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58화 (59/161)

58화. 누나 내 애…

찰칵.

무음 카메라로 설정되어 있지만, 자동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이순신과 신자영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웅장한 경기장은 배경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순신아. 좀 웃어 봐!”

씨익.

이순신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다.

“사진 잘 나왔네~”

신자영이 이순신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이게 정말 나예요?”

어플로 보정한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고럼~”

하지만 신자영의 모습에서는 전혀 그런 게 안 느껴졌다.

오히려 실물을 따라가지 못한 느낌.

“음- 누나는 실물이 훨씬 나은데요?”

은연중에 본심이 튀어나왔다.

“고마워. 너도 잘 생겼어.”

“경기 시간까지 상당히 많이 남았는데 우리 뭐 하죠?”

이순신이 재빨리 화제를 넘겼다.

“저거 어때?”

이순신은 고개를 돌렸다.

줄을 길게 선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표 끊어 올게요.”

이순신이 매표소로 달려갔다.

“투어 어른 2장이요.”

평일이라 금방 표를 끊을 수 있었다.

“여기요.”

“오? 라모스네?”

투어 티켓에는 선수 사진이 있었다.

신자영의 표에는 라모스, 이순신의 표에는 아자르가 박혀 있었다.

“순신아. 이 표는 네가 가져. 아무래도 미래의 라이벌 아니겠어?”

신자영이 라모스의 사진이 담긴 표를 줬다.

라모스 역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골 넣는 수비수로 유명했다.

“라이벌은 무슨.”

이순신이 표를 받고는 조용히 구겨서 뒷주머니에 넣었다.

“귀엽네.”

신자영은 이순신의 행동을 보며 슬쩍 웃었다.

“여기에 짐을 올려 주세요.”

신자영이 가방을 올렸다.

“네. 통과입니다.”

간단한 짐 검사가 끝난 뒤 표지판을 따라 이동했다.

투어 구역 이외에는 펜스가 처져 있었다.

어차피 이따 경기가 시작되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신자영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괜찮아요?”

“등산하는 거 같고 좋은데 뭘?”

‘지나치게 긍정적이네.’

이순신은 그런 긍정 에너지가 싫지 않았다.

“우와- 순신아. 저것 좀 봐!”

빼곡히 설치된 푸른 의자들 사이에 영롱한 녹색 경기장이 펼쳐졌다.

탁 트인 경기장.

그저 놀라웠다.

“와아아-”

이순신이 고개를 돌렸다.

관중들의 함성이 들리는 거 같았다.

“순신아. 여기에는 8만 명이나 들어올 수 있데.”

8만 명.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였다.

저번에 경기했던 수원 월드컵 경기장도 4만3천 명 규모.

“잠시 후에 이 경기장의 관중이 가득 찬단 말이죠?”

“여기에 관중이 가득 차면 어떤 기분이야?”

“제가 어떻게 알아요?”

“너 어릴 때…”

이순신에게 스페인은 처음이 아니다.

분명히 어릴 때 바르셀로나에서도 이런 경기장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바르셀로나에서의 기억은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

경기장의 경사를 보니 괜히 현기증이 올라왔다.

“까먹어서 모르겠어요.”

“자- 다음 장소로 갑시다.”

신자영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녀도 굳이 이순신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은 걸 눈치챘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전반적으로 천장과 벽이 검은색이라 분위기지만, 트로피를 빛내는 조명 덕분에 공간이 밝게 빛났다.

“우리나라 K리그도 언젠가 이렇게 되면 좋겠다.”

이순신은 의아했다.

“누나는 관광을 온 거예요? 아니면 공부를 하러 온 거예요?”

“둘 다랄까? 후훗. 사실 나 스포츠 마케팅에도 관심이 많거든.”

“진짜요?”

“응.”

대화를 나눌수록 신자영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졌다.

‘몰랐는데 나 똑똑한 여자 좋아하나?’

단순히 연상이나 아나운서라서가 아니었다.

“역시 트로피가 많아야 전시할 맛 나지.”

이순신도 트로피를 살펴보았다.

유럽 최고의 클럽팀을 뽑는 대회,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최다 우승팀.

트로피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외에 시대에 따라 변한 유니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갈색의 축구공.

발목까지 올라오는 축구화를 보며 이순신도 어느새 투어에 빠져들었다.

“이 트로피 좀 봐. 진짜 순금일까?”

“어? 히딩크 감독님 이름도 있어!”

“스페인이 축구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건 2차 세계대전하고도 연관이 있구나.”

신자영과 이순신은 자연스럽게 티키타카를 이어갔다.

“순신아. 너 레알 유니폼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에이. 내가 무슨 레알을 가요.”

“왜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잖아? 특히 한글로 이순신! 이렇게 새기면 진짜 멋지겠다.”

“그러니까 우리 팀보다 못하는 팀에 왜 가냐고요~”

이순신이 귀여운 허세를 부렸다.

“와- 너 보기보다 야망이 크구나? 방금 한국말이라서 못 알아들었기에 망정이지 너 하마터면 여기서 묻혔을지도 몰라.”

“스페인어로 해볼까요?”

“하지 말라니깐!”

신자영이 극구 만류했다.

수원에서 수원팀을 욕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이곳은 스페인이었다.

지역주의로 똘똘 뭉쳐 있기에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변사체가 될 수 있다.

“우리 단장님 목표가 뭔지 알아요? 1부 리그 진입이래요.”

“되면 정말 대박이네.”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이순신의 눈빛이 빛난다….

꿈을 간직한 소년 같았다.

“야- 너 잠깐 허리 좀 숙여 봐.”

“왜요?”

의문을 품었지만, 이순신은 시키는 대로 했다.

쓰담쓰담.

“왠지 쓰다듬어 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게 영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닐 거 같단 말이지.”

“아. 뭐에요~! 나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하는데.”

“우쭈주. 그랬어요?”

신자영은 막냇동생을 다루듯 이순신을 대했다.

5살의 나이 차이가 났기에 신자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게 싫었다.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내가 남자로서 매력이 없나?’

이순신은 남은 투어를 보면서 고민에 잠겼다.

레알의 역사를 만든 골을 봐도, 철 나팔을 통해서 듣는 생생한 현장음과 중계가 제대로 눈과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투어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순신과 신자영은 밖으로 나왔다.

“와- 재밌었다. 이따 경기가 정말 기대되는걸?”

“저두요.”

“목마르다. 뭐 좀 마실까?”

“음-”

이순신이 시계를 봤다.

“밥은 어때요? 그러고 보니 우리 점심도 안 먹었잖아요.”

“그럴까? 여기는 뭐가 맛있으려나?”

“저기 빠에야 어때요?”

“빠에야 좋지!”

이순신은 이곳에 오기 전에 맛집을 검색했다.

수많은 빠에야를 먹어봤지만, 이곳에서는 다소 특별한 빠에야를 팔고 있었다.

“순신아. 이거 탄 거 아니지?”

“아마도?”

신자영이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칠흑보다 어두운 밤.

짜장면보다도 더 어두운 그야말로 제대로 된 흑미밥.

오징어 먹물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냥 먹물에 밥을 비빈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더욱 두려운 건 이빨이 까매지는 거.

하지만 신자영은 조심스럽게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마! 맛있다!”

신자영이 입을 가리며 오물오물 씹었다.

예의상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맛있어서 나온 감탄사였다.

“진짜 맛있어!”

“다행이네요.”

신자영은 시선을 회피했다.

입술과 이빨이 까매진 이순신에게 무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호호.

입을 가리며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신자영은 얼른 입술을 닦았다.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행여나 먹물이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누나. 표 어떻게 구한 거예요?”

“아 그거? 진짜 완전히 운이 좋은 거 있지!”

신자영은 표를 구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신혼여행을 온 한국 부부가 있었다.

“이거 표 팔아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을까?”

“좋지.”

그들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축구 경기 표 팔아요!”

남자는 근처에 있는 스페인 관람객에게 표를 내밀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려 엘 클라시코의 경기였으니 말이다.

“혹시 130유로에 팔지 않겠나?”

남자는 얼른 계산기를 두드렸다.

“좋아요!”

그 순간이었다.

신자영이 표를 가로챘다.

“150유로. 이왕이면 한국 사람에게 팝시다.”

신자영이 윙크를 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은 이순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 엘 클라시코 경기를 그렇게 싼 값에 구하다니. 누나 능력 있는데요?”

“서로 손해 볼 건 없잖아. 그 사람들은 푯값의 두 배를 받아서 좋아했고, 난 엘 클라시코를 볼 수 있어서 좋고.”

표 자체는 가장 싼 75유로짜리 3층 자리였다.

암표만 해도 최소 800유로.

우리 돈으로 약 100만 원 이상은 줘야 구할 수 있다.

“안타깝네요. 그 부부.”

“대신 우리가 재밌게 봐주면 되지.”

우리라는 단어에 이순신의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누나 그런데 한국에서 유명한 아나운서였다면서요?”

“몰랐어? 나름 여신이라고 불렸는데. 히힛.”

“제가 TV를 잘 안 봐서… 그런데 친구들은 누나 다 잘 알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선글라스 쓰고 온 거예요?”

“응.”

“프리랜서 선언했다면서요. 그럼 사실상 백수?”

“그렇긴 하지. 그동안 쉬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볼 생각이야.”

“대단한데요?”

“뭘. 너야말로 다시 축구 시작해서 지금까지 오는 거 쉽지 않았잖아? 열심히 하다 보니 운도 따르고. 아마추어에서 그만큼 연봉 받는 건 꿈 FC가 유일할걸?”

이순신은 머리를 긁적였다.

“거기다가 저번 브라질 경기에서 활약으로 이제 올림픽 대표팀도 바라볼 수 있잖아?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수비수로 전향해서 성공하게 된 걸까?”

신자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찬 FC 덕분 아닐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히려 너 덕분에 세찬 FC가 성공한 거 같은데?”

“에이. 안태리 감독님이 말씀하셨어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보셨잖아요. 저도 교체당하는 거.”

“그건 안 감독님의 큰 계획이었겠지?”

핵심을 찔린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둘은 즐겁게 축구 이야기를 계속했다.

날이 점점 저물어 가고, 노을이 비칠 때쯤,

“곧 경기 시작하겠다. 가자.”

신자영이 무심코 이순신의 손을 잡았다.

“어. 어?”

이순신은 당황했다.

“뭐지?”

무슨 감정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둘은 경기장에 들어섰다.

비어 있는 경기장을 축구에 미친 8만여 명이 가득 채웠다.

양 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불었다.

라이벌전답게 온갖 욕설이 난무하며 관중들이 기싸음을 벌였고, 선수들의 눈빛도 사뭇 진지했다.

이 경기에서 선취골은 라모스였다.

프리킥으로 첫 골.

하지만 상대편엔 메시가 있었다.

그 라모스도 메시를 막지 못하고 결국 두 골을 내줬다.

경기는 안타깝게도 레알 마드리드가 패배했다.

두 사람은 경기장을 나왔다.

“오늘 경기 아쉬웠다. 그치?”

“네.”

“이런 경기를 보면 넌 더 가슴이 뛰었겠다.”

“…”

“얘 좀 봐. 여운이 깊게 남았나 봐. 후훗.”

이순신이 여운에 잠겨서 아무 말을 못 했던 게 아니었다.

엘 클라시코보다 더 가슴 뛰게 만든 사람이 옆에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 앞으로도 네 활약을 기대할게. ”

신자영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누나. 내 애…”

순간 레알 관중들이 시끄럽게 난리를 펴며 지나갔다.

“뭐?”

신자영이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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