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진짜가 나타났다.
마르코는 매우 화가 났다.
갑자기 나타난 단장이 자신을 존중해주지는 못할망정 경멸하고 있다고 느꼈다.
팔짱을 낀 채 지그시 임청수를 쳐다봤다.
임청수도 팔짱을 낀 채 노려봤다.
“어린 노무시키가 팔짱을 껴?”
통역은 차마 이걸 통역할 수 없었다.
비록 마르코 감독이 30대 중반이지만 노안이라서 50대인 강대범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임청수도 어느덧 40대.
마르코는 임청수를 돈 많은 ‘재벌 집 막내아들’ 정도로 생각했다.
“하하. 감독. 일단 임 단장의 제안을 들어봅시다!”
강대범이 양쪽을 중재했다.
“말해보시오.”
“아까 말한 대로 이순신 빼고 다음 경기에 이기면 연봉을 3배로 올려주죠.”
마르코가 팔짱을 풀었다.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었으니까.
“무승부까지로 하죠.”
“좋습니다. 단, 이번에 이기지 못하면 공개테스트와 외부 영입을 진행하겠습니다.”
감독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공개테스트와 외부 영입을 진행한다는 건 팀 전력이 강화된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무승부만 해도 연봉이 3배 상승이니 마르코는 당연히 승낙했다.
임청수가 나갈 때쯤,
“잠시만요. 단장님.”
“뭔데?”
“잠시 이야기를 했으면 싶습니다.”
이순신이 면담을 요청했다.
***
구단주 사무실에 강대범과 임청수가 나란히 앉았고, 맞은 편에 이순신이 앉았다.
“그래.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고?”
“네…”
“면담을 요청한 이유는 뭐지?”
“단장님이 팀 분위기를 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임청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왜?”
“저희 팀 분위기는 괜찮았습니다. 기존 선수들의 텃세도 없었고요.
그런데 선수 수준을 운운하시면서 공개테스트까지 이야기하니 분위기가 흉흉해졌습니다.”
임청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네가 구단주냐? 단장이냐? 운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놈은 첨 보네.”
이순신이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단장님을 믿고 따라온 저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크크.”
임청수가 웃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신아. 난 너를 개인 후원하기 위해서 꿈 FC에 투자한 게 아니다. 이 팀의 열정, 취지를 공감하기에 투자한 것이다. 넌 언젠가 이 팀을 떠날 테고, 나는 단장으로서 그때를 대비할 필요성이 있어.”
“제가 이 팀을 떠나지 않겠다면요?”
“사람 일은 그렇게 함부로 장담하는 게 아니다.”
이순신은 답답했다.
‘나한테 충무공의 은총이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이랬다간 당장 정신병원에 실려 갈 것이다.
“…”
잠시 구단주실에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임청수였다.
“프로의 세계는 전쟁이다. 사실 내 목표는 단순히 국왕컵 우승이 아니다. 1부리그 진출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 이순신과 강대범은 깜짝 놀랐다.
“하하. 임 단장. 농담이 너무 과한 게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임청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이만한 각오 없이 가족들을 국내에 남겨두고 기러기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실패한 선수였다. 그때 실패 요인 중 하나가 향수병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프로선수의 숙명이지만, 의지할 팀과 동료들이 있다면 어떨까?”
[충무공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당황했다.
‘이 할아버지는 또 왜 이래.’
강대범은 걱정되는 얼굴로 임청수에게 물었다.
“하지만 한국인 선수들로만으로는 좀 힘들 텐데…”
“오히려 그게 팀을 망칠 수도 있어요.”
“아- 우리팀의 정체성이…”
“구단주님. 생각해보세요. 1부리그에 우리가 안착하면 국가대표 선수들도 먼저 들어오려고 할 걸요?”
강대범은 순간 상상했다.
이상재, 김재민, 주우현 같은 선수들이 속한 팀이라니!
이순신도 그 취지에 공감했다.
“재밌겠네요. 제 이적료인 2000억이면 충분히 강한 팀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어쭈? 5년 만에 네 연봉의 100배를 벌어주겠다고?”
임청수는 이순신의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보다 강한 팀이 되어야 한다. 나쁜 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져야 해.’
이순신은 다짐했다.
비단 이것은 꿈 FC 한정이 아니었다.
국가대표팀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 두 사람은 드디어 뜻이 맞았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이순신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밖에는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순신아.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진짜 우리 막 다 잘릴 수도 있어?”
이순신은 한 템포를 쉬고 입을 열었다.
“1부리그까지 올라가는 게 목표래.”
“미친 거 아냐?”
“말도 안 돼!”
터무니없는 꿈은 아예 꾸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알만한 나이들이었다.
“처음에 꿈 FC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사람들의 시선도 이랬던 거 아니야? 다 이기고 올라가 보자!”
이순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이 너무 심한데?”
이지훈의 표정이 사뭇 좋지 않았다.
“우선 팀에 요청 사항이 있다면 주장인 나한테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또한, 너도 동의하지 않았잖아? 면담해서 연봉이라도 더 올려 받은 거야? 태세전환이 너무 빠른데?”
이지훈은 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순신을 쏘아붙였다.
“아, 미안. 하지만 난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꿨어. 절대로 4부리그 진출이 최종목표가 되어선 안 돼. 우리는 거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고.”
이순신이 웃으면서 대응했다.
웃는 낯에 누가 침을 못 뱉는다고 했는가?
이지훈의 목소리가 더더욱 높아졌다.
“알까레뇨와 경기에서 봤잖아. 수준차를!”
“그래서 우리가 온 거야. 나랑 진성이랑 혁규가 들어가니 우리는 전혀 다른 팀이 됐잖아!”
“지금 우리를 무시하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이지훈과 이순신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금세 험악해졌다.
“순신아. 너까지 왜 그러냐. 청수형한테 벌써 물들고 그러면 제 명에 못 산다.”
“지훈이 형이 참으세요. 쟤 옛날부터 또라이로 유명했잖아요.”
이지훈이 씩씩거렸다.
“다음 경기에서 확인해보면 될 거야. 우리가 없으면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아니라 너 아냐? 네가 없으면 이 팀이 망할 거 같아?”
급기야 이지훈이 소리를 쳤다.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순신의 능력이 뛰어난 건 모두 봐서 잘 알았다.
하지만 축구는 팀플레이란 사실…
“현시점에서는 그래.”
이순신의 발언은 세찬 FC 출신 선수들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이 자식 보소. 잘난 척 쩌는데?”
“우린 만들어야 해. 내가 없어도 될 팀을 만들어야 해. 누구 하나 빠지더라도 공백이 최소화되는 팀을!”
“뭣들 하는 거야? 얼른 가서 잠이나 자!”
급기야 강대범이 나와서 상황을 중재시켰다.
선수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이지훈은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 너 따위가 없어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마.’
이지훈이야말로 아직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
두 번째 친선 경기는 5부리그 중 중위권의 팀인 판토하(PANTOJA)였다.
알까레뇨보다 객관적인 전력은 떨어졌다.
마르코 감독은 이순신을 제외하고 엔트리를 짰다.
오진성과 김혁규 이외에도 구멍, 윤광섭, 조문돈이 선발로 나섰다.
보경풍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이지훈을 필두로 초반에는 좋은 공격을 펼쳤다. 아쉽게도 골이 터지지 않았지만, 0:0으로 경기를 마쳤다.
하지만 후반전이 되자 급격하게 무너졌다.
20분 만에 3골을 먹히자 보경풍이 들어갔다.
그 이후에는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0:3으로 졌다.
“이게 어떻게 된…”
마르코 감독은 쥐어뜯을 머리도 없었지만,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만 해.’
경기를 보고 있던 이순신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날 밤.
꿈 FC의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침묵이 감돌았다.
임청수가 입을 열었다.
“마르코 감독님.”
“네. 단장님.”
“안타깝네요. 아직 기존 선수들과 신규 선수들이 잘 융화되지 못한 거 같습니다.”
“인정합니다.”
마르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선수 보강 필요하죠?”
“네.”
“기존 선수들에게 묻겠습니다.
저는 새로운 외국 선수들이 온다고 해도 꿈 FC의 모토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존 선수들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순신을 비롯한 새로운 선수들의 실력은 분명 자신들보다 뛰어났다.
더군다나 단장이라는 엄청난 빽까지 있는 상태.
여기에 다른 선수들이 또 온다면 후보로 밀릴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전 반대합니다. 꿈 FC는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팀일 때 가치가 있습니다.”
“팀이 5부에 전전해도?”
“그렇습니다.”
이지훈은 기존 선수들이 자신과 의견이 같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특히 출범 때부터 함께한 강대범 구단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기존의 선수들이 이룬 성과가 있기에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공개테스트를 한국인 선수들로 한정할 사람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이지훈이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총 6명이군요. 그럼 공개테스트는 외국인 선수까지 확대하겠습니다.”
이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포함한 기존 선수 5명과 조문돈이 손을 들었다.
“구단주님?”
“꿈 FC의 모토는 꿈, 도전, 공정이지. 여기에 함께라는 슬로건을 추가하면 좋을 거 같더구나.”
이지훈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현지 사정에 밝은 구단주님이 공개테스트를 진행해주시고요. 전 외부 영입을 위해 몇몇 사람들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임청수 단장도 무언가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
한 달 후.
꿈 FC 선수들이 훈련에 매진했다.
“패스!”
“그걸 못 넣냐!”
“미안. 미안 다시 가자!”
임청수의 공언대로 한국 선수 뿐만 아니라 외국계 선수들도 보였다.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먼저 공개테스트에서 5명의 선수가 보강됐다.
공격수에는 무니, 골키퍼는 스페인 선수, 중앙미드필더에 하비, 측면 수비수에는 브라질 출신의 루이스와 로베르토 형제가 추가됐다.
이중에서 하비는 17살의 한국계 스페인 국적을 가진 선수였다.
아직은 투박했다.
“하비 시주! 정강이를 걷어내지 말고 공을 걷어 내시오!”
“흐흐. 로 씨엔또!(미안)”
“이순신 뛰어!”
“네. 코치님.”
이순신은 마르코를 코치님이라고 불렀다.
임청수가 데리고 온 외부인사 덕분에 마르코는 수석코치로 강등됐다.
원래 감독이 수석코치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특히 본인 팀의 감독에서 수석코치가 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마르코는 선뜻 자신의 자리를 내줬다.
아니,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퍽킹! 외부인사영입이 감독이었어?”
“당신도 동의했잖아?”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새로운 감독이 등장했을 때 마르코는 그제야 진정했다.
“저 분이 왜 여기서 나와?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전설의 선수였던 페르난도 이에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