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
드랍FC 체육관.
황 관장과 맷코치의 연합팀은 모여서 전술 회의를 했다.
“그날 일 있는 사람? 안 되는 사람은 꼭 미리 말해줘야 해! 없으면 스타팅 멤버를 정해보자고!”
정밀한 전술보다는 합의로 스타팅 멤버도 뽑고, 친목도 다지자는 의미였다.
의미가 있을까?
몇 주의 시간은커녕, 몇 달의 시간이 있어도 패스 마스터 이운장, 터프가이 김남호, 수문장 김구름 등이 속해 있는 적토마 FC를 이순신이 속해 있는 연합팀이 이기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죽었다 깨어나면 모를까…….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지 않아도 이기는 방법이 있다면?
“얼추 멤버들은 이렇게 정리된 거 같고, 이제 프리킥이랑 코너킥 전담이랑 회비만 좀 걷으면 되겠네요.”
“더 할 말 있는 사람?”
이순신은 이기고 싶었다.
손을 번쩍 들었다!
“응. 순신이. 말해봐.”
“전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전술?”
“그냥 죽어라 뛰고 죽어 달려서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나?”
“하하하!”
“이왕이면 이기면 더 좋지 않을까요?”
선출을 이긴다?
그것도 단순한 선출이 아닌 태극마크를 달았던 국가대표가 셋이나 있는 팀을?
배달 갔다가 잠시 짬이 나서 들린 최국성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이순신이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매직을 잡더니 무언가를 쓱싹쓱싹 그려냈다.
“이렇게 해서 선취골을 노려보면 어떨까요?”
이순신의 제안에 다들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한 대로라면 우리가 선축으로 시작할 때 중앙선에서 중거리 슛을 시도하고, 만약 상대편의 선축으로 시작하면 압박 수비로 빼앗은 후 중거리 슛을 시도하겠다고?”
“넵!”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하하하하.”
연합팀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진지했다.
수백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찾아낸 결과 상대편의 수비라인이 살짝 올라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게 가능해?”
“네. 축구는 기세입니다. 상대는 분명 우리를 얕보고 있을 테니 시도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으음.”
맷코치가 고민했다.
분명 뭔가 황당한 제안이었다.
원체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 이길 수 있다는 말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9:0 미만으로만 져도 졌.잘.싸라고 생각했는데…….’
맷코치뿐만 아니었다.
최국성, 황 관장의 가슴속에도 승부 욕이 조금씩 활활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어차피 순신이 경험치 쌓게 해주려고 갖는 경기니까 한 번 순신이 의견대로 해주자.”
황 관장은 이 팀이 모인 목적을 상기시켜주고, 이순신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적극 지지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이 씨익 웃었다.
***
폴스 9.
가짜 공격수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센터백, 맷코치는 센터포워드였지만, 시작할 때 위치만 바꿨다.
[비격진천뢰 발동!]
[충무공이 당신의 잔머리에 경악합니다.]
‘다행히 스킬을 사용할 수 있고.’
이순신은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성공률은 고작 50%.
그런데도 작전대로 중앙선에서 과감하게 슈팅을 때렸다.
이 순간 가장 당황한 사람은 김구름이었다.
국가대표 수문장 출신인 그는 서 있는 그 자체로 존재감을 뿜어댔다.
골키퍼는 골문만 잘 막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소통.
이것이야말로 골키퍼의 히든 스킬이라고 보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오합지졸 수비라인이라도 그의 지휘로 꽤 쓸만해 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진가를 알아본 감독들은 그를 필드 위에 세웠다.
무엇보다 안정감은 그가 가진 가장 큰 무기였다.
현역시절 중거리 슛 허용률은 10% 미만이라는 것.
하물며 동네 리그에서는 페널티 라인 밖에서 중거리 슛을 시도해봤자 어차피 막힐 게 뻔했다.
그래서 상대편은 애당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중거리 슛을 넘어선 하프라인 슛?
어이가 없었다.
‘저런 게 들어갈 리 없어.’
김구름은 넘어지면서도 날아가는 공을 계속 노려보았다.
탕!
‘그럼 그렇지!’
이순신의 비격진천뢰는 골대를 맞고 골라인 앞쪽으로 떨어졌고, 김구름이 있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타다다다닥.
모두가 안심하고 있을 그때, 누군가 김구름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헉!’
김구름이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재빨리 일어나서 막으려고 했지만…….
뻥!
최국성이 비어있는 골대에 강력한 슛을 날렸다!
철렁!
공이 그물을 뚫을 기세로 하늘로 높이 솟구쳤지만, 뚫지는 못했다.
먼발치에서 지켜본 이순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와아아아아!”
최국성이 기쁨에 겨워서 그라운드 이곳저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이게 되네? 하하하핫!”
맷코치와 황 관장도 서로 얼싸안고 웃었다.
“순신아! 잘했어!”
최국성이 이순신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누가 머슬&드랍FC를 오합지졸이라고 했는가?
이순신의 중거리 슛!
하지만 낮은 성공률.
플랜B는 최국성의 빠른 발이었다.
이순신이 못 넣더라도 공은 필드 안쪽으로 들어와서 최국성이 마무리해줘야 했다.
예측과 운이 만들어낸 합작품에 정작 적토마 FC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도 안 되는데? 설마 노린 건가? 노린 건 아니겠지?”
“운이야. 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이었는데 잔디가 개판이라서 넘어졌잖아.”
김남호와 김구름은 단순히 운이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제가 뺏기는 바람에.”
“아냐. 저기서 슛 쏠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 저쪽도 전방으로 패스하려고 했는데 그게 좀 길었을 뿐이야.”
이운장과 김혁규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애써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이운장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최국성이 골대로 달려 들어갔다. 그 말인즉슨 약속된 플레이란 소린데…….몇 주 만에 이런 걸 준비했다고?’
공격형 미드필드로써 항상 주변을 살피는 그는 적토마 FC에서 유일하게 최국성이 뛰쳐들어가는 걸 보았다.
참교육을 시켜주고자 했는데 도리어 한 방 먹었고,
스코어조차도 1:0으로 지고 있는 상황이 되자 이운장은 살짝 화가 올라왔다.
“경기 안 할겁니까?”
이운장이 큰 목소리를 내자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운장이 미안하네! 알다시피 우리가 자네팀한테 처음으로 골을 넣은 역사적인 순간 아닌가?”
“괜찮습니다. 얼른 시작하시죠.”
첫 골은 훈훈하게 마무리가 됐다.
삐이이익.
적토마 FC의 이운장과 김혁규가 중앙선에 섰다.
이운장은 앞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저 자식이?”
이운장은 센터백에 서 있는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쟤 공격수 아니었어요?”
“응. 아니야. 우리팀 중앙수비수야.”
맷코치가 뭔가 얄밉게 말했다.
이운장이 씨익 웃었다.
‘이겨보려고 별수를 다 쓰네. 그래 봐야 더는 안 통해!’
툭.
이운장은 김혁규에게 공을 건넸다.
그는 공을 받고 돌격하기보다는 상대의 수비라인을 살폈다.
이번에는 상대방의 압박 수비가 없었다.
‘안 나오네? 그럼 이쪽에서 들어가면 되지.’
김혁규는 한발씩 전진했다.
툭.
조금씩.
툭.
조금씩.
오히려 상대편이 물러났다.
툭!
그러자 김혁규는 이운장에게 횡패스를 찔러줬다.
공을 잡은 그는 주변을 살폈다.
순식간에 수비수와 자기네 팀 선수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연합팀은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달려들지 마!”
이순신의 지시에 연합팀의 수비는 거리만 유지했다.
‘저 녀석이 팀을 조율하는구나. 그런데 방금 반말한 거 아냐? 역시 싸가지 없는 새끼네. 그런데도 군소리가 없다는 건 실력은 인정받았다는 뜻이겠지?’
이운장은 이순신에 대해서 점점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분명 공격수였던 거 같았는데, 수비라…….
물론 공격수가 수비수로 포지션을 전환하는 건 프로에서도 있었지만, 결이 달랐다.
수비수의 일원이 되는 게 아니라 수비를 지휘하는 건 큰 차이였다.
“들어가.”
이운장이 지시를 내리자 공격라인이 움직였다.
“양쪽에 들어오는 선수 막아!”
이순신은 ‘언성’을 발동시켜서 팀 전체를 지휘했다.
이운장을 주축으로 적토마 FC가 서서히 조여왔다.
연합팀의 한 명이 이운장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붙지 말고 거리 유지!”
이순신이 수비를 조율했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벌써 땀이 흘렀다.
언성을 자주 써서 선수에게 지시해야 했으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체력이 소진됐다.
‘체력 훈련을 안 했으면 어쩔…….그래도 첫 골이 터져서 다행이야. 덕분에 두 번째 작전을 할 수 있으니까.’
이운장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패스할 곳을 찾는데 당황한 기색이었다.
‘줄 때가 없을 텐데? 우린 전원 수비니까.’
형식상으로는 4백 수비인데, 연합팀은 전원 하프라인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공격수인 맷과 최국성도 평소보다 좀 더 아래로 내려왔다.
현재 중앙선을 넘은 적토마 FC는 4명.
평균 1~2명의 선수가 붙었다.
거기에 이운장은 이순신이 전담했다.
김혁규에게 공이 가는 것보단 이운장의 발끝으로부터 패스가 시작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패스 허브.
적토마 FC의 공격은 이운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협력 수비를 온 이순신을 보자 이운장이 입을 열었다.
“이길 생각은 있는 거냐?”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요?”
이순신이 깐족거렸다.
“90분 내내 막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수적인 열세에 이운장은 마땅히 패스할 곳이 없었다.
‘이 자식. 생각보다 위치선정이랑 지휘능력이 뛰어나. 그렇다면 남은 건…….’
이운장은 측면 쪽으로 드리블을 시도했다.
‘와, 머리 좋다. 따라가긴 애매해…….’
중앙에 있던 이운장이 측면으로 간다고 이순신이 따라간다면 중앙에는 빈 곳이 생길 게 뻔했다.
옆에 들어오는 미드필더에게 공을 준 후 다시 이운장이 받았다.
그 사이 미드필더는 측면으로 뛰어 들어왔다.
“붙어!”
이순신은 돌파하는 상대편을 향해 풀백에게 명령했다.
타이밍은 정확히 예측했지만, 신체조건 적으로 상대편 미드필더가 좀 더 우월했다.
한두 발자국 더 달리더니 그대로 크로스를 올렸다.
약간 감아 차서 휘어져 오는 공이 중앙 쪽으로 들어가는 김혁규를 향해 날아갔다.
그는 최국성과 같은 키가 작은 공격수였다.
“괜찮아. 헤딩은 아니야!”
황 관장은 김혁규가 공을 트래핑한 후 드리블을 시도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혁규는 엄청난 탄력을 자랑하며 뛰어올랐다.
‘됐어!’
순간 김혁규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퉁!
이순신은 피지컬을 앞세워서 한발 먼저 헤딩으로 커트했다.
흘러나온 공을 뒤에 있는 이운장이 다시 잡았다.
그대로 다시 공중에서 착지한 김혁규에게 패스했다.
김혁규는 황 관장을 등지고 서서 기회를 엿봤다.
상체를 흔들어서 그를 교란했다.
“오른쪽?”
황 관장이 발을 뻗었지만, 김혁규의 선택은 왼쪽이었다.
그는 놓치지 않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김혁규는 뿌리쳤다.
수비를 가볍게 제치고 프리 상태가 된 김혁규는 씨익 웃으며 슛을 했다.
“동점 골이다!”
퍽!
안타깝게도 김혁규가 때린 공은 이순신이 뻗은 발에 걸렸고, 떠오른 공을 헤딩으로 걷어냈다.
“휴!”
이순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삐이이이익! 페널티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