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30화 (31/161)

30화. 정밀 검사

세찬 FC가 탄 비행기를 벨기에 브뤼셀로 향했다.

직항은 없고 오로지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곳.

가는 데만 장장 13시간 정도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와- 이거 앉아있기만 해도 체력이 쭉쭉 빨리네.”

“닥쳐. 어지러우니까.”

비행기를 처음 탄 선수들은 적응이 안 됐다.

특히 조문돈은 멀미 때문에 앞자리에 앉은 선수에게 화를 냈다.

사실 조문돈은 늘 화가 나 있었다.

“부처님을 생각하며 화를 가라앉히시오. 문돈 시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옆에 앉아있던 구멍이 조문돈에게 쓰인 나찰의 분노가 사그라들고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도록 열심히 염불을 외웠다.

조문돈은 괴로워하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그런데 우리 유럽 원정 잘할 수 있을까? 순신이랑 성찬이 형이 빠졌는데.”

공수의 핵심인물 둘이 빠지자 선수들은 걱정됐다.

“걱정하지 마라. 다 잘 될 거다.”

“야~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냐!”

김혁규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 질렀다.

“아-”

김혁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며 사색이 됐다.

옆자리에서 안태리 감독은 돼지 얼굴이 그려져 있는 안대를 이마 위로 올렸다.

“우리 혁규. 내리자마자 쿠퍼테스트 좀 해야겠는데?”

“죄… 죄송합니다!”

“됐어. 인마. 농담이야.”

안태리는 김혁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혁규가 벌벌 떨자 안태리는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처진 기분이 조금이나마 올라갔다.

‘기특한 녀석.’

재빨리 자는 척하는 혁규를 보며 안태리는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혁규 역시 K3 리그의 몇몇 팀에서 오퍼가 왔다.

오진성, 구멍, 정지선, 홍반봉, 보경풍 등 팀의 주축이 될 만한 선수들에게는 문의가 왔다.

이중에서는 진짜 문의만 와서 실망한 선수들도 많았다.

안태리가 우려했던 대로 팀 사기가 저하됐다.

김혁규의 경우에는 좀 구체적인 제안이 왔었다.

곰곰이 생각한 김혁규는 자신에게 온 제안을 세찬 FC 이후로 미룬다고 말했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팀의 의리를 먼저 생각했다.

안태리는 선수들에게 1:1 면담을 통해서 의사를 물었다.

놀랍게도 다른 선수들도 김혁규와 의견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좀 더 세찬 FC에서 성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안태리는 뜻밖의 대답에 가슴이 뭉클해서 감동이 밀려왔다.

사실 반 정도는 전력 이탈을 각오했다.

각 위치에 한 명씩만 남아도 어떻게든 팀을 끌고 나가고자 생각했다.

선수들의 진심을 느낀 안태리 감독은 결심했다.

자신이 가진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서라도 선수들을 좀 더 성장시키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해주겠노라고.

“기내식 나왔습니다.”

안태리는 기내식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우걱우걱.

소고기를 씹는 건지, 소가죽을 씹는 건지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케빈킴…’

안태리가 케빈킴의 이름을 되뇌었다.

세찬 FC에서 제일 먼저 케빈킴이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서 다시 K리그에서 보길 바란다.”

원래 재능이 출중했던 그는 세찬 FC를 통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특히 화성 FC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것이 관계자들의 평가를 높게 하였다.

K3에 있는 한 구단이 당장 케빈 킴을 주전으로 활용하고 싶어서 연락을 취했다.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척을 해볼 수 있었는데 제안을 받자마자 수락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수들은 부러움과 배신감이 반반씩 느껴졌다.

“잘 있어라. 나 먼저 간다. 필드에서 보자.”

케빈킴은 손을 흔들면서 떠났다.

-세컨드 찬스는 케빈킴 선수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제작진은 어쨌거나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게 잘 돼서 떠난 것이므로 좋게 보내줬다.

‘우리한테는 보경풍이 골문을 지키고 있으니까!’

대다수의 선수가 케빈킴의 공백은 큰 영향을 느끼지 않았다.

묵묵하지만 든든한 수문장은 아직 건재했다.

“경풍아! 너 방금 머리 썰었다!”

“아-”

보경풍은 스테이크와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썰어버렸다.

그 역시 많은 제안이 왔다.

심지어 케빈킴을 영입하기 전에 그에게 먼저 제안이 왔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경풍은 단칼에 거절했다.

‘뭐 떠난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안태리는 케빈킴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지웠다.

디저트인 치즈 케이크를 먹을 때쯤에는 방성찬이 생각났다.

“성찬이… 그 녀석…”

원래 소속팀이던 대전 FC에서 방성찬을 잠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FA 컵 2라운드를 치르는데 상대 팀이 상무였다.

이번에 K리그 소속의 선수들이 대거 보강됐다.

말이 2부리그지, 전력으로 놓고 본다면 1부 리그 하위 팀과 견주어도 손색없었다.

더군다나 주전 공격수 두 명이 전력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때마침 세찬 FC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방성찬을 대전은 궁여지책으로 삼았다.

이는 방성찬이 팀에 합류하기 이전에 작성된 조항으로 말하자면 방성찬은 세찬 FC로 임대를 온 거나 다름없었다.

‘성찬아.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라. 그나마 대안으로는 만수가 있는 게 다행이네.’

안태리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성찬의 대전이 상무한테 져서 최대한 빠르게 복귀하도록 비는 것뿐이었다.

“음료는 어떤 거로 준비해드릴까요?”

승무원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커피요.”

쿨쿨쿨.

안태리는 커피를 원샷을 때렸음에도 잠이 쏟아졌다.

“순신아-”

그의 마지막 골칫거리인 이순신이 꿈에서도 나타났다.

***

안태리는 이순신을 원정명단에 포함하지 않았다.

세찬 FC에서 가장 많은 오퍼가 온 것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단 검사부터 받고 와라.”

“괜찮은데요?”

“하- 2화 끝나고 너 때문에 게시판 터졌다.”

팬들의 관심은 이순신에게 향했다.

어릴 때 천재라 불리던 유망주가 해외에서 실패했다.

축구 선수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고군분투하는 선수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돋보였다.

귀화, 포지션 변경, 중거리 슛, 잘생긴 축구 선수란 키워드가 이순신을 따라다녔다.

여기에 경기 끝나고 며칠 동안 못 일어났다는 소문이 방송 전에 퍼졌다.

즉 불치병에 걸린 축구 선수의 마지막 꿈, 병마와 싸우는 축구 선수라는 억측이 억측을 낳아서 급기야 여파가 제작진에게까지 퍼졌다.

제대로 해명을 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

이는 축구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문제가 있다면 데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

이런저런 상관관계가 얽혀서 이순신의 해외 원정 합류가 미뤄졌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종합검진에 긴장했다.

[매우 배고픈 상태입니다.]

이틀 동안 음식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특히 전날에 마신 이온 음료 맛이 나는 관장약은 그야말로 욕이 절로 나왔다.

‘끝나고 뭐 먹지?’

“이순신 님.”

“네!”

이순신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풉!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순신은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끌려갔다.

마지막은 내시경 검사.

목 안에 쓴맛이 감돌 때 이순신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끝났습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입원실에 누워있었다.

“저 몇 시간이나 잤어요?”

“한 시간 정도? 배고프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막내 피디는 메인 피디에게 문자를 날렸다.

검사가 끝나니 의사와의 면담이 잠깐 이어졌다.

“음. 자세한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 나온 소견으로는 이상 없습니다. 위랑 대장도 용종 하나 없이 깨끗하고요~”

이순신은 당연히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피디와 함께 돈가스를 먹은 후 저녁에 다른 병원에 입원했다.

기면증 관련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호텔만큼 편안한 숙박 시설.

그러나 머리부터 시작해서 온몸에 이것저것 붙였다.

“세상에 이런 걸 붙이고 어떻게 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인조인간이라고 해도 다름없었다.

그런데 막상 침대에 누워서 묵직한 이불을 덮으니 잠이 쏟아졌다.

따르르릉-

알람 소리에 맞춰서 이순신은 7시에 깨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의사와 면담을 했다.

“혹시 특이사항이 있나요?”

“으음.”

의사는 결과지를 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불안하게?’

“잠도 잘 자고, 뇌파도 안정적이고, 코도 안 골고, 낮에 혹시 미칠 듯이 잠이 쏟아지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게 잠드는 경우가 자주 있나요?”

“아뇨.”

“그럼 큰 이상은 없습니다. 경기 시작 전도 아니고 끝나고 난 후라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현재 검사기술로는 밝혀낼 수 있는 병명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면증이 아니라 기면병이라고 하는데…”

의사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이순신은 대충 흘려듣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이네. 큰 이상이 없어서.”

밖으로 나오자 막내 피디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저도요. 하차하게 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어요.”

“비행기는 다음 주에 출발하니, 주말 동안 푹 쉬어.”

“에이- 어떻게 그래요. 동료들 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합류할 때 민폐가 안되려면 개인 연습이라도 해두겠습니다! 아 성찬이 형 경기가 내일모레죠?”

“응. 경기 결과에 따라서 합류 시기가 결정될 거 같은데…”

“지라고 응원해야 할지, 이기라고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흐흐.”

이순신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 피디형. 저 내일 하루만 개인적인 용무 좀 보고 와도 될까요?”

“무슨 일인데?”

“그게… 사실은…”

이순신이 말끝을 흐렸다.

***

이순신이 간 곳은 한 돼지고기 불고기 백반집이었다.

<이순신 돼지불백>

이순신의 엄마가 보험 일을 그만두고, 대출받아서 차린 가게였다.

오픈 초기치고는 손님들이 좀 적었다.

아무래도 가게 위치선정이 잘못됐다.

‘이걸 카메라를 돌려야 해? 말아야 해?’

막내 피디는 개인적으로도 이순신의 팬이었기에 친한 동생 집에 가서 밥이나 한 끼 한다는 느낌으로 왔는데 방송이라도 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 왔니?”

엄마가 냉담하게 이순신을 대했다.

“네… 이쪽은 저희 프로그램 막내 피디님이세요.”

막내 피디가 재빨리 일어나서 인사했다.

“제가 뭐 도울 일 없을까요?”

“밥이나 먹고 가.”

엄마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랑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은데?”

“네. 사실 다시 축구하는 거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세요.”

“그래도 요즘 잘 나가는 걸 아시면…”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그냥 군대에서 하사로 진급해서 말뚝박길 바라셨어요. 처음에 다시 축구한다고 말할 때는 오우…”

막내 피디는 이순신의 애환이 느껴졌다.

밥을 다 먹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냥 가. 아들한테 돈 받을 정도로 매정한 엄마는 아니야.”

“아닙니다. 어차피 법카로 나갈 거라고 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시원하게 긁어주십시오!”

엄마는 기어이 1인분만 긁었다.

“그럼 가볼게요… 곧 해외로 나갈 거라서 당분간은 못 올 거 같아요. 건강히 계세요.”

“너. 축구 꼭 해야겠니? 그냥 엄마랑 같이 함께 장사하지 않을래? 아니면 삼촌 따라서 기술이라도 배우던가.”

“아뇨. 전 축구할 거에요. 이번엔 꼭 성공할 거고요.”

이순신이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막내 피디는 담배를 건넸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단 이게 나을 거 같았다.

“한 대 피울래?”

이순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이순신 선수죠?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이순신이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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