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통곡의 벽.
주우현의 반사신경과 상황판단은 그동안 겪어본 골키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수비진과 미드필드의 조직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철벽이 따로 없구만.’
그나마 다행인 건 주우현이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에서 45분만 뛴다는 걸 파악했다.
“그렇다면 주우현이 나가는 그때가 골을 넣을 때다. 슛 스킬은 최대한 아껴두고…”
그 외에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음… 생각보다 공격진은 화려하지 않은데, 조직력이 너무 좋아.”
흔히 말하는 특급 공격수는 울산팀에 없었다.
천재 미드필더라고 불렸지만, 대표팀과는 인연이 적었던 윤빛강, 네덜란드산 푸른 방패 뷜트하우스가 집중시키는 수비진은 그야말로 K리그 최고의 방패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영국 프리미어에서 활약하던 푸른 주작 이청조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결국, 윤빛강을 막고, 뷜트하우스를 뚫어야지만 승산이 있다!”
이순신은 울산 선수들에 대한 분석을 마쳤다.
강팀이긴 하지만,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선 경기이기 때문에 많은 교체가 발생할 예정.
‘컨디션 안배 차원이라도 주전들이 45분 정도 뛸 것이다.’
이것이 이순신이 노리는 지점이었다.
진영이 어수선할 때 중거리를 때려서 직접 슈팅이든 간접슈팅이든 노려볼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너무 낮긴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세찬 FC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고작 10% 남짓이었다.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갱신되었습니다.]
“갱신? 갑자기?”
이순신은 한동안 시뮬레이션을 못 써서 망가졌나 싶었다.
어쨌거나 이순신은 갱신된 데이터를 다시 살펴봤다.
“이야… 이거 망했는데?”
갱신된 데이터를 보고 이순신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순신이 비벼볼 틈이라고 생각했던 교체가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승률은 1%로 떨어졌다.
똑똑똑.
“누구세요?”
그때 누군가 이순신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보경풍이었다.
“경풍이 형? 무슨 일이야?”
“나랑 연습 좀 할 수 있을까?”
“응?”
보경풍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늘 말이 없고 조용했던 그였기에 이순신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할 일도 없었는데 그러지 뭐.”
이순신과 보경풍은 밖으로 나갔다.
***
이순신은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쐈다.
연습이라서 그런지 횟수 제한 페널티는 없었다.
보경풍이 몸을 날렸다.
손끝에 닿은 공은 아쉽게도 골대로 들어갔다.
“다시.”
보경풍이 이순신에게 공을 굴렸다.
이순신은 이번에도 비슷한 코스로 공을 찼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공을 이번엔 보경풍이 튕겨냈다.
“나이스! 경풍이 형!”
하지만 보경풍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이순신에게 공을 굴렸다.
“다시. 다른 패턴으로.”
이순신은 지자포를 발동했다.
강력한 대포같은 슈팅이 골대로 향했다.
띠이잉-
안타깝게도 공은 골포스트를 때리고 빗나갔다.
“이거 다시 한번 차 줘”
강력한 슛에 보경풍의 목소리 톤은 살짝 올라갔다.
이순신은 다시 한번 지자포를 날렸다.
팡!
보경풍의 손에 맞고 공이 튕겨 나왔다.
손이 얼얼한지 위아래로 흔들었다.
“형. 괜찮아?”
“굉장하네. 이순신.”
잠시 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형은 이 밤중에 왜 연습을 하자고 한 거야?”
“주우현 선배가 빛이라면 난 그림자였으니까.”
대학교시절 주우현이 4학년일 때 보경풍은 1학년이었다.
현재 보경풍의 나이는 26살이었다.
그는 주우현의 백업 골키퍼였는데 항상 주우현에게 밀려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주우현의 대학교가 그리 강팀은 아니었기에, 오히려 주우현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로에 입단하고서도 수비진이 약해서 신들린 선방을 펼쳐야만 했다.
강제로 반사 신경이 좋아진 그는 국가대표를 찍고, 지금의 울산팀에 입단했다.
보경풍은 주우현의 빈자리를 초반에는 잘 메꿨다.
다만 2학년 때부터 대학교에서 수비진과 공격진을 보강하면서 팀이 강해지는 바람에 보경풍의 임펙트가 줄었다.
프로팀을 모색했지만, 조용하면서도 간결한 그의 성격상 수비수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단점을 드러냈다.
그런 세찬 FC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순신이 수비를 진두지휘하지 않았다면, 보경풍은 그저 반사신경 좋은 골키퍼 정도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세찬 FC에 참여하기 전까지 보경풍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그저 다시 축구를 하는 그 자체가 재밌었는데 주우현과 재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흘려보낼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공식 경기에서의 대결.
목표는 주우현보다 세이브를 더 많이 하기!
그러기 위해선 감각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다행히 팀에는 말도 안 되는 슈팅력을 가진 이순신이 있었다.
“알았어. 형. 이겨보자!”
보경풍과 이순신은 울산 근대와의 결전을 다짐했다!
***
수원 킹버드 경기장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
수용인원이 4만 4천 명이나 되는 큰 경기장인데 이날 온 관중의 수는 무려 4만 명이었다.
방송상으로는 3주 후에나 알 수 있는 경기 결과.
그보다 먼저 알게 되는 문자 결과.
스포츠팬이라면 파이널 매치를 참는 건 반칙이었다.
팬들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었다.
각 구단에서 파견한 스카우트들도 꽤 많이 왔다.
심지어 국가대표 감독도 경기를 보러 왔다!
홈구장을 놔두고 이곳에서 울산과 세찬이 경기를 치르는 이유는 울산의 일정 때문이었다.
울산은 4일 후 이곳에서 수원 파랑새와 경기가 있을 예정이었다.
협회로서는 관중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수도권이라 겸사겸사 이곳으로 밀어붙였다.
“와- 나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 봐.”
세찬 FC의 선수들은 경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지간한 하위권 순위팀과의 경기보다도 많은 관중수였다.
“놀랍습니다. 세찬 FC가 축구계의 세찬 바람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거 같습니다. 관객분들이 어마어마하게 오셨어요!”
중계하는 이주성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 같았다.
이날 판매된 티겟은 불우한 축구 유소년에게 기부될 예정이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다들 라커룸으로 모여. 감독님이 부르셔.”
이순신이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라커룸에 모인 선수들은 얼굴에 긴장이 만연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
이 한 경기에서 대패를 당하면 모든 게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만 같았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난 질 생각이 없다.”
“아-”
심적 부담감이 가중됐다.
“오늘 우린 최선을 다해서 비길 것이다. 저쪽에서는 우리 같은 팀하고 비긴 것 자체가 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감독님…저희 텐백 수비는 연습한 적이 없잖아요? 어떻게 비겨요?”
“당연하지. 대신 역습 훈련은 지겹게 했잖아.”
4-2-3-1.
선수비 후 역습.
오늘 세찬 FC가 경기에 임하는 전술이었다.
안태리와 코치진이 내린 생각은 이랬다.
적이 파상공세로 몰아붙이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때를 대비하여 세트피스 훈련을 강화했다.
세트피스는 단숨에 완성될 수 없었다.
그것을 메꾼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이란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다.
프리킥 능력도 뛰어났고, 문전 침투 능력이 뛰어나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골을 많이 넣었다.
그간 세찬 FC가 넣은 골의 1/3은 세트피스에서 나왔다.
“비기기 작전이지만, 골도 안 넣고 필드에 누울 생각은 없다. 우린 기회가 올 때까지 웅크렸다가 단 한 번의 기회로 적의 목덜미를 물어야 한다.”
선수들의 표정에서는 비장함이 뿜어졌다.
‘골을 넣는다.’
그러기 위해선 모두의 단합된 힘이 필요했다.
“세찬! 파이팅!”
이순신이 내뱉는 구호와 함께 모두 경기장으로 나섰다.
“세찬! 세찬! 세찬!”
“울산! 울산! 울산!”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세찬 FC와 울산 근대는 전력이었다.
“울산 근대가 예상과는 다르게 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고대로 내보냈습니다!”
골키퍼 주우현, 윤빛강, 뷜트하우스가 모두 선발로 나왔다.
“와- 황보형 자비가 없네.”
안태리는 울산 근대 쪽을 바라봤다.
황보 감독은 애써 안태리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태리야. 클래스의 차이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줄게.’
황보 감독은 선수들에게 절대로 봐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삐이이익-
“세찬 FC의 여정을 찍을 마침표인 최종전이 지금 시작됐습니다!”
시작은 울산 근대의 킥오프로 시작했다.
공격의 중심은 윤빛강이었다.
그는 공을 툭툭 치면서 전진했다.
울산 근대의 전술은 4-3-3.
무려 공격수를 3명이나 전진 배치한 공격적인 전술이었다.
“윤빛강 선수 전방으로 침투 패스를 합니다!”
그야말로 대지를 가르는 패스였다.
전방에 있는 공격수가 공을 잡더니 그대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구멍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오. 구멍. 만나서 반가워.”
울산의 공격수는 구멍과 동갑내기였다.
스피드가 장점인 그는 1:1 드리블 돌파에 능숙했다.
“소승은 시주를 놓치지 않을 것이오!”
구멍이 따라붙었지만, 울산의 공격수는 측면 공격수에게 공을 돌렸다.
그 역시 국가대표에 발탁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리그에서 10년이나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문돈이 형!”
이순신이 조문돈에게 따라붙으라고 지시했다.
이순신도 협력 수비를 펼치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뭔가 싸하다.’
울산의 공격수는 조문돈을 끌어낸 후 백패스를 했다.
측면과 중앙 사이에 애매한 위치에 윤빛강이 공을 받았다.
윤빛강은 그대로 중거리 슛을 날렸다.
[방패연을 사용합니다.]
이순신이 윤빛강의 슛을 예측하고 몸을 날렸다.
그의 발에 튕긴 공은 중앙 쪽으로 날아갔다.
정지선이 걷어내고, 구멍, 오진성으로 이어졌다.
“가자!”
오진성이 드리블을 시작하자 좌우 측면에 있던 김혁규와 남주작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산에는 통곡의 벽 뷜트하우스가 버텼다.
오진성이 혁규에게 패스를 하기 전에 뷜트하우스가 먼저 태클로 차단했다.
“으윽.”
오진성이 필드에서 나뒹굴었지만, 파울을 선언할 만큼 위험하진 않았다.
딱 위협이 될 정도였다.
“벌크업 좀 해야겠어. 후훗.”
뷜트하우스가 씨익 웃었다.
남주작이 스로인하고, 김혁규가 측면라인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김혁규 선수. 달립니다! 하지만 측면 풀백이 거침없이 따라붙습니다!”
김혁규는 깜짝 놀랐다.
‘이 속도감 뭐야.’
김혁규는 ‘에라, 모르겠다.’ 크로스를 올렸다.
뺏기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을 거 같았다.
다행히 공은 방성찬쪽으로 향했지만, 뷜트하우스가 한발 먼저 헤딩으로 걷어냈다.
공은 울산의 윤빛강 쪽으로 굴러갔다.
“역시 뷜트형. 수비는 일품이라니까.”
그 순간이었다.
윤빛강이 공을 잡기 전, 이순신이 어느새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이주성이 침을 튀기면서 흥분했다!
“이순신 선수! 45M 중거리 슛!”
이순신이 찬 공은 울산의 골대로 매우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골대에 가기도 전에 뷜트하우스의 발끝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