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꿈에서 깨어날 시간
충격. 공포. 절망 그 자체였다.
“이럴 수가…”
“왜 하필 지금…”
하비는 장래가 밝은 어린 선수였다.
늘 팀을 위해 헌신했으며, 번뜩이는 재능을 보여줬다.
설령 실수한다고 해도 유망주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오늘의 실수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페널티킥+퇴장.
그의 커리어에서 최악의 순간 중 하나였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꿈FC는 이른 시간에 그냥 위기도 아닌 엄청난 위기를 맞이했다.
“후-”
이순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판정이 번복될 일은 없었다.
VCR 자체가 없었다.
“하비야. 수고했다. 형들이 알아서 할게.”
이순신이 하비의 등을 두드렸다.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
사람은 너무 미안하면 도리어 아무 말도 못 하는 법.
결국, 하비는 고개를 숙이며 터벅터벅 걸으며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레알 마드리드의 라모스 선수가 페널티킥을 준비합니다.”
라모스는 공을 가지런히 놨다.
보경풍이 양손을 크게 벌리며 골을 막기 위해 준비했다.
‘꼭 막아야 한다!’
보경풍이 평소답지 않게 긴장했다.
‘꼭 넣어야 한다!’
보경풍보다 더 긴장한 건 라모스였다.
자신이 그동안 내뱉은 말이 있기에 만약 실축이라도 하게 된다면,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후웁”
라모스가 호흡을 들이마신 후,
발을 구르며 뛰어갔다.
멈칫!
라모스는 페널티킥을 찰 때 잠깐 멈추는 버릇이 있었다.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승부차기는 축구라는 스포츠 안에 있는 심리 게임.
코너 속의 코너 같은 존재였다.
보경풍은 더더욱 긴장했다.
‘왼쪽? 오른쪽?’
짧은 찰나에 보경풍은 본능에 몸을 맡겼다!
뻐어어엉!
라모스가 강력한 슛을 때렸다.
공은 골대의 우측 상단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젠장!”
보경풍은 시야에서 멀어지는 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그는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철렁!
“레알 마드리드가 라모스 선수의 선취골로 앞서갑니다. 스코어는 0:1!”
라모스는 자신이 찬 공을 들고 나오며 환호했다.
“역시 주장! 난 처음부터 주장을 믿었다니깐!”
“내 말이!”
이거였다.
라모스가 골을 넣어야만 했던 이유.
“우리는 레알 마드리드다. 방심하지 않는다!”
“알았어!”
라모스는 프로다웠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꿈FC 쪽을 바라보았다.
꿈FC는 라모스를 그저 지켜보며 망연자실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희는 도망칠 수 없다.”
라모스는 승리에 대해 101% 확신했다.
그래서 이 분위기를 그대로 챔피언스리그로 이어가고 싶었다.
“끝났소.”
구멍은 망연자실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사라졌다.
1부 리그.
매번 1~2등을 놓치지 않는 최강의 상대. 하지만 우리는 고작 4부 리그.
우리는 운이 따라줘야 골을 넣을 수 있지만, 저쪽은 마음만 먹으면 골을 넣을 수 있는 상황.
심지어 0:1의 스코어가 주는 압박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1명이 부족한 상황을 면할 방법이 그의 머릿속에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도 아니고 그냥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이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주제에 무슨.’
리그 경기까지 포기하면서 준비한 컵대회가 물거품이 됐다.
“젠장. 이게 다 나 때문이야.”
하비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지만, 신은 자비 없이 외면했다.
그는 경기를 더는 보지 못한 채 숨어서 죄책감을 흘렸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리그 최고의 팀이다. 선물 없이 돌려보내면 인정 없지.”
이순신의 말에 꿈FC 선수들은 의아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명색이 리그 1위 팀이 여기 와서 한 골도 못 넣고 가면 얼마나 쪽팔리겠냐? 적어도 한 골이라도 넣어야 패배할 때 체면이라도 차리지.”
팀원들은 놀랐다.
평소 이순신답지 않은 허세였다.
“순신아. 너…뭐 잘 못 먹었냐?”
“골을 먹혀서 맛탱이가 간 거 같은데?”
“아이고…”
그들은 이순신이 큰 충격을 받고 미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결코 미치지 않았다.
“이 정도 위기는 내 인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고작 20대 초반의 선수에게 나올만한 대사는 아니었다.
“아니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조문돈은 어이가 없었다.
“세찬 FC는 축구선수로서 모두 한 번씩 죽었었어.”
그 말에 세찬 FC 출신 선수들은 뜨끔했다.
이순신은 부상으로 계약 해지되고, 군대도 갔다 왔다.
선수로서는 치명적이지만, 그는 극복했다.
다른 선수들도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한 번씩은 축구화를 벗었다.
“이제 겨우 5분 정도밖에 안 지났어. 우리가 준비한 걸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이러려고 우리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건 아니잖아.”
한창 뛰어야 할 선수에게 경기를 할 수 없는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린 쟤네들처럼 명문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들을 지킬 필요가 없잖아? 더는 실점을 허용하지 말고, 한 골만 더 넣자.
승부차기까지 간다면 우리가 이길 확률은 50%로 올라가. 그 뒤에 운이 따르면 우리가 올라가겠지.”
레알을 잡는 방법은 상당히 심플했다.
간단한 게 복잡한 것보다 나을 때가 있었다.
이순신은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
툭.
꿈FC의 킥오프로 경기가 재개됐다.
‘과연 레알…빈틈이 없어.’
아무리 라모스가 정신적 지주로서 팀을 이끈다 해도 모든 걸 다 커버할 순 없었다.
특히나 명문 팀은 개개인의 성향 자체도 언더독 팀들보다 크기 때문에 안도감과 자만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더니 약간 수비가 느슨해졌다.
그 순간을 이순신은 포착했다.
“기회다!”
지루한 공방전의 침묵을 깬 건 이순신의 롱패스였다.
패스를 받은 오진성은 빠르게 주변을 파악했다.
‘혁규? 광섭이?’
오진성은 수비가 붙기 전에 김혁규에게 공을 돌렸다.
측면을 치면서 들어가는 김혁규는 빠르게 수비를 유인했다.
“와- 고작 나한테도 두 명이 붙어?”
김혁규는 뒤쪽에 달려오는 선수에게 공을 돌렸다.
이순신이었다.
“이순신 선수가 도와주러 왔습니다.”
공을 잡은 이순신은 힐끗 상대편 진영을 보았다.
라모스가 재빨리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달려왔다.
“이순신 선수와 라모스 선수가 맞붙습니다!”
두 팀 다 중앙수비수가 주장을 맡고, 골을 잘 넣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와라. 아시아에서 온 애송아.”
라모스는 이순신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기준으로는 경계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저 아시아에서 이름깨나 날리고 있는 유망주였을 뿐이다.
일본 최고의 유망주라던 오쿠보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후보는커녕 임대를 가야 하는 수준이었다.
아직 국가대표팀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아시아 최고의 유망주는 벤치에 앉아있는 ‘마블 박’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라모스를 앞에 두고 웃었다.
“웃어?”
건방진 표정을 보자 라모스는 살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라모스가 손짓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봐.”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이순신은 몸을 몇 번 좌우로 흔들더니 빠르게 오른쪽으로 치고 나갔다.
라모스도 재빨리 따라갔다.
‘역시 라모스. 끈질기다. 제치는 건 어려울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돌파도, 패스도 여의치 않은 상황.
그렇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순신 선수 슛!”
라모스는 씨익 웃었다.
내심 자신과 같은 골 넣는 수비수이자 이에로의 후계자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너무나도 수준 이하였다.
‘고작 그따위 슛이라니.’
슈팅 타이밍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슛을 쏘면 골대 위로 날아가거나 골키퍼에게 잡히기에 십상이었다.
왜냐하면, 라모스가 발을 뻗는 환상적인 수비로 손쉽게 슈팅을 막을 예정이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역습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을까를 구상하던 그때!
이순신의 발등에 맞고 날아간 공이 라모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도깨비 슛이 발동했습니다.]
“뭐야? 공이…?”
라모스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공을 놓쳤다고?’
등줄기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철렁!
“고…고오올! 골입니다!”
해설자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일어났다.
관중들 역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에 4부 리그가 동점 골을 넣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주장과 주장의 대결.
심지어 월드 클래스 라모스의 수비를 떨쳐내고 슛을 했다는 사실에 좌절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이 찬 공은 낮고 빠르게 날아가서 구석에 제대로 꽂혔다.
공교롭게도 라모스가 시야를 가려서 골키퍼도 예측하지 못했다.
라모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분명히 공이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이순신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하면서도 시선은 라모스에게 향했다.
라모스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라모스를 보며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지? 맞아. 그거 도깨비 슛이야.’
그러면서 마무리 세레머니로는 신발을 닦는 행동을 취했다.
‘네 덕분이다!’
이순신은 새로운 운동화에 그동안 모은 포인트를 모두 쏟아부었다.
고심 끝에 세 개의 옵션을 골랐다.
그중 하나는 슛 스킬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횟수라는 약점이 있었고, 천지현황포는 반동 효과라는 역점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슛 옵션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도깨비 슛]
[발등에 공이 맞으면 발동합니다. (발동확률 : 50%) 발동 시 공이 상대편 시야에서 잠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라모스는 이순신의 슛을 막을 수 없었다.
세계적인 선수의 대굴욕!
그가 욕을 먹으면서 쌓아 올린 신뢰와 믿음이 무…
“괜찮아. 주장. 저 자식은 평생 운을 여기에 다 썼네.”
“코스가 진짜 예리하긴 하더라. 나도 넋 놓고 봤다니까.”
…너질 리가 없었다.
라모스는 웃었다.
왜 이들이 일류선수인지를 새삼 느꼈다.
“그래. 너희는 나처럼 방심하면 안 돼! 알겠지?”
“알았어!”
라모스는 선수들에게 위로를 받고, 오히려 의지를 다졌다.
라모스는 수비 진영을 재정비했다.
레알 마드리드도 의외의 일격으로 긴장감을 가졌다.
대충하려고 했는데 이순신의 골이 도리어 상대를 자극시켰다.
반면, 꿈 FC는 생각했던 플랜A를 성공했다.
이순신도 자신감이 생겼다.
‘다행이다. 새로운 능력이 바로 도움이 됐어. 만약 얻지 못했으면 힘든 경기가 될 뻔했는데, 다른 능력들도 잘 활용하면 분명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야.“
하비가 운동장에서 나갔지만, 이순신은 축구화에 깃든 능력이 12번째 선수라고 생각될 만큼 든든했다.
라모스는 저 멀리서 이순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꿈FC의 이순신. 재밌는 녀석이군.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라모스의 집중력은 저번에 치른 엘 클라시코에 버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