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자본주의의 참맛.
김혁규는 자신의 예상과 달라서 놀랐다.
‘이게 아닌데…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착해?’
해외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 보면 눈빛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싱글벙글.
이들의 눈빛에서는 어떠한 독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꿈 FC 구단주 강대범입니다.”
장발을 뒤로 깔끔하게 묶고, 뿔테 안경을 쓴 50대 남자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임 단장 임청수입니다.”
임청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러분들을 위해 숙소에다가 조촐한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아휴- 뭘 이렇게까지.”
강대범을 따라서 간 곳은 마당이 딸린 하얀 주택이었다.
‘와- 이게 숙소야? 엄청 좋은데?’
이순신은 깜짝 놀랐다.
“임 단장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숙소가 생겼습니다. 흑흑,”
꿈 FC 선수들이 이전에 지내던 숙소는 조그마한 빌라 두 채를 임대해서 지내고 있었다.
4개짜리 방에 2층 침대가 4개, 도합 18명이 숙소를 나눠서 생활했다.
회식은 김밥과 라면을 먹으며 지냈다.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
그것을 견뎌내는 건 축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기존 선수들에게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이야- 삼겹살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거지!”
기존 선수들은 매우 신났다.
“여기 드셔 보세요!”
이지훈이 싱긋 웃었다.
그는 기존 팀의 공격수이자 팀의 주장이었다.
구멍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기가 담긴 그릇을 받았다.
“이베리코의 삼겹살도 꽤 훌륭한 맛이구려.”
“앗. 어떻게 아셨습니까?”
“앞으로 미식가 구멍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미타불.”
친화력은 역시 구멍이 최고였다.
대화의 물꼬가 트자 이순신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순신입니다.”
이순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꿈FC 선수들도 황급히 인사를 했다.
“방송 잘 봤습니다. K리그 우승팀을 꺾은 주역들이 우리랑 함께 뛴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 리그에서 뛰던가, 혹은 프로와 세미프로에서 입단 테스트에 떨어졌던 선수들이었다.
그렇기에 세찬 FC가 울산을 꺾은 게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들의 평균 연령은 23-28세로 비슷한 또래였다.
고기가 들어가고, 맥주가 조금 들어가자 서로의 어색함이 사라졌다.
특히 축구를 포기할 뻔했다는 공감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 빠르게 친해졌다.
“순신아. 한잔하자!”
“응!”
이지훈과 이순신은 잔을 부딪쳤다.
“진짜 아이돌 포기하고 축구하는 거야? 컨셉 아니고?”
“응. 아이돌 생활도 지쳤어.”
윤광섭이 풀어놓은 아이돌 시절 썰은 흥미진진했다.
“그럼 걸그룹 걔랑 보이그룹 걔랑 사귀는 거 맞아?”
“맞음.”
“완전 정글의 왕국이네…”
연예계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나 흥미진진한 법이었다.
“와- 이 새끼 또라이야. 울산 제안을 거절하고 여길 왔다니!”
“또라이? 그냥 미친놈이야. 이 미친놈이 여기 온다니까 따라온 나도 미친놈이고.”
김혁규가 순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떠들어댔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강대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들이 오니 천군만마를 얻은 거 같습니다!”
술이 거하게 들어갔는지, 강대범의 얼굴이 다소 빨개졌다.
“구단주님은 어떻게 꿈 FC를 결성하게 되신 겁니까?”
임청수가 물었다.
강대범은 안경을 벗고 잠시 눈물을 훔쳤다.
“하- 죄송합니다. 잠시 그간에 고생한 게 생각나서요.”
그가 스페인에 온 건 3년 전이었다.
“옛날에 한국에 온 스페인의 스카우터가 그랬어요. 한국 선수들이 재능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당장 2부 리그에서도 뛸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뛰더군요. 그런데 왜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 ”
이순신을 비롯한 선수들의 귀가 솔깃해졌다.
“바로 환경의 차이였습니다. 스페인 선수들처럼 훈련하면 우리나라 선수들도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몇몇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대범은 실행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노후 준비로 준비했던 전 재산을 털어서 스페인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스페인에 유학 중인 몇몇 선수를 후원해볼까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팀이 있다면 어떨까? 알다시피 스페인이 인종 차별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그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불꽃 길을 선택했다.
축구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유망주들이 안타깝게 사라지는 게 안쓰러웠기 때문에!
강대범은 그 기회를 한국까지 확대했다.
스페인에서 뽑은 6명, 한국에서 공개테스트로 뽑은 12명의 선수들을 모아서 7부리그, 6부리그를 제패하고 마침내 5부리그까지 승격했다.
“와- 대단해요!”
이순신은 진심으로 감탄해서 박수쳤다.
“아닙니다. 그런데 올해 하마터면 해체할 뻔했어요.”
“왜요?”
잘 나가는 팀을 해체한다니, 이순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면 충분히 이해될만한 상황이었다.
18명밖에 안 되는 선수들.
그중에서 2명은 4부와 3부리그에 스카우트됐다.
3명은 군대, 1명은 부상, 1명은 생업의 이유로 단숨에 7명이 빠졌다.
“아마추어 리그라서 관중 수입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거든요. 그나마 후원금을 모집하는데 하루에 6~7만 원 법니다.
현실이 참 냉혹해요. 꿈을 이루기 위해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돈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그런 환경에서 5부까지 올라온 선수들이 정말 대견합니다.”
강대범은 옆에 있던 이지훈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러다가 임청수 선수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구단을 인수하고 싶다고.”
시선이 일제히 임청수에게 향했다.
임청수가 V자를 그리며 쑥스러운 척을 했다.
“처음에는 뻥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로또 당첨 영상을 보여주면서 진심이라고 말하시는데 저도 한 추진력 한다고 생각했지만, 임청수 선수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임청수는 마음을 먹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선수의 뒤통수를 까듯이 말이다.
“단순히 돈만 후원해주신 게 아닙니다. 마침 스폰 계약도 끝났는데 스폰도 따오시고, 선수 보강까지 해주셨죠.”
이순신은 꿈 FC 관계자들이 왜 그렇게 환대를 했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한마디로 말해서 임청수는 구세주였다.
특히 기존에 연봉이 없던 선수들에게 연봉이 책정됐다.
축구를 하기 위해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임청수 선수. 아니, 이제는 단장님이라고 불러야죠. 한 마디 해주시죠!”
임청수가 맥주병에 숟가락을 꽂으며 일어났다.
“저 역시 강대범 구단주님의 뜻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돈도 있습니다.
올해 5부리그 씹어먹고! 내년에 4부리그도 씹어먹고! 국왕컵도 씹어먹고! 1부리그까지 승격해봅시다!
스페인놈들에게 자본주의의 참맛을 보여줍시다.”
“우와아아아!”
1부리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상관없었다.
선수들은 ‘자본주의의 참맛’에 감동했다.
***
다음날.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됐다.
리그 개막까지는 앞으로 두 달.
특히 세찬 출신 선수들은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가볍게 청백전부터 해봅시다.”
꿈 FC의 감독인 마르코는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자체 청백전을 열었다.
그는 꿈FC의 감독, 임청수는 세찬 출신 선수들의 임시감독을 맡았다.
“저쪽은 나름 6부 리그에서 단 한 번의 패배만 하고 올라왔다. 심지어 홈그라운드이기도 하고, 방심하다가 개쪽당하지 마라. 알겠지?”
“넵!”
미드필더에 오진성, 김혁규, 윤광섭, 수비에 구멍과 이순신, 골문은 보경풍이 지켰다.
그걸 본 마르코는 깜짝 놀랐다.
“제로톱?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있다고 했는데 저 선수인가?”
그가 주목한 선수는 오진성이었다.
외국인의 시선에선 아직 새로운 선수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꿈 FC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잠시 후.
탄탄한 조직력, 착실히 쌓아 올린 기본기, 열정.
그것이 꿈 FC의 원동력이었다.
첫 번째 연습 경기의 결과는 5:0.
마르코는 경악했다.
이순신이 무려 5골을 넣었다.
‘공격수가 왜 최후방에서 뛰는 거지?’
두 번째 경기에서는 팀을 섞어서 진행했다.
이순신과 김혁규가 한 팀, 나머지 선수들이 반대편으로 몰렸다.
경기 결과는 3:0.
이순신이 1골 2도움, 김혁규과 2골을 넣었다.
“머리긴 저 친구는 당장 우리팀에서 주전으로 뛰어도 문제 없는 친구야. 다만 저 수비수는 이해가 안 되는군. 저런 공격력을 가지고 최후방이라니.”
마르코는 이순신을 최전방에 놓고 세 번째 경기를 치렀다.
경기 결과는 2:2.
이번 경기에서도 이순신은 골을 넣었다.
“공격수로서도 꽤 뛰어나지만, 수비수로 뛸 때보다 존재감이나 파괴력이 덜 해. 수비수로 뛴다면 1부리그 하위팀에서도 충분히 활약이 가능해…”
마르코는 씨익 웃었다.
‘아- 우리팀이라서 정말 당행이다!’
비록 꿈 FC가 6부리그를 씹어먹고 왔어도, 5부 리그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그가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팀의 감독을 맡은 건 단순히 재미였다.
그런데 5부까지 올라오자 조금 더 욕심이 났다.
그렇지만 현실을 직시했다.
‘잘해야 강등권을 겨우 면하겠는데…’
어쩌면 이 팀과는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충분히 4부리그로 승격을 노려볼 만하겠어. 저 선수가 중심이 된다면! 라모스가 우리팀에서 뛰는 거 같아. 아니 나이를 고려하면 그 이상의 잠재력을 가졌어!’
강대범도 직접 눈으로 보니 매우 흡족했다.
연습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마르코는 선수들에게 간단하게 피드백을 준 후 해산하려고 했다.
“잠깐만요.”
임청수가 해산하려는 선수들을 모았다.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축구가 장난이야?”
갑작스러운 폭언에 선수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꿈 FC의 전력은 냉정히 파악했을 때 K5 정도 되고, 세찬 출신 선수들은 죽기 살기로 했던 그 눈빛들은 다 어디 갔어? 여기 소풍 왔어?”
“허허. 임단장님. 고정하시죠.”
강대범이 애써 임청수를 말렸다.
이번에는 화살이 강대범한테로 튀었다.
“강 대표님. 선수 보강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서…선수요? 아무래도 보강하면 좋긴 하겠죠.”
“감독님. 생각은요?”
통역을 들은 마르코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개테스트 준비하시죠.”
“아 그런데 임단장님. 언제 한국에서 공개테스트를 합니까? 스페인에서 지금 한국 선수가 거의 씨가 말랐는데.”
“꼭 한국 선수들로만 팀을 꾸릴 필요가 있나요?”
임청수의 발언에 순간 강대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기존의 꿈 FC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팀으로 스페인을 점령한다.
그것이 이들의 정체성이었는데 임청수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들에게 이제 임청수는 구세주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침략자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