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급발진
‘시발. 븅신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순신은 후회의 파도에 휩쓸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싸늘하다.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축구를 하면서도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신자영은?
아직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가 죽어. 이순신. 왜 거기서 급발진은 해가지고…’
이순신이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이 누나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거절이면 거절, 승낙이면 승낙. 아무거나 빨리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신자영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러더니 생각에 잠겼다.
‘계산하는 중인가?’
이순신은 구멍이 해준 조언이 생각났다.
“순신 시주. 여자는 요물이니 조심해야 하오. 특히 신자영처럼 예쁘고 똑똑한 여자일수록 말이오. 부디 어장 속의 물고기가 되어 허우적거리다가 축구 인생 종 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나무관세음보살.”
땡중 놈이 무얼 아느냐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도를 깨우쳤던 것일까?
아니면 관심법을 통해서 미래를 봤던 것일까?
신자영의 큰 눈이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순신아.”
마침내 신자영이 입을 열었다.
시간으로는 1~2분 정도밖에 안 지났지만, 이순신의 호흡은 90분 풀타임을 뛴 듯했다.
“네!”
이순신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생각 좀 해볼게.”
신자영이 싱긋 웃었다.
이 와중에 예뻤다.
하지만,
이순신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yes or no.
이순신이 생각한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신자영이 고민하는 동안,
이순신 역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착잡함이 온몸에 휘감길 때,
반전이 일어났다.
“에이전트 제안해 준 거 정말 고맙지만, 아직 내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안 서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순신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
이순신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아닌데? 난 누나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어요!”
이순신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신자영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에이전트 제안이 당황스러웠다.
아나운서를 은퇴하고 그녀가 제2의 인생으로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스포츠 에이전트였다.
단순히 선수들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 최고의 선수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그녀가 퇴사 후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유 중 하나도 좀 더 축구를 잘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 -
왜 유럽인들이 축구에 미친 듯이 돈을 쏟아붓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체험하면 더 나은 에이전트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던 찰나에 이순신을 만나게 됐다.
‘순신이는 확실히 상품성이 있어.’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신자영은 이순신의 상품성을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
무엇보다 소년처럼 빛나는 눈빛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왠지 그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훗날 엄청난 금액을 받고 이적하는 바르샤의 메시와 유벤투스의 나르가르두 같은 월드클래스가 될 것만 같았다.
다만, 그것을 자신이 망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너네 단장이랑 구단주님하고 이야기해보자.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까 들어가 보고.”
“바래다줄게요.”
“착하네. 순신이. 하지만 괜찮아. 나 저기 호텔에서 묵고 있거든.”
신자영이 근처에 있는 호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이순신은 내심 아쉬웠다.
“내가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줄게.”
지하철역까지는 5분.
‘나랑 사귈래요?’
다행히 이순신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천천히 걷고자 노력했지만 부질없었다.
“순신아. 오늘 즐거웠어.”
신자영이 웃었다.
“저도요.”
척.
신자영이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약간의 머뭇거림.
악수하면 연인이 아니라 친구가 될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덥썩.
그래도 이순신은 손을 잡았다.
그 손이라도 잡아야만 인연의 끈이 계속 이어질 거 같았으니까.
“잘 생각해봐요. 난 누나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난 선수가 될 거에요!”
이순신이 씨익 웃었다.
“갈게요~!”
이순신은 멋쩍은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이 출발했다.
신자영도 몸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두근두근.
도리어 신자영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골입니다! 이순신 선수. 원정 마지막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신자영과 헤어진 후 이순신의 가슴은 뜨거웠다.
벤치에 가만히 있다간 자연발화로 몸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애꿎은 상대편만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꿈 FC. 이제 플레이오프만 통과하면 4부 리그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5부 리그 전 그룹을 통틀어 득점 1위, 2위, 3위는 모두 꿈 FC선수들이었다.
여기에 마지막 해트트릭으로 이순신은 리그 득점 1위가 되었다.
수비수가 득점왕에 오른 사상 최초의 케이스였다.
이순신만 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꿈 FC는 7부에서 5부까지 다이렉트로 승격한 유일한 팀이었다.
그렇기에 스페인 언론에서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1부나 2부 리그에서는 평가 절하됐다.
ㄴ 5부 리그에 괴물이 나타났다!
ㄴ 그래 봐야 아마추어임.
ㄴ 고등학교 때 날려도 성인 무대에서 탈탈 털리는 게 프로임.
ㄴ 아냐. 이번엔 좀 다른 듯. 무려 한국 국가대표래.
ㄴ 하하하. 그 나라도 미쳤네. 5부 리그. 아니 4부 리그 선수가 국가대표라고? 쯧쯧.
ㄴ 이에로가 감독으로 있는데?
ㄴ 이에로는 퇴물이야! 최단기간 스페인 감독에서 사임했다고!
한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국 리그조차도 관심이 사그라드는 판국에 해외 아마추어 리그까지 중계할 이유는 없었다.
그나마 축구를 좋아하는 찐 팬들은 ‘청수는 국가대표’를 통해서 소통하며 ‘순신 코인’을 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그 날이 왔다.
4부 리그 16위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날이었다.
만약 여기서 지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쌓아온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 경기다. 여기서 이기면 우리는 더 높은 리그로 도약할 수 있다. 알겠나?”
“넵!”
상대 팀 역시 강등만큼은 피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순신, 김혁규, 윤광섭은 무자비하게 상대편의 골대에 골을 퍼부었다.
원정에서 5:0으로 이긴 꿈 FC는 상대를 홈그라운드로 불렀다.
“내려가긴 쉬워도 올라가긴 어려운 게 바로 스페인리그다.
우리도 상대에게 5골 이상 퍼부어주자!”
“넵!”
상대편의 각오도 남달랐다.
초반부터 거칠게 꿈 FC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비진을 뚫을 순 없었다.
“수비가 장난 아니야. 그렇다면…”
상대 팀의 선택은 차다 보면 들어가겠지 라며 중거리 슛을 때리는 것이었다.
“중거리 슛! 하지만 보경풍 골키퍼가 손쉽게 막아냅니다!”
“공을 받은 이순신 선수. 길게 차줍니다!”
“윤광섭 선수. 측면에서 달리기 시작하는데요.”
“오진성 선수와 2:1 패스.”
“전방에 있는 고미 선수의 헤딩!”
“흘러나온 공을 이순신 선수가 때려 넣습니다! 언제 여기까지 올라온 거죠?”
삐이이익-
“경기 끝납니다. 이순신 선수의 쐐기 골로 꿈FC가 4:0으로 완승을 거두고 4부 리그로 승격합니다.”
“순신아. 우리가 해냈어!”
“순신 시주를 따라오길 잘했구려.”
“우리가 최고다!!!!!”
꿈 FC 선수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히든 보상 : 축하합니다. 팀을 승격시켰습니다.]
[장비 칸 : 트로피가 해제됩니다.]
[트로피 : 5부 리그 학살자]
[5부 리그에서 수비수 최초로 득점왕과 MVP를 차지했습니다.]
[5부 리그 출신 선수들에게 위압감을 주어 능력치를 하락시킵니다.]
‘음… 장비 칸이 해제돼서 좋긴 한데 좀 애매한데?’
신발, 주장 완장에 이은 세 번째 장비 칸이 해제됐다.
문제는 당장 쓸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리그가 다 끝난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잠깐! 만약 다른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개인 트로피를 획득한다면?’
[충무공이 트로피 해금 기념으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원하는 트로피 효과 두 개를 알려줍니다.]
‘아오. 진짜 치사하게. 도감 같은 걸로 쫘악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충무공이 헛기침을 합니다.]
‘일단 올림픽 우승.’
이순신은 투덜거리면서도 충무공의 선물을 이용했다.
다가올 대회 중 가장 큰 대회이자 마지막 대회일 수도 있었으니까.
[트로피 : 올림픽 우승]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우리 팀의 23세 이하 선수들의 능력치를 상승시키고, 상대편 23세 이하 선수들의 능력치를 하락시킵니다.]
[최초, 득점왕, MVP를 추가로 달성할 경우 보상이 증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망주학살에 최고였다.
‘월드컵, 아시안컵, 챔피언스리그 등 죽기 살기로 트로피를 따게 된다면 와-’
이순신이 감탄을 금치 못할 때 다음 트로피를 떠올렸다.
선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발롱도르였다.
‘발롱도르 수상.’
[…]
충무공이 즉답을 회피했다.
[트로피 : 발롱도르]
[축구 선수로서 최고의 영예를 획득합니다. 모두들 당신이 이제 은퇴할 거라 생각하지만, 당신은 계속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어 합니다.]
[수명 3년 연장]
[아시아 최초를 추가로 달성할 경우 보상이 증가합니다.]
수명이라는 말에 이순신은 식겁했다.
‘내가 축구하다가 죽을 운명이라고?’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괜찮네. 장수가 전쟁터에서 죽는 것만큼 명예로운 게 어딨습니까?’
[충무공이 초연한 태도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어쨌든 3년이라도 더 살려면 발롱도르 한 번 따봐야겠네. 내가 죽더라도 그걸 보고 많은 유망주들이 꿈을 꿀 수 있을 테니.’
이순신이 의지를 굳게 다질 때 누군가 다가왔다.
“순신아. 뭐해?”
김혁규가 물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감정이 오고 갔지만, 주장으로서 할 일을 해야 했다.
“이제 인사하러 가자.”
이순신과 선수들이 손을 잡고 관중석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90도로 인사했다.
“꿈 FC. 최고다.”
“4부에서도 멈추지 말라고!”
“오늘 밤 우리 가게로 와. 마음껏 마시자!”
이순신의 가슴이 벅찼다.
감격에 겨워 우는 빵집 아저씨.
휘파람을 불며 흥을 참지 못하는 신부님.
웃옷을 벗어젖히고 흔드는 멋진 근육 남 등 관중 한 명 한 명이 모두 진심으로 고마웠다.
“최고다. 이순신.”
두 손을 모아서 소리친 신자영도 보였다.
“누나?”
“축하해.”
신자영이 꽃다발을 건넸다.
“누난 집에 안 가요? 그러다가 스페인에 아주 눌러살겠네.”
“응. 안 그래도 여기서 정착해볼까 생각 중이야.”
“네?”
신자영이 여우 눈을 지으며 웃었다.
***
이순신을 비롯한 선수들이 구단주실 앞에서 옹기종기 모였다.
“아니. 신자영이 여길 왜 와?”
“단장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순신아. 너 뭐 아는 거 있냐?”
“아니. 전혀 없어.”
30분 후.
임청수가 구단주실에서 나왔다.
“모두 모여라. 중대 발표가 있다.”
“중대 발표요?”
꿈FC 선수들은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