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78화 (79/161)

78화. 프러포즈

“누나. 우린 안 보여요?”

김혁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름 귀여운 척을 했지만, 전혀 귀엽지 않았다.

오히려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응 안 보였어. 순신이가 젤 커서 눈에 잘 보이는 걸 어떡해?”

“크흑!”

김혁규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옆에 있던 임단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키는 평균은 되지만, 크다고는 할 수 없었다.

“형은 왜 괜한 말을 해가지고는…”

“크게 태어나서 미안하다.”

이순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야. 겸손하지 마! 차라리 재수 없게 말해줘!”

김혁규의 눈은 그렁거렸다.

갑자기 울컥함이 밀려왔다.

“그러는 넌 우리는 안 보이냐!”

신자영 옆에 있던 임청수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썼다.

“혁규. 내로남불 오지네.”

이순신이 씨익 웃었다.

김혁규는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서 빠르게 태세전환 했다.

“단장님이 친히 마중 나오시다니! 감사합니다. 아! 구단주님도 계셨네요. 감사합니다!”

옆에서 강대범이 손을 흔들었다.

선수들과 이에로 감독은 훈련 때문에 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교민들과 환영 플래카드가 채워줬다.

“선수들 고생 많았어요!”

“짝짝짝.”

이순신, 김혁규, 임단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환대를 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합니다!”

이순신이 교민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하지만 누구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 고생한 우리 선수들 구호나 한번 불러줍시다!”

“이순신 만세!”

“만세!”

“김혁규 만세!”

“만세!”

“임단결 만세!”“만세!”

“꿈 FC 파이팅!”

“화이팅!”

금의환향이란 단어가 참으로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이순신은 김혁규, 임단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혁규야.”

“응?”

“나 축구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저도요. 형! 진짜 형 믿고 인생 한 번 배팅했는데 대박이에요!”

이순신이 웃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에는 비장함이 담겼다.

***

팀에 복귀한 이순신은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똑바로 해!”

“순신 시주. 아니 주장. 복귀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시구려!”

구멍이 너스레를 떨었다.

“꿈 FC의 목표는 올림픽이 아니라 국왕컵이랑 리그 우승이야.”

“그래도 우리가 아직 그룹에서는 1등이오.”

“연패가 웬 말이냐!”

“…”

이순신이 대표 팀에 차출된 3주 동안,

꿈FC는 1승 2패의 기록을 거뒀다.

심지어 2패는 거의 승점 6점짜리 경기이기도 했다.

떠나기 전 2등과 15점이나 차이 나던 승점이 어느새 9점으로 줄었다.

남은 경기를 고려하면 결코 안정적인 승점 차이는 아니었다.

“아직 1월이야.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

“알았어!”

김혁규가 주먹을 쥐고 대답했다.

“자 다시 한번 해보자! 집중하고!”

선수들은 이순신의 지시로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확실히 이순신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팀 분위기는 차이가 많이 났다.

이에로 감독도 그제야 한숨 놨는지 웃을 수 있었다.

훈련이 끝난 후 선수들이 모였다.

“오늘 훈련하느라고 고생했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푹 쉬도록.”

“넵!”

선수들이 해산했다.

“순신아. 주말에 뭐 할 거야?”

김혁규가 물었다.

“나 낼 약속 있어.”

“누구랑?”

“비…밀.”

윤광섭이 한마디 툭 던졌다.

“혹시 소개팅?”

“아냐!”

“얼굴 빨개지니까 여자는 확실한 거 같은데?”

“…”

이순신은 말이 없었다.

“맞네! 맞아! 누구랑?”

“금발의 미녀?”

“정열적인 스페인? 순신 시주가 한국에선 먹히지 않아도 유럽에서는 좀 먹히나 보오.”

“순신아 잘 되면 알지?”

“아. 몰라!”

축구만 하기에는 혈기왕성한 나이가 아니던가?

이런 소소한 재미라도 있어야 타국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 있었다.

“말해라! 말할 때까지 매우 쳐라!”

선수들은 이순신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캐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독립투사처럼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순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이다.”

축구할 때만큼 각오가 비장했다.

쏴아아아-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절대 땀 냄새를 허용할 수 없어!’

위이이이잉-

헤어드라이어기로 빠르게 머리를 말렸다.

취이이익-

왁스로 멋을 낸 후, 스프레이로 고정했다.

이순신은 거울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봐줄 만하겠지?”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시간이?”

이순신이 시계를 봤다.

테러가 나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2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순신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순신. 어디가?”

가볍게 조깅을 하고 온 하비가 물었다.

“약속 있어.”

“응. 데이트 잘해.”

그는 씨익 웃으며 숙소로 들어갔다.

“아. 저 자식. 소문낼 거 같은데?”

하지만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몸을 돌려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휴.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약속 장소는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이었다.

“여기서 자영이 누나랑 처음으로 데이트했지. 덕분에 엘 클라시코도 봤고.”

이순신은 경기 대진표를 보았다.

경기가 있긴 했으나, 엘 클라시코는 아니었다.

레알 마드리드 VS 발렌시아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표 두 장이요.”

신자영과 만나기로 한 이순신은 저녁에 경기를 보고자 표를 끊었다.

“광인이가 선발로 나왔으면 발렌시아를 끊었을 텐데.”

아쉽게도 이광인은 선발 명단이 아니었다.

이광인은 4강전에 합류해서 대한민국이 우승하는 데 일조했다.

‘광인이랑 좀 더 같이 뛰고 싶은데.’

이순신은 아쉬웠다.

오진성도 좋은 선수이긴 했으나, 그 위치에 이광인이 들어온다면 팀의 공격력은 한층 더 강력해질 거 같았다.

‘팀의 공격력이 좋아지면, 오히려 득점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단 말이지.’

프리킥을 전담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자신을 향한 마크가 느슨해졌다.

그때 비격진천뢰나 천지현황포를 쓰면 성공률이 높았다.

설령 골이 안 들어가더라도 상대에게 긴장감을 줌으로써 공격진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순신의 머릿속은 어느새 축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앞으로 치러야 할 경기들을 생각했다.

“순신아!”

신자영이 순신을 불렀다.

이순신이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나! 잘 지냈어요?”

꽃무늬 원피스에 알이 큰 선글라스를 썼다.

‘오늘도 예쁘긴 한데…’

“순신아. 많이 기다렸어? 나도 10분 정도 일찍 온 건데, 넌 몇 시에 온 거야?”

“옆에는 누구예요?”

이순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긴장을 넘어서 경계심이 가득했다.

신자영의 옆에는 카메라맨이 두 사람을 찍고 있었다.

신자영이 웃으며 소개했다.

“아. 저번에 말했지? 꿈FC 다큐멘터리 찍는다고. 선수들이 쉴 때 뭐 하는지 영상을 좀 따고 싶으시대.”

“아…”

이순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느 정도 계약에 합의한 부분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촬영의 일부라니. 간만에 단둘이 데이트하는 줄 알았는데…’

이순신은 내심 서운했다.

‘그런데 왠지 오늘 준비했던 게 부질없게 느껴지네. 그냥 대충 트레이닝복이나 입고 나올걸.’

기분이 점점 심해로 떨어지던 찰나였다.

“순신아. 뭐 먹을까? 나 배고파!”

신자영이 이순신의 팔짱을 꼈다.

“…어…?”

신자영의 가슴이 팔뚝에 닿자 순간 이순신의 뇌가 정지했다.

“남매 컨셉 좋은데요?”

둘을 따라다닐 카메라맨은 영상이 잘 나올 거 같아서 씨익 웃었다.

‘남매라…’

이순신은 씁쓸하게 웃었다.

덥석.

순간 신자영이 깜짝 놀랐다.

이순신이 손을 잡았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죠?”

“어?…어.”

박력 있는 이순신의 행동에 신자영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한식당이었다.

“어서 오세요.”

스페인에서 들리는 친절한 한국 음성은 살짝 색달랐다.

“해물파전이랑 제육볶음 하나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순신이 능숙하게 주문을 마쳤다.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올 동안 담소를 나눴다.

“누나. 요즘은 별로 안 바쁜가 봐요?”

“아니? 나 엄청 바쁜데?”

“그런데 오늘 어떻게 나온 거예요?”

“너랑 맛있는 거 먹으러 시간을 뺐지!”

“진짜요?”

“당연하지!”

신자영은 종종 선수들에게 밥 먹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꿈 FC에서 이렇게 따로 밥을 먹는 건 이순신뿐이었다.

“에이- 거짓말.”

“후-”

신자영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순신아. 너 혹시 모태솔로냐?”

“아- 왜 아픈 델 찔러요… 그러는 누나는 모태솔로 아니라서 좋겠네요!”

“하- 순신아. 넌 여자 사귀기 그른 거 같다.”

신자영은 골려줄 생각에 신났다.

그런데 뜻밖의 어택이 들어왔다.

“누나가 로맨스 좀 알려줘요.”

“뭐?”

순간 신자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왜?”

“나도 연애도 하고 장가도 가고 그래야죠.”

“으음…”

신자영이 잠시 고민했다.

“하긴. 우리 순신이 앞으로 더 유명해지면 연예인들이나 팬들이 달라붙을 텐데 대처법은 필요하겠네.”

“그게 왜 필요해요? 누나가 다 막아줄 거잖아요?”

“내가? 왜?”

“누나가 내 에이전트잖아요. 이 누나가 월급을 날먹하려고 하네!”

두 사람의 밀당에 당황스러운 건 카메라맨이었다.

‘둘 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사귀는 건지, 비즈니스 관계인지, 진짜 친한 건지 헷갈렸다.

그때 음식이 나왔다.

해물파전은 한국의 음식이지만, 스페인의 해산물을 써서 그런지 냄새와 맛이 묘하게 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누나가 해준 전이 더 맛있었어요.”

“아. 그때 힘들어서 뒤질 뻔했지만, 너네들이 맛있게 먹어줘서 기분은 좋았어.”

“그런데 이 제육볶음 진짜 맛있어요!”

“응. 순신이 많이 먹어.”

신자영이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이순신의 하얀 쌀밥 위에 올려줬다.

“아암!”

이순신은 크게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맛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한국의 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가볍게 츄러스를 먹으며 거리를 구경했다.

스페인은 언제 봐도 새로웠다.

저녁에는 열심히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했다.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2:0 승리였다.

“오늘 즐거웠어. 순신아.”

“저도요. 누나랑 같이 응원해서 꿀잼인 듯.”

“난 언젠가 너에게 꼭 레알 유니폼을 입힐 거야!”

“그러면 난 누나한테 결혼하자고 할래요.”

“뭐?”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온 순신의 말에 신자영은 당황했다.

무엇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카메라맨도 살짝 당황스러웠다.

‘이거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 거였어?’

그 순간이었다.

이순신은 카메라를 보고 씨익 웃었다.

“편집 점 제가 잡아줬죠? 흐흐.”

이순신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야! 놀랬잖아!”

신자영이 손바닥으로 이순신의 등을 때렸다.

“내가 레알 마드리드 갈 리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거기가 가고 싶어서 갈 수 있는 팀이긴 한가?”

“그게 무슨 소리야! 꿈은 크게 가지라고 했지!”

이순신과 신자영은 티격태격했다.

“촬영은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차로 숙소까지 가시죠!”

“넵!”

신자영은 뒷자리, 이순신은 조수석에 탔다.

신자영은 졸린 지 잠이 들었다.

이순신은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축구인답게 프러포즈는 축구장에서 해야겠어. 다만 그 시점은 언제가 좋을까?’

올림픽? 월드컵? 챔피언스 리그?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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