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분노한 라모스
엘 클라시코.
레알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
이 경기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서로의 이름만 들어도 조건반사적으로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온몸에 땀이 절로 흐르는 지경이었다.
이건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다.
‘전쟁’.
그 자체였다.
“레알 마드리드 공을 잡았습니다!”
“수비를 하던 바르셀로나 선수가 갑자기 쓰러집니다!”
선수들의 팔꿈치와 팔은 무기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라이벌전답게 오늘도 치열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이토록 뛰는 것일까?
선수들은 팬들을 위해서 승리를 갈망했다.
물론 몸값과 명성도 한 스푼 포함되어 있긴 했다.
엘 클라시코의 시청률은 평소보다 높았고, 해외 축구팬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경기였다.
그렇기에 목숨을 내걸고 싸울만했다.
상황이 이러한데 팬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상대편의 기를 죽이려고,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
손님에게 받은 짜증,
성적으로 받은 분노,
차여서 생긴 슬픔 등.
오늘 혹은 그동안 쌓인 감정이 지금, 이 순간 폭발시켰다.
“너희 동네로 꺼져 버렷!”
“흥. 돈으로 우승컵을 사는 놈들이 할 말은 아니지!”
“웃기시네. 너네는 저 꼬맹이 아니면 우리한테 비비지도 못했어.”
호화군단이라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의 유명한 선수들을 전부 사들였고,
바르셀로나는 메시라는 천재를 필두로 팀을 구성했다.
이처럼 양 팀의 색깔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달랐다.
그렇기에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다.
만약 마드리드 식당에서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스페인의 축구였다.
두 팀의 팬은 서로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
다행히 폭력사태까지 번지진 않았다!
“치열한 혈투 끝에 바르셀로나가 원정에서 6점짜리 같은 귀중한 3점을 챙겼습니다.”
경기 결과는 0:1로 바르셀로나가 승리했다.
메시의 환상적인 돌파를 막지 못한 레알 마드리드는 프리킥을 내줬다.
메시는 환상적인 감아 차기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레알 팬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믿을 수 없어…”
“이 자식들아. 너네들 몸값이 얼만데 그따위로밖에 못해!”
“그래 맞아! 우리 바르샤의 유소년팀으로 모두 들어오렴.”
흥분한 레알 팬을 바르셀로나 팬이 거들었다.
“미친놈들아.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우리 팀은 나만 욕할 수 있어!”
“어이구. 무서워라.”
바르셀로나 팬들은 비웃으며 퇴장했다.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울면서 다음 경기를 기약했다.
***
과앙!
라커룸에서 라모스가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쓰레기통은 불쌍할 정도로 찌그러졌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이것도 축구라고 해?”
팀의 주장인 라모스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이 팀에서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20대 초반에 이적해서 10년 넘게 레알의 주전을 넘어 주장으로 뛰었다.
무소불위의 권력!
그나마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슈퍼스타가 하나 있었는데 팀을 떠난 후론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한 선수가 말했다.
“진정해. 주장. 그래도 저번 경기는 우리가 이겼잖아.”
라모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저번 경기는 저번 경기고, 이번 경기는 이번 경기야. 우리가 저번에 이겼다고 해서 이번엔 져야 하는 법이라도 있나?”
“그건 아니지만, 승부의 세계에선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 아냐?”
“닥쳐. 그런 정신으로는 이곳에 절대로 남을 수 없어!”
“크흑.”
라모스는 단호하게 그를 벽으로 밀쳤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무려 15년이었다.
가히 원클럽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0대 시절에 지금의 팀으로 이적했다.
심지어 회장이 나서서 영입을 추진했다.
구단에서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컸기에 꿈FC의 감독인 이에로의 등 번호인 4번을 물려줬다.
누구보다도 구단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넘치는 선수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라커룸은 숙연해졌다.
“흠흠.”
이러한 적막감을 깬 건 감독이었다.
선수들이 감독을 쳐다봤다.
“분위기가 왜 이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모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직도 화를 삭이지 못했다.
“패배의 감정에 오래 휩싸여있는 건 좋지 않다. 국왕컵은 가볍게 휴식을 취하고, 다가올 챔피언스 리그를 준비하자.”
“싫습니다.”
라모스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반기를 들었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지?”
감독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이따위 정신 상태로는 절대로 챔피언스 리그에 나설 수 없습니다. 상대가 약팀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팀원들이 아니면 저는 함께 경기를 뛸 수 없습니다.”
라모스가 몸을 돌려서 선수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경기 똑바로 해! 약팀이라고 대충했다간 전부 다 뒤진다!”
쾅!
라모스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허허. 성질머리하고는.”
감독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씨익 웃었다.
“아씁. 지 혼자 축구하나? 확 그냥 이적해버려?”
“참아. 올해 이적한다는 소문이 있어.”
“아오…진짜!”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뒷담화를 하던 두 선수는 화들짝 놀랐다.
라모스는 콧방귀를 뀐 뒤 자신의 짐을 챙겨서 나갔다.
***
“좀 더 빨리!”
“거기서 무너지면 바로 끝이야!”
“잘했어!”
짝짝짝.
이에로는 방금 연습한 동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걸 보며 박수쳤다.
꿈 FC는 전술 훈련이 한창이었다.
특히 공격과 수비를 가리지 않고 세트피스에 집중했다.
공격 시 세트피스는 꿈FC가 이길 수 있는 무기였고, 수비에서는 지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주전선수들을 얼마나 내보낼까요?”
수석 코치가 물었다.
“기껏해야 4~5명 정도이지 않겠나?”
“저희가 진짜 이길 수 있을까요? 이렇게 연습을 한다 한들 개개인의 능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그렇기에 전술 훈련을 더 중점적으로 해야 해.”
이에로의 표정은 비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확률이…”
“축구를 확률로 하나?”
“…”
수석 코치는 입을 다물었다.
“모두들 우리가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네.
심지어 우리가 이기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을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겨야만 하네. 난 좀 더 이 여정을 즐기고 싶거든.”
레알에 온 뒤로 늘 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이에로였다.
최고의 자리에만 있었던 그는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언더독의 서러움을,
성장하는 즐거움을.
심지어 자기가 아마추어팀의 감독을 맡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인생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챔피언스 리그를 뛸 때보다도,
월드컵을 뛸 때보다도 더더욱 즐거웠다.
그는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느낌.
그가 결코 4부 리그에만 머물 선수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너의 업적이 날 즐겁게 한다.’
이에로는 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걸 이순신에게 전수해주고 싶었다.
이순신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에로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할 말 있으십니까?”
“잘하고 있어. 그렇게만 하면 돼.”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감독의 칭찬에 더더욱 힘을 냈다.
연습 경기가 끝나고 이순신은 침대에 누워서 자신의 현재 능력치를 살펴봤다.
‘다음 경기에서는 어떤 스킬을 공유해야 될까?’
주장 완장의 효과 중 이순신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바로 스킬이었다.
노이즈 캔슬링은 다음 경기에서 그다지 필요 없을 거 같았다.
비록 레알이 이기길 바라는 팬들이 많을 테지만,
경기는 홈구장에서 열릴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선수들의 정신무장은 최고치였다.
이기겠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그렇다면 공유 스킬은 방패연이 좋겠어.’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력을 상쇄시키려면 방패연만큼 좋은 스킬이 없었다.
‘경풍이 형의 활약이 기대되는군.’
방패연은 특히나 골키퍼에게 좋은 스킬이었다.
축구에서 유일하게 손을 쓸 수 있는 포지션은 골키퍼.
그렇기에 방패연과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트로피는 아쉽단 말이지.’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트로피는
‘5부 리그 학살자’와 ‘U-23 아시안컵 우승’ 이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쓸 만한 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레알 마드리드에는 5부 리그 선수도 없었고, 아시아 유망주도 없었다.
오쿠보는 임대를 간 상황이었기에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꼭 이겨야 해.”
이순신이 주목한 건 레알 마드리드를 이겼을 때 얻는 트로피였다.
[트로피 : 자이언트 킬링(스페인)]
[스페인 1부 리그 우승팀을 이겼습니다. 우리 팀보다 높은 리그나 순위의 스페인 팀들에게 패배의 불안감을 심어줍니다.]
이순신은 생각했다.
‘이 트로피만 얻으면 스페인에서 축구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어.’
진심으로 꼭 얻고 싶은 트로피였다.
그다음으로 살펴본 건 명성이었다.
명성 칸은 ‘선’과 ‘악’으로 나뉘었다.
선을 장착하면 부와 명예를,
악을 장착하면 선수로서의 능력을 크게 올려줬다.
그중에서 이순신이 선택한 것은 ‘선’이었다.
‘승리를 위해 악마가 될 순 없으니까.’
악을 선택하면 에이스 킬러, 정강이뼈 수집가, 악동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스킬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팀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었다.
‘유망주 클래스.’
이것이 현재 이순신이 장착한 명성이었다.
“얼른 유망주 딱지를 떼버리고 싶다.”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세레머니, 기부 등으로 올릴 수 있었는데 팬 버프+1와 행운+1이 증가했다.
팬 버프는 팬들의 응원을 받을 때마다 약간의 체력회복과 아주 잠시 능력치가 상승했다.
보통 경기에서 한두 번 정도 발동했다.
[선 계열의 명성이 상승하면 팬 버프가 발생할 확률이 올라갑니다.]
행운은 팬 버프가 발동할 확률과 그 외 인생의 행운에 관여했다.
‘인생의 행운이라…’
지금 이 순간도 그에겐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그냥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이순신은 씨익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아!’
이순신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순신아. 무슨 일이야?”
상대편은 꽤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순신이 전화를 건 사람은 신자영이었다.
“누나 그거 어떻게 됐어요? 저번에 말한 거. 신발!”
“…”
신자영 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안 그래도 오늘 연락해봤는데 내일 도착한대.”
“몇 시쯤이요?”
“한 오전?”
“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연습도 없잖아?”
“그러니까요. 러닝 하면서 길들여놔야죠. 마드리드를 이기려면 꼭 필요해요!”
“고작 신발 하나로?”
“나비효과란 말도 있잖아요. 고작 신발 하나가 경기를 바꿀 수 있다고요!”
이순신은 매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신자영은 내심 데이트라도 하길 바랐건만,
현재 이순신의 머리에는 축구뿐이었다.
갑자기 자기를 잊은 것 같아서 약간은 서운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순 없었다.
“누나. 그러면 내일 봐요!”
툭!
이순신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
신자영은 살짝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