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70화 (71/161)

70화. 비가 오는 날엔…

투둑투둑.

거센 빗줄기가 운동장의 잔디를 때렸다.

잔디는 빗방울을 맞고도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났다.

꿈 FC의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비가 시원하게 내리면서 선수들의 열기를 식혀줌과 동시에 마음의 안정을 주면서 차분함을 선물했다.

양 팀 선수들은 모두 한계치를 넘은 상태였다.

사점을 넘었다.

인간은 그 지점을 넘어서면 한순간에 피곤함이 사라진다.

경기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면 어떠한 후폭풍이 몰아칠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겨야만 했다.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모든 노력이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

이순신이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선수들이 이순신을 바라봤다.

“승부차기가 아니라 깔끔하게 연장전에서 끝내자.”

김혁규, 윤광섭, 구멍을 비롯한 꿈FC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은 고개를 돌렸다.

꿈 FC의 골문 앞에서 매섭게 발렌시아를 노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발렌시아 선수들이 움찔했다.

자신들이 포식자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먹잇감이 되었다.

더군다나 1명이 부족한 상황은 그들의 체력을 빠르게 소모시켰다.

가야 역시 겁먹은 동료들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발렌시아다.

그동안 이보다 힘든 역경은 무수히도 많이 겪어왔다.

하나만 기억해라.

여기서 저 녀석들한테 지면 개망신이라는 거.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발렌시아 주장인 가야도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러면서 이순신을 보고 씨익 웃었다.

이순신 역시 웃었다.

수군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역사를 가진 두 나라.

조선과 에스파냐.

역사상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었던 수중전이 축구를 통해서 성사됐다.

특히 충무공은 바다 위에서 져 본 적 없는 불패의 지휘관.

안타깝게도 이번 경기에서도 도움을 줄 스킬이나 보상이 없었다.

[충무공이 머쓱해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수중전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순신은 충무공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발 끈이 끊어질지언정 풀리지 않게 꽉 묶었다.

카메라맨은 이순신과 이광인을 대비 컷으로 보여줬다.

두 선수 모두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새벽 2시가 훨씬 넘은 시간.

댓글 반응도 역시 뜨거웠다.

ㄴ 나 낼 연차 냈다.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보고 잔다.

ㄴ 이런 게 자강두천이지!

ㄴ 이순신도 이광인도 미쳤다.

ㄴ 지금 문 연 치킨집 없냐?

가장 기분이 좋은 사람은 피디였다.

“대박이다. 대박. 흐흐흐.”

국장한테 128강전을 중계한다고 말할 때만 해도 온갖 욕이란 욕을 다 먹었다.

내일 아침에는 당당히 국장 앞에서 가슴을 펼 수 있다!

모두가 즐거운 새벽이었고,

그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쇼타임이 펼쳐졌다.

“아- 이광인 선수. 몸이 좀 무거워 보이는데요?”

“젠장!”

이순신은 이광인의 패스를 계속 끊어냈다.

수중전에서는 이광인의 장점인 패스의 위력이 반감됐다.

“이순신 선수의 롱패스!”

반면, 이순신은 멀리서 롱패스를 뿌려댔다.

이순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빌드업은 매우 단단했다.

좌우에서 김혁규와 윤광섭이 달렸다.

“이 자식들은 좀비인가? 왜 지치지도 않는 건데!”

발렌시아 선수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꿈 FC의 미친 체력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발렌시아에게 컵대회 128강전은 그저 지나가는 관문쯤이었고,

꿈FC에는 컵대회 우승이 전부였다.

심지어 체력만큼은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연장 전반전이 끝날 무렵,

‘열심히 두드려서 체력을 소모시켜라. 후반전엔 우리가 미친 듯이 흔들어서 반격해주마.’

가야는 꿈FC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후반전을 대비했다.

“이순신 선수 공을 잡습니다!”

이순신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프 라인을 넘었다.

꿈 FC의 선수들이 전진하면서 발렌시아의 수비들을 분산시켰다.

‘정면으로 오버래핑? 그런 공격이 우리한테 먹힐 거 같아? 저 무모한 공격만 막으면 우리의 승리가 확실하군.’

가야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자리 지켜!”

1:1 수비 대신 지역 방어를 지시했다.

그 순간이었다.

[지자포가 발동했습니다.]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이순신이 찬 공은 낮고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발렌시아의 골문을 향해서 날아갔다.

“소…속도가 안 줄어?”

이광인은 그저 옆으로 지나가는 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들어오니,

발렌시아 골키퍼도 당황했다.

코스가 너무 예리했다.

가랑이 사이로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 다리를 오므리고 손을 뻗었다.

공은 골키퍼의 손에서 물보라를 일으킨 후 튕겼다.

“젠장!”

발렌시아 골키퍼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손끝에 힘을 콱 쥐었다.

평소에 손가락으로 ‘푸쉬업’을 자주 할 만큼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손가락 힘을 기른 그였다.

하지만 빌어먹을 비가 그걸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손끝에는 걸렸지만,

미끄러지는 공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툭!

“공이 골라인을 넘었습니다!”

“젠장!”

퍽퍽.

발렌시아 골키퍼가 두 주먹으로 땅을 힘껏 내려치며 좌절했다.

“연장 전반전이 끝납니다!”

발렌시아 선수들은 멍하니 골문을 넘은 공만 바라보았다.

인생을 살면서 몇 번 느껴 보지 못할 허탈함을 지금 이 순간에 느낀 것이다.

반면, 꿈FC 선수들은 그 누구 하나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착해. 경기 아직 안 끝났어.”

[주장 완장 효과가 발동했습니다.]

정규시간에 충분히 겪었다.

2:0에서 2:2가 되는 상황을.

방심은 패배의 지름길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이광인도 의지를 다졌다.

후반전에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자신의 장기인 패스를 포기했다.

대신 드리블 돌파를 선택했다.

그의 탈압박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이광인 선수. 공과 한 몸이 된 거 같습니다!”

비에 젖은 그라운드에서 공을 다루는 건 훨씬 어려운 테크닉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광인은 자유자재로 공을 다룰 뿐 아니라, 하비의 머리 위로 공을 넘겨서 빠져나갔다.

“이광인 선수 측면 돌파를 시도합니다.”

“단결아. 자리 바꾸자!”

이순신이 마중 나왔다.

‘이 형이 이렇게 컸던가?’

이광인은 겁을 먹었다.

하지만 뚫어내야만 했다.

그래야 험난한 축구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광인!”

페널티에어리어로 고메스가 뛰어 들어갔다.

이광인은 공을 툭 차면서 그대로 크로스를 올렸다.

“이순신 선수 발에 맞은 공을 구멍 선수가 지켜냅니다!”

안타깝게도 이광인의 크로스는 실패했다.

“젠장.”

그에겐 동 나이대의 최고 선수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하지만 성인 무대에서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누가 오래 축구를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축구를 더 잘하느냐가 중요했다.

지금의 이광인은 이순신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광인! 빨리 돌아와!”

가야가 소리쳤다.

‘그래.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이광인은 재빨리 진영으로 복귀했다.

연장 후반전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한 골이라도 더 넣어서 어떻게든 승부차기로 끌고 가야 하는 발렌시아와 경기를 마무리 짓고 싶은 꿈 FC의 열망이 충돌했다.

“하아. 하아. 조금만 더.”

이순신의 의지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전해졌다.

“이겨내라. 그게 축구다!”

이에로 역시 벤치에서 소리쳤다.

이 경기를 못 잡으면 선수들이 느낄 현자 타임은 생각보다 길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리그에서 겪을 고된 상황이 너무나 선명했다.

구멍이 공을 잡았다.

그의 앞을 이광인이 막아섰다.

“시주. 비키시오.”

“형이라면 비키겠어요?”

이광인은 어이가 없었다.

“그럴 줄 알고 패스!”

구멍은 뒤에서 뛰어나온 임단결에게 공을 띄워줬다.

뒤꿈치로 공을 받은 임단결은 거칠게 달렸다.

발렌시아의 수비수들이 에워쌌다.

“너네 한 명 모자라.”

임단결은 씨익 웃었다.

빈 공간으로 스루패스를 시도했다.

“멍청한 놈. 비가 이렇게 오는 데 공이 굴러가겠어?”

발렌시아의 수비수 말대로 공은 얼마 안 가서 멈췄다.

그는 귀찮은 듯 어슬렁 뛰었다.

그 순간이었다.

임단결과 위치를 바꾼 이순신이 측면에서 미친 듯이 달려왔다.

“뭐! 뭐야!”

발렌시아의 수비수는 이순신이 일으킨 물보라에 당황해서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측면에서 대각선으로 달렸다.

“저 녀석의 중거리 슛을 조심해야 해.”

발렌시아는 잔뜩 겁에 질렸다.

“나와!”

가야가 같은 편을 끌어당기고 재빨리 붙었다.

“수비수치곤 발재간이 좋지만, 더는 앞으로 나가기 곤란해. 물론 너한테 슛을 허용할 생각은 전혀 없어.”

“난 너를 제치고 해트트릭을 할 거야.”

이순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의 고통으로 잠시나마 온몸의 세포들이 깨어났다.

화려한 개인기가 아닌 정면 돌파를 택했다.

쿵!

이순신에게 부딪힌 가야는 미끄러졌다.

정당한 볼 다툼이었다.

“이순신 선수! 그대로 슛을 쏩니다!”

이순신이 골대를 노리며 슛을 날렸다.

“이번엔 안 먹혀!”

발렌시아 골키퍼는 온몸을 날려서 공을 튕겨 냈다.

“봤지!”

하지만 이순신이 날아오고 있었다.

[현자포가 발동합니다.]

이순신이 튕겨져 나온 공을 향해 머리를 날렸다.

퉁!

골키퍼의 반대 방향으로 골이 들어갔다.

“와!”

이순신이 잔디에 미끄러졌다.

마치 그라운드를 헤집는 용과 같았다.

꿈FC 선수들은 모두 달려와서 이순신을 감쌌다.

“우와! 순신아 네가 최고다!”

관중들도 흥분한 나머지 경기장에 난입했다.

안전요원이 제지하는데 꽤 애먹었다.

이순신을 감싼 선수들이 물러났다.

그는 누워서 비를 즐기고 있었다.

마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순신은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비틀거리며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막자. 그리고 우리는 다음 라운드로 가자!”

“가자!”

이순신의 외침에 선수들이 반응했다.

“역시 해상제독이오.”

구멍은 이순신이 뿜어 대는 카리스마에 오줌보를 지렸다.

비가 왔기에 망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오줌싸개로 평생 놀림을 당했을 것이다.

삐이익-

남은 시간은 5분.

이순신을 비롯한 꿈FC는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걸어 잠가야 할 때였다.

“할 수 있어.”

이광인은 고군분투했다.

“이광인 선수의 감아 차기!”

“아 골대를 벗어나고 맙니다.”

이광인 뿐만 아니었다. 고메스도 틈만 나면 거친 몸싸움을 시도하면서 기회를 만들었다.

“고메스 선수 슛!”

“보경풍 선수가 놓칩니다!”

“하지만 이순신 선수가 재빨리 공을 걷어 냅니다. 코너킥!”

“이광인 선수가 공을 올립니다.”

“다소 높긴 한데 고메스 선수의 머리에 닿았습니다!”

“아! 이번엔 보경풍 선수가 잡아냅니다!”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1분이었다.

고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발 좀 들어가라고!”

하지만 고메스의 헛발질로 공은 뒤쪽으로 흘렀다.

삐이이익-

가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4부 리그 꿈 FC가 1부 리그 발렌시아를 128강전에서 잡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임청수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광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환호하는 꿈 FC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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