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평생 독거노인으로 살 순 없으니까
‘개 같네.’
안태리는 무례한 질문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하지만 웃어줬다.
그래야 대표팀이 비난받지 않을 테니까.
“평가전일 뿐입니다.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습니다.”
안태리는 덤덤하게 답변했다.
“무엇을 얻었단 말입니까?”
“처음에 제가 스페인 5부 리그 선수를 뽑는다고 했을 때 언론은 우려와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지금은 단 두 경기 만에 여론이 바뀐 거 같네요.”
기자들은 침묵했다.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이순신을 띄워주는 멘트였다.
“이순신 선수를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키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건 지켜봐야 알지만, 우리 팀에 필요한 옵션임에는 분명합니다.”
안태리가 확신에 찼다.
“하지만 오늘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이길 뻔했지만, 이순신 선수의 교체는 용병술의 실수 아닌가요?”
안태리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답답한 양반일세. 말 그대로 평가전입니다. 옛날에 네덜란드 출신 감독님도 체코에 5:0으로 지고 그랬지만, 결국 월드컵에서 4강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작은 승리보다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데이터를 얻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양한 선수들을 평가해봤다는 것이죠. 앞으로 합류할 해외파 선수들은 적어도 국내 선수들보다 낫다는 경쟁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축구 선수는 무조건 뛰어야 합니다.
벤치만 달구는 네임밸류는 제가 구상하는 대표팀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선수가 있다면 당연히 기용할 거구요. 오늘 보셔서 아시겠지만, 한국팀은 세계에서 통할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인터뷰였다.
기자들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지금은 과정.
결과가 형편없다면, 언제든지 펜촉으로 목을 찌르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순신은 아직도 서운함이 남아 있었다.
“한 골 정도 더 넣고 싶었는데…”
다음 날.
선수단은 카이로 공항에서 해산했다.
국내 리그, 해외 리그 모두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자신감을 얻고 돌아갔을 것이며, 누군가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순신아.”
안태리가 이순신을 불렀다.
“네. 감독님.”
“오랜만에 태극마크 달아보니까 어때?”
“좋았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말끝을 약간 흐렸다.
안태리는 씨익 웃었다.
“교체된 거 서운하지?”
“…서운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짜식. 그 승부욕은 꼭 본선에서 발휘하기 발한다. 다시 소집될 때까지 몸 관리 잘하고!”
“저에게 다음이 있나요?”
“이번 평가전에서 가장 반전을 이뤄낸 사람이 너야.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널 뽑지 않을 이유가 없어.”
이순신은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스쳤다.
“그래. 인마.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경기 후에 며칠 잠들 거 같은 기분? 계속 뛰었으면 브라질을 이겼겠지. 하지만 전력을 모조리 노출시킬 필요가 있나? 전력도 감추고 선수의 체력도 안배하고. 다른 선수들도 시험해보고. 그러니 브라질한테 졌다는 생각은 잊어버려. 오히려 본선에서 결승전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상대야. 그때 설욕전을 해주면 되잖아.”
“아-”
선수가 보는 시선과 감독이 보는 시선은 엄연히 달랐다.
선수는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감독은 다음 경기도 생각해야 한다.
이순신은 그제야 서운한 감정이 다 녹았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소속팀에서도 열심히 활약하겠습니다.
기존의 세찬 FC 선수들도 잘하고 있고, 이번에 새로 뽑힌 한국인 애도 있는데 꽤 잘해요.”
“걱정 마. 난 잘하는 선수를 뽑을 거지, 팀 네임밸류로 뽑을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안태리가 씨익 웃었다.
이순신도 씨익 웃었다.
웃음 속에서 서로의 신뢰를 확인했다.
***
“아. 지겹구만.”
이순신은 벌써 3시간째 비행기를 타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혹시 이순신 선수?”
“네? 맞는데요.”
“세상에 웬일이니! 일단 사진부터 찍어도 돼요?”
이순신은 어색하게 v자를 만들었다.
“하나, 둘.”
무음 카메라 어플을 써서 그런지 찰칵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오. 잘 나왔다. 봐봐요!”
여자가 보여 준 사진에 이순신은 없었다.
보정한 이순신과 그녀가 있었을 뿐.
‘이런 걸 셀기꾼이라고 하나?’
그녀의 SNS에는 축구와 스페인 사진이 가득했다.
“축구 좋아하시나 봐요?”
“물론이죠! 이번에 스페인에 가는 목적도 엘 클라시코를 보기 위해서죠!”
두 사람은 축구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스페인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나중에 응원 갈게요.”
“고마워요. 누나. 그리고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어머? 그래도 돼?”
두 사람은 공항에서 연락처를 교환했다.
“다음에 꼭 엘 클라시코 같이 보러 가자.”
“표가 있다면요.”
이순신이 씨익 웃었다.
엘 클라시코는 레알과 바르샤의 축구 전쟁 그 자체였다.
표를 구하기 힘들뿐더러, 암표 역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음. 그럼 이렇게 할까? 빨리 구한 사람한테 밥 사주기. 어때?”
“좋아요.”
“그런데 너 정말 나 어디선가 본 적 없어?”
“없는데요?”
“하- 더 열심히 살아야겠군.”
그녀는 의지를 다지며 떠났다.
“예쁘긴 예쁘네. 성격도 좋고.”
이순신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고마운 팬 중 한 명.
그런데 생각보다 그녀는 훨씬 더 엄청난 사람이었다.
***
“이거 좀 서운한데?”
꿈 FC 선수들은 이순신에게 선물을 부탁했다.
이순신은 동료들을 위해 상형문자 기념샵을 들렸다.
“뭔가 흔한 느낌이라 끌리는 게 없네.”
그렇다고 크고 웅장한 토템들을 사가지고 가기엔 번거로웠다.
그러던 중 눈에 띈 건 비누와 초콜릿이었다.
이집트의 상징인 피라미드를 본떠서 만든 것이었다.
“생각보다 맛도 있는데?”
모두들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이순신이 고심 끝에 골라온 선물들은 졸지에 뒤로 밀려났다.
“이순신. 개부럽네.”
“순신 시주는 도대체 전생에 나라를 몇 번 구한 것이오!”
동료들의 관심사는 공항에서 만난 그녀.
신자영이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야?”
이순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미친놈아.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아나운서잖아!”
“아나운서와 썸을 타다니. 순신 시주는 이제 월클의 길을 걷는구려. 겁나 부럽소!”
구멍이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프리 선언했다고 하더니… 지금은 이렇게 여행 다니고 있구나. 순신이 너 인마! 계 탔어!”
“흐음.”
이순신은 뒷머리를 긁었다.
별 감흥이 없었다.
“우리가 축구 선수로 꼭 성공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유창한 한국어.
놀랍게도 고미가 한 말이었다.
“이 자식들아! 안자고 뭐해!”
임청수는 강제로 선수들을 해산시켰다.
다음날.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의 자세가 달라졌다.
이순신이 태극마크를 달아서?
천만의 말씀이었다.
‘우리도 열심히 해서 아나운서 한 번 만나보자!’
젊은 혈기가 하늘을 찌를 나이.
이순신은 어쩌면 가장 큰 선물을 가지고 온 것이다.
동기부여.
타지에서 공을 차야 하는 이유를 새삼 선수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오진성 힐 슛!”
“고오오올!”
오진성이 멋진 개인기를 부리며 골을 넣었다.
“꿈 FC. 무패행진을 이어갑니다!”
이순신이 없어도 꿈 FC는 2연승을 할 정도로 강했다.
- 스페인에 나타난 외인 함대 -
- 스페인 역사 최초로 3시즌 연속 승격팀! -
- 이에로 “이제 시작일 뿐.” -
결국, 꿈 FC는 가볍게 5부리그를 돌파했다.
“감사합니다!”
아직 3경기 정도가 남았지만, 오늘이 홈에서 열리는 마지막 경기였다.
그렇기에 응원하러 찾아와준 홈팬들을 위해 꿈 FC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선수들은 관중석으로 가서 인사했다.
“순신아.”
나지막이 이순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누나?”
신자영이 얼굴을 다 가린 커다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쉬잇!”
“여기 어떻게 온 거예요?”
“마지막 경기라며? 그래서 보러 왔지.”
이순신은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고 이건 선물.”
그녀는 봉투를 건넸다.
“그럼 나중에 봐.”
신자영은 미소를 지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야! 순신이 좋겠다. 선물도 받고!”
김혁규가 부러운 말투로 말했다.
“너도 팬한테 빠에야 받았잖아~”
“나는 요리사 아저씨한테 받은 거지만, 넌 미모의 여성 팬이잖아!”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신자영을 그렇게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도 신자영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뭐지?”
이순신이 봉투를 열어봤다.
“와- 이걸 어떻게 구한 거야?”
놀랍게도 3일 후에 열릴 엘 클라시코의 입장권이 들어있었다.
***
이순신은 지하철을 타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향했다.
시즌 중이지만 특별 휴가를 받았다.
특별 휴가의 발단은 오진성이었다.
“으윽.”
오진성이 훈련 중에 다쳤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순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기껏해야 한두 경기 정도니까.”
“걱정 마. 너 없어도 우린 이길 수 있어!”
위로인지, 악담인지 모르겠지만 꿈 FC는 똘똘 뭉쳤다.
그것을 보자 구단 측은 생각에 잠겼다.
다만 이에로와 임청수는 걱정이 앞섰다.
연전연승도 중요하고,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선수들의 몸 상태였다.
얇은 선수층으로 리그를 온전히 이끌어 가는 건 무리였다.
다른 구단들 역시 사정은 비슷했겠지만, 여기서 운영 경험의 차이가 드러났다.
그나마 이 정도의 부상으로 끝난 건 ‘허준’의 숨겨진 도움이 컸다.
“구단주님. 6부 때 어떻게 우승을 한 겁니까?”
“그냥 그때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을 뿐이죠.”
“흐음.”
아마추어라면 사실상 패기로 가능했다.
만약 대대적 투자가 없었더라면, 꿈 FC의 행진은 5부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선수 선발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
남은 경기에서 전력을 총 가동해서 전승 기록을 세우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원정 경기만 남았고, 승격 플레이오프는 확정되었으니 쉬엄쉬엄 가죠. 우리의 목표는 그 위니까.
무패 우승은 1부 리그에서 해야 진짜죠. ”
이에로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순신은 남은 세 경기에서 뛰지 않는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1부 리그 경기를 관람하도록. 표는 알아서 구하고.”
이순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타이밍이 어떻게 이렇게 딱딱 떨어지냔 말이지.”
마치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는 기분.
[충무공이 조심스러워 합니다.]
행여나 사랑에 빠져서 운동을 게을리할 거 같은 노파심이었다.
“충무공도 결혼했고, 카이저 코치도 결혼했고, 허준 선생님도 다 결혼했으면서 왜 난 축구랑 결혼하길 바라는 거죠?”
[험험. 충무공 일동 묵념합니다.]
이순신의 속이 다 시원했다.
‘한국 축구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생 독거노인으로 살 순 없으니까.’
이순신이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을 때쯤,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신아.”
저 멀리 경기장 입구에서 신자영이 손을 흔들었다.
이순신은 웃었다.
저 멀리서도 밤하늘의 별보다 빛나는 그녀가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