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AFC U-23 챔피언십 본선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기사를 훑어봤다.
- 스페인 4부 리그 출신 이순신 올림픽 대표 발탁-
-인맥 축구? 안태리 스페인 4부 리거를 발탁하다.-
-4부 리그 뽑은 올림픽 대표팀의 몰락. 이대로 괜찮은가?-
“하여간 기자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극적이지 못하면 기사를 못 쓰지.”
이순신은 혀를 끌끌 찼다.
내용 역시 자극적이었다.
“젠장. 조회수만 올려줬네.”
알면서도 이순신은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정작 김혁규가 더 걱정하는 눈치였다.
“순신아. 너 괜찮아?”
“뭐가?”
“기사 내용이…”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전혀 문제없어. 우리가 인맥으로 뽑힌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돼. 혁규 쫄?”
“무슨 소리야! 당연히 보여줘야지!”
“단결이는? 자신 있지?”
“네. 형!”
임단결도 오랜만에 부름 받은 대표팀인지라 각오가 남달랐다.
그동안에는 바르샤 트리오라 불리었지만,
이우승과 천승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적었던 그였다.
하지만 포지션 변경은 그에게 신의 한 수였다.
두 선수와는 다르게 임단결은 계속 경기에 나섰다.
여기에 이순신의 튜터링까지 더해지니 임단결은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대표팀에서 고질적인 풀백 위치는 안태리 감독에게 큰 무기였다.
발렌시아전을 본 안태리는 이순신과의 호흡을 보고 뽑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순신 선수 아니세요?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비행기 안에서 이순신을 알아본 팬이 다가왔다.
“물론이죠! 여기요!”
“감사합니다! 예선전 활약 기대할게요!”
“고맙습니다.”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4부 리그라고 무시하는 건 협회의 임원들과 기자들뿐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팬들은 지난 발렌시아와의 경기 때문에 오히려 꿈 FC의 세 선수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시드니 공항에 내린 세 선수는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안태리가 직접 그들을 마중 나왔다.
“반갑다. 이순신. 김혁규, 임단결.”
“잘 계셨습니까? 감독님.”
안태리와 함께 그들은 차에 올라서 훈련장으로 향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더불어 이것저것 잡담을 주고받았다.
“벌써 다 왔네?”
훈련장에 내리자 장승빈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순신이 형. 반가워!”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현문이랑, 대한이는?”
“둘 다 이번엔 부상 때문에 빠지게 됐어.”
“아쉽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이순신은 무언가 생각이 났다.
“감독님. 광인이는 언제쯤 와요?”
“차출 공문은 보냈고 선발도 했는데 이놈들이 꼬장을 부리네? 4강전 이후에나 합류할 수 있을 거 같다. 결국 최대한 늦게 보내주겠다는 이야기지.”
“같이 발을 맞춰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안태리가 팔짱을 꼈다.
“그러게 말이다. 독일에서 뛰고 있는 대건이도 차출 거부당했다.”
안태리는 이광인이나 정대건이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어주면서 공격을 조율하길 바랐지만,
소속팀의 심술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혁규 대신에 진성이를 뽑는 건데 말이지?”
“감독님! 제가 잘하겠습니다!”
안태리의 장난에 김혁규는 화들짝 놀랐다.
“농담이야. 인마! 너도 잘하니까 뽑은 거야. 열심히 뛰어봐!”
“넵!”
이순신은 내심 아쉬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믿음직한 동료로 혁규 대신 진성이를 선택했을 텐데…’
이순신은 아무래도 그동안 함께 발을 맞춰온 혁규가 편했다.
필시 혁규의 빠른 발은 대표팀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다만 문제는 인지도.
단 한 번이라도 혁규가 대표팀에 뽑히면 사람들이 그 진가를 알아보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지라 다소 애매한 부분도 한몫했다.
그래서 혁규를 ‘믿음직한 동료’로 이순신은 택했던 것이다.
대표팀에 선발된 김혁규는 소속팀에서보다 훨씬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와. 혁규 요즘 폼이 올랐네. 마치 어릴 때 청수를 보는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김혁규는 칭찬을 해주면 해줄수록 더더욱 불타오르는 타입이었다.
이순신의 능력이야 워낙 익히 봐서 알고 있었지만,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김혁규와 임단결의 실력은 결코 자신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쟤네들보다 못하면 망신이야.’
오히려 기존 선수들이 더더욱 열심히 뛰는 효과를 줬다.
.
4부 리그라고 텃세를 부리기엔 꿈FC는 1부 리그 발렌시아를 이긴 팀이었다.
그것이 비록 운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보여준 경기력을 보고 실력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순 없었다.
리그의 수준이 선수의 수준을 말해주지 않았다.
4부 리그 선수에게 주장을 내준 것이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지만, 이순신은 실력으로 자신이 대표팀에 뽑히기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드디어 마침내 예선전의 막이 올랐다.
***
한국 팀의 첫 상대는 이란이었다.
조별 예선에서 이란, 우즈베키스탄, 태국과 한 조였다.
“올림픽 진출을 위한 첫 관문.
한국과 이란의 경기가 지금 막 펼쳐집니다.”
안태리는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 입었다.
과연 테리우스란 별명이 아쉽지 않은 남자였다.
오히려 중년의 원숙미가 더더욱 느껴졌다.
외모가 주는 카리스마도 분명 있는 법이었다.
“이란을 잡으면, 우즈베키스탄과 태국은 그렇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란을 잡지 못하면 모든 꼬여버릴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도록!”
“넵!”
안태리가 먼저 경기장으로 향했다.
라커룸에는 선수들만 남았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것이 국가대표의 무게였다.
“순신이 형. 한마디 해.”
이순신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필락즉생 필승 즉사.”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형 그게 뭐야.”
“순신아.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이순신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즐기려고 하면 이길 것이고, 이기려고 하면 질 것이다. 물침대 위에서 방방 뛰며 즐기자!”
“우오오!”
이순신은 한 골 차로 앞서면 텐백수비를 하는 중동의 침대 축구를 깠다.
그렇기에 한국 팀에게 오늘 필요한 건 ‘골’이었다!
그것은 팬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유럽 같은 강팀과의 대결에서는 투혼을 불사르는 경기를 보여주면서 감동을 주지만,
중동의 침대 축구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왔다.
그렇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순신 선수! 40M 중거리 슛을 성공시킵니다!”
이 모든 걱정을 이순신이 중거리 슛으로 날려버렸다.
이란 선수들은 망연자실했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여유가 넘쳤다.
“혁규. 받아!”
김혁규는 신들린 드리블로 이란 수비수를 제치더니 슛을 넣었다!
“한국이 2:0으로 앞서갑니다!”
“젠장! 네가 막았어야지.”
“넌 뭐 했는데!”
이란 선수들은 서로한테 잘못을 떠넘겼다.
그들의 소원은 오직 하나.
푹신푹신한 호주 잔디에 얼른 누워서 90분 동안 누워있다 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더 화가 나는 건 대한민국 팀이 완전한 2군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4부 리그 선수들한테 농락당하다니.”
선발로 나선 이순신, 김혁규, 임단결에 대한 정보를 듣고는 이란 팀은 크게 웃었다.
“아무리 한국이 아시아의 종이호랑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데?”
“맞아. 국가대표도 손민흥 빼면 평범한 수준이라고.”
그렇게 비하했던 팀에게 전반에만 무려 2:0으로 지고 있다는 건 인정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야. 너 정말 4부 리그 맞아? 임대로 잠시 4부에 있는 거 아냐?”
이란 선수가 영어로 물었다.
“물론이지. 난 스페인 4부 리그 꿈 FC 소속이다.”
이순신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스페인 4부 리그라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이대로 질 순 없지.”
이란 팀의 눈빛이 달라졌다.
공격은 매서워졌고, 수비는 단단해졌다.
그럼에도 이순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전반 30분! 코너킥을 받은 이순신 선수가 헤딩으로 꽂아 넣습니다!”
“전반 44분! 장승빈 선수의 패스를 받은 이순신 선수가 그대로 찔러 넣습니다!”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이순신은 그야말로 맹폭을 가했다.
기껏해야 1점 차로 승부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란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순신 선수가 과거 6:2로 패배한 치욕을 되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대표 경기가 아니라는 게 매우 아쉬울 정도군요!”
“이순신! 이순신! 이순신!”
호주에 온 대한민국 응원단은 이순신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란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후반전에 임했다.
“아아! 이순신 선수가 넘어집니다!”
“야!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들켰나?”
이순신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누가 봐도 고의성이 있었다.
“하하하! 이순신 선수. 참 재밌는 선수네요!”
이순신은 팬들의 울분을 풀어줬다.
보통은 세레머니를 통해서 표출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경기 중간에 저질러 버렸다.
그 점이 이란 선수들을 더욱 자극 했다.
한국산 침대는 포근하고 아늑했다.
4:0으로 지고 있던 이란은 한 골이라도 넣어서 골득실차를 없애야 했다.
그래야 다음 상대 팀과의 대결에서 여유롭게 임할 수 있었다.
여기서 –4라는 기록을 줄이지 못한다면,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고 경기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
이순신이 노린 게 바로 그 지점이었다.
라커룸에서 선수들은 처음에 탐탁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침대 축구를 하는 건…”
“후반전 내내 하겠다는 게 아니야. 경기 시작하고 5분 정도만 하자. 상대가 화날 정도로만 말이지.”
“난 할래. 호구 새끼도 아니고 말이지.”
“나도! 받은 대로 한번은 되돌려 줘야 인지상정이지!”
“그래도 감독님한테 미리 말해야 되지 않을까?”
“책임은 내가 질게.”
그 말에 더는 이견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의 계획은 적중했다.
벤치에서 지켜보는 안태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순신 뭐하는 거야? 빨리 안 일어나?”
설령 상대가 비겁하게 나오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임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힐끗 벤치를 보았다.
안태리가 눈이 마주쳤다.
이순신은 박수치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끝내자!”
4:0으로 이기고 있는 팀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공격을 펼쳤다.
화끈한 공격 축구에 팬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결국, 이성을 잃은 이란 팀은 생각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경기에 지더라도 저 녀석만큼은 꼭 데리고 간다.’
이순신의 시선이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에게 향했다.
이란의 미드필더는 이순신에게 살인 태클을 가했다.
몸을 날리면서까지 한 명백한 파울 행위였다.
“이란의 위험한 태클! 아무리 지고 있어도 저건 아니죠!”
“으아아악!”
이란 미드필더가 노린 건 이순신의 정강이였다.
하지만 정강이 가드에 스파이크가 미끄러졌고,
오히려 발목이 삐끗하는 부상을 당했다.
이순신은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
“야. 왜 그래? 괜찮아?”
[거북선이 발동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응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