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43화 (44/161)

43화. 여기요! 사람이 죽었어요!

‘더블’이란 스킬을 포기할 만큼 이순신은 긴박했다.

만약 이번에 못 막았다면?

옆에서 뛰어오는 윤빛강이나 골대에서 기회를 엿보다간 울산의 어린 공격수에게 골을 헌납할 확률이 101%였다.

“하아-하아-”

이순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았다.

정지선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순신아. 괜찮아?”

“응.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이순신의 뜨거운 의지에 이청조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 건 투지가 아니라 객기야.”

“뭐라고요?”

“나라면 감독한테 교체해달라고 할 거야. 그라운드에서 지친 선수는 다른 선수들에게 피해만 줄 뿐이니까.”

이청조는 냉정한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경기를 뛰지 않아서 경기감각이 떨어졌지만, 네임벨류 때문에 그라운드에 섰던 선수들이 팀에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는지를 숱하게 봐왔다.

이순신은 즉각 반박했다.

“10분 깔딱 뛴 선수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네요. 우린 이길겁니다. 우릴 막다간 다칠 수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흥. 생각보다 건방지네? 우린 울산이야. K리그 챔피언!”

이청조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울산 근대의 코너킥이 이어집니다.”

윤빛강은 코너킥을 준비했다.

골을 넣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치열한 자리 싸움이 이어졌다.

윤빛강은 손가락 2개를 펴더니 코너킥을 올렸다.

울산 근대가 미리 약속한 플레이가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꼼수였다.

[호랑후를 발동합니다.]

“속지 마! 아까 말한대로 위치 지켜!”

이순신의 외침에 세찬 FC는 각자 위치를 지켰다.

“윤빛강 코너킥을 올립니다!”

휘어져서 들어오던 공은 정지선의 몸에 맞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젠장!”

윤빛강은 안타까웠다.

정지선만 아니었다면 뒤에 있는 뷜트하우스에게 연결될 수도 있었으니까.

‘막았다. 흐흐.’

정지선이 안도감에 취해있을 때,

타타닥!

울산 근대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왔다.

“이청조 선수. 흘러나온 공을 받아서 그대로 찹니다!”

구름을 가르고 날아오는 새처럼 이청조의 슛이 날개를 편 듯 활강했다.

‘이청조의 슛은 소녀 슛이라고 불릴 만큼 파워가 세진 않지만 이건 쎄하다!’

[방패연을 사용합니다.]

펑!

이순신이 온 몸을 던지면서 공을 막았다.

“으윽.”

이순신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 이순신 선수가 몸을 날려서 막았지만, 오히려 각도가 틀어져서 골대로 향합니다!”

튕겨 나온 공은 계속 골문을 향해서 날아갔다.

보경풍은 날아오는 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잡을까? 걷어낼까?’

공이 점점 빠르게 다가오자 그는 오른손을 뻗었다.

“이청조의 슛을 보경풍 선수가 걷어냅니다! 정말 아깝습니다!”

흘러나온 공은 어느새 일어난 이순신이 울산 미드필더의 몸에 맞춰서 걷어냈다.

“나이스. 경풍이 형!”

이순신이 따봉을 날렸다.

보경풍도 답례 따봉을 날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을 오롯이 느꼈다.

‘얼얼한데?’

고개를 들어서 이청조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귀싸대기보다도 매운 슛이었다.

이순신이 공의 파워를 줄이지 않았더라면 자칫 골을 허용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청조의 힘이 실린 슛! 진작 투입했어야 했나요? 오늘 이청조 선수의 컨디션은 최고입니다.”

이주성조차도 감탄했다.

이 슛 한 방으로 분위기는 완전히 울산 근대에게 기울어졌다.

“젠장. 넣었어야 했는데…”

이청조는 오른발이 저릿저릿했다.

약간 무리해서 세게 찼던 것이다.

물론 부상을 고려하면 앞으로 경기중에 이런 슛은 힘들 것이다.

“이청조! 이청조! 이청조!”

관중들이 이청조를 외쳤다.

이청조는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한테 손을 흔들며 진영으로 복귀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5분.

울산의 맹공이 계속 펼쳐졌다.

넣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이뤄지는 가운데 마침내 세찬 FC에게 기회가 왔다.

구멍이 윤빛강의 공을 커트했다.

어디로 공을 줄까 둘러보고 있는데 전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패스!”

김혁규가 공을 달라고 외쳤다.

구멍은 김혁규에게 공을 넘겼다.

혁규의 시선은 울산의 골대로 향했다.

‘순신이가 왜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고 했는지 알겠어.’

김혁규가 드리블을 쳤다.

“혁규야. 패스해!”

오진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김혁규는 패스하지 않고 드리블을 선택했다.

그는 공격수로서 흐름을 깨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기에 다소 무리다 싶을 정도로 공을 끌었다.

하지만 상대편은 수비 진영을 다 갖춘 상황.

“젠장. 길이 없어!”

혁규가 그제야 오진성에게 패스를 하려고 했는데,

“혁규. 조심해!”

어느새 이청조가 빠르게 달려왔다.

김혁규는 깜짝 놀랐다.

이청조가 여유롭게 발끝을 이용해서 공을 가볍게 뺏었다.

“안 돼!”

김혁규가 재빠르게 턴을 해서 뒤쫓았지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청조는 전방에 있는 윤빛강에 길게 패스를 찔러줬다.

세찬 FC의 역습 실패.

그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울산은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빙의도 방패연도 의미가 없어…’

오죽하면 이순신조차 깜짝 놀랐다.

대응할 사이도 없이 윤빛강이 빈 곳을 향해 감아 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

보경풍이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날리며 손을 뻗었다.

조금만.

손톱 끝이라도 닿았으면 공의 궤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보경풍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88분의 노력이…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철렁.

공은 세찬 FC 골대의 구석으로 도망쳤다.

“우와아아!”

윤빛강이 두 손을 들고 환호했다.

그때 심판의 깃발이 올라갔다.

“오프사이드!”

“뭐? 이게 어째서 오프사이드야!”

윤빛강이 불같이 화를 냈다.

이청조는 달려와서 윤빛강을 타일렀다.

“오프사이드 맞아. 미안하다. 내가 너무 급하게 줬다.”

윤빛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실 반 발자국 앞섰기는 했지.’

하지만 친선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은 안 할 것.

골을 넣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강하게 어필했지만, 심판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자!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남은 1분 동안 이순신은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오히려 기세는 세찬 FC쪽으로 넘어왔다.

“오진성!”

패스를 받은 오진성은 방성찬에게 스루 패스를 찔러줬다.

“성찬이 형!”

뷜트하우스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방성찬은 등지면서 공을 지켜냈다.

그 순간 방성찬은 공을 띄우고 곧바로 오버헤드킥을 시도했다!

“방성찬 선수! 엄청난 슛입니다!”

하지만 골키퍼인 주우현에게 손쉽게 잡힐 정도로 위력은 형편없었다.

“전원 공격!”

주우현이 온 힘을 다해 길게 골킥을 찼다.

울산 근대의 마지막 공격이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순신 선수 날아오릅니다!”

울산 근대 공격수와 동시에 뛰어오른 이순신이 먼저 헤딩으로 커트했다.

“끝났어…”

주우현의 표정에는 좌절감이 가득했다.

이순신의 두 다리는 착지할 때 발생한 충격이 가시질 않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쯤 되면 심판이 경기를 끝낼 때가 됐는데?’

주심이 시계를 보더니, 가차 없이 손을 들었다.

삐이이익-

“으아아아!”

이순신이 두 주먹을 꽉 쥐고, 하늘을 향해 뻗었다.

“세… 세찬 FC가 K리그 챔피언 울산 근대를 꺾었습니다?”

이주성도 믿기지 않았는지 당황했다.

‘경기가 끝났다고?’

황보 감독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그의 감독 인생은 늘 극과 극이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을 때가 최고의 순간이라면, 월드컵에서 개무시했던 아프리카 대륙 소속인 알제리한테 4:1로 발리고 중도 경질 됐을 때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K리그 챔피언이었고, 올해도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낱 친선 경기로 치부할 수 있을 법도 하지만, 오늘 받은 충격은 그의 축구 인생을 통틀어 역대급이었다.

“세찬! 세찬! 세찬! 세찬!”

관중석에서는 세찬 FC의 이름을 연호했다.

마스카라가 번지도록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있었다.

모두들 세찬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현실적으로 확률 자체가 0%라는 걸 팬들도 직감했다.

그저 ‘졌지만 잘 싸웠다.’ 이런 말만 들어도 모두에게 ‘유종의 미’로 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기적마저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한때 천재라 불리던 유망주들,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서 축구를 포기하고 살다가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열정의 불씨를 살린 선수들.

한여름 밤의 꿈이 아닌 결과로 보상받았다.

“감독님!”

세찬 FC의 선수들은 안태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미친놈들아. 나 죽어!”

제작진은 감동의 순감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뒤늦 게 도착한 선수들은 김구름과 이갑용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보면 우승이라도 한 줄 알겠네.”

울산의 몇몇 선수들은 아니꼽게 봤다.

그때 누군가가 따끔하게 일침을 놨다.

“진 건 진 거야. 져서는 안 될 경기를 진 거고. 가서 축하해주자. 어쨌거나 경기 자체는 재밌었잖아.”

그들이 고개를 돌리니 이청조가 웃으며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윤빛강과 뷜트하우스는 세찬 FC 진영으로 걸어 갔다.

“너네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경기 내내 짜증으로 일관했던 윤빛강이었으나, 경기가 끝난 후에는 뒤끝 없이 깔끔했다.

김혁규는 재빨리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서 윤빛강에게 내밀었다.

‘이왕이면 이순신하고 교환하고 싶었는데, 흠.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

윤빛강은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김혁규과 유니폼을 바꿨다.

“축하한다. 보경풍.”

“고맙습니다.”

주우현은 보경풍의 어깨를 두드렸다.

보경풍이 말이 없어서 딱히 많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주우현에게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딨어?”

주우현은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이순신과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순신을 찾는 건 주우현 뿐만이 아니었다.

“순신! 순신 어딨어?”

뷜트하우스는 웃통을 벗고 이순신을 애타게 찾았다.

지칠 대로 지친 이순신의 두 다리는 라커룸으로 향했다.

“후우. 피곤하네.”

경기가 끝나자 엄청난 졸음이 밀려왔다.

[스팀팩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이후에 경기는 없으므로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며칠 푹 쉬면 괜찮았는데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대로 경기장에서 쓰러졌다가는 팬들을 걱정시킬 게 뻔했다.

만약 허준의 도움이 없었다면 큰 일이 났을 것이다.

[허준이 당신의 엉덩이에 대침을 찔렀습니다.]

[세컨드 윈드 더블의 반동 효과가 1분간 미뤄졌습니다.]

허준의 응급치료 덕분에 이순신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무사히 라커룸에 도착했다.

“휴. 다행이다.”

이순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겼다…”

[충무공은 당신의 활약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추가 보상 : 해외리그 진출]

“해외 리그?”

보상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순신은 잠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라커룸의 문을 열었다.

“혹시… 이순신 선수 여기 있습니까?”

쾅!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이순신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문을 닫았다.

“여기요! 사람이 죽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