
“뭐? 미친놈아!”
이순신이 정색하며 말했다.
“뭐야? 이 반응은? 너도 자영 누나 좋아하냐?”
김혁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눈빛을 보니 진심인 거 같았다.
이순신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평화와 화합의 장에서 자칫하면 선전포고를 해버리는 수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