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레전드 매치
“전 안 뛸 겁니다!”
최국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다들 어쩔 줄 몰랐다.
“거 참…….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있는 거야? 그냥 후배 앞길을 위해 즐겜 한 판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누구보다 뛰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아시잖아요…….”
“끄으응…….”
맷코치가 옛일을 꺼내자 황 관장도 어쩔 수 없는 눈치였다.
동네스리가는 어디까지나 취미 생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할 필요는 없었다.
최국성이 그랬다.
선수 시절 최고라는 칭찬만 들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화려하게 데뷔한 것도 잠시.
작은 좌절을 몇 번 맛보더니 결국 대한민국을 흔든 승부 조작의 주범이 되어 불명예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업계 선배들이 그를 좋게 볼 리 없었다.
그런 그가 동네스리가에서 에이스로 활약할 때쯤 이운장의 축구팀과 맞붙었다.
이미 한물간 선수들이라고 우습게 보다가 생전 처음으로 당해 본 두 자리 패배.
“고작 이따위 실력으로 축구를 모독해? 꺼져. 넌 그라운드에 설 자격이 없어.”
두둥.
충격.
대충격!
최국성에게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인생 전부를 부정당해서 빡치는데, 반박할 순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에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 없었다.
‘젠장……! 난 축구를 모독한 적이 없다고!’
최국성이 두 번 다시 그들과 축구를 할 일도, 인사를 할 일도 없었다.
동네 축구의 에이스.
환호성.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용서해 준 사람들과 취미로 볼을 차는 게 좋았다.
그렇기에 개 같은 수모를 또 겪고 싶진 않았다.
***
이운장은 은퇴 후 낙지집을 운영하며 가끔 옛 동료들과 취미로 볼을 찼다.
황 관장은 그의 단골이기도 했으며 대전팀에서 뛰고 있을 때부터 경기에 따라다닌 고마운 팬이었다.
두 사람이 특히 마음이 맞은 이유는 축구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유망주에 대해서 서로 관심이 많았다.
황 관장은 이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운장이 잘 있었나?”
“네. 형님. 어쩐 일이시죠?”
“시간 되면 볼이나 한 번 차자고.”
“하하. 요즘 장사가 바빠서…….”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요번에 우리 팀 막내가 새로 들어왔는데 경기 감각 좀 살려주고 싶어서 그래.”
“경기 감각이요? 선출이에요?”
“응. 선출이었어. 좀 부탁해.”
“어휴, 그럼 제가 도와드려야죠. 누구죠?”
“이순신이라고……. 혹시 스페인으로 귀화한다고 했던 녀석인데 기억나나?”
“아…….”
이운장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는 축구를 사랑하는 축구인이면서, 축구에 해를 끼친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는 집행관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이쪽은 전력으로 갑니다.”
수화기 너머 이운장이 전화를 끊었다.
“후훗. 이래야만 전력으로 상대해주겠지.”
황 관장은 미끼를 덥석 물어서 매우 신났다.
그때 누군가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배달 왔습니다.”
헬스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치킨 냄새가 났다.
“감사합니다.”
“어? 너는?”
치킨을 배달한 사람은 최국성. 치킨을 시킨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웬 치킨이냐?”
“월급 탄 기념으로 제가 뭐 해드릴 건 없고 관장님이랑 트레이너 선생님들 드시라고 좀 시켰습니다.”
10마리의 치킨이 상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트레이너라고 해서 맨날 닭가슴살, 프로틴, bcaa, 고구마, 샐러드만 주구장창 먹는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특히 비시즌일 때는 저게 근육 돼지로 진화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운동량이 있기에 일반인보단 좀 나은 수준.
“인마. 월급 탔다고 그렇게 막 쓰면 어떡해?”
“괜찮습니다. 관장님. 덕분에 제가 늘 감사한걸요.”
“크흑.”
‘축구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라.’
황 관장은 엄청난 감동에 얼굴을 찡그렸다.
“순신아. 넌 분명히 성공할 거다. 내가 보증하마!”
“꼭 성공해서 더 크게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10마리는 우리가 먹기엔 너무 많네. 운동 끝난 회원님들도 좀 나눠주고……. 국성이. 안 바쁘면 자네도 좀 먹고 가.”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최국성은 찬바람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에 이순신이 먼저 문을 열어줬다.
“같이 가시죠.”
이순신이 씨익 웃었다.
‘이 새끼는 갑자기 왜 이래?’
최국성은 갑자기 친한 척하는 이순신이 어이가 없었다.
복도에 나왔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한 타이밍.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저 형님.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
“시합 같이 뛰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최국성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일 없다. 내가 네 따까리나 할 군번이냐? 그리고 너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최국성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차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형님이 있어야 머슬&드랍FC가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이라도 해볼 거 아닙니까?”
“뭐?”
최국성은 이순신 같은 부류를 잘 안다.
자존심이 세서 쉽게 누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지가 세상에서 최고로 잘난 사람.
흔히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의 특징이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은 너무나 의외였다.
오히려 생각에 잠긴 건 최국성 쪽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확답은 하지 않았다.
“좀 생각해볼게……. 배달이 밀려서 이만.”
최국성은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순신도 사실 최국성이랑 그다지 같이 뛰고 싶진 않았다.
아마도 미션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미션 발생 - 오월동주]
[서로 미워하면서도 공통의 어려움이나 이해에 대해서는 협력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항상 마음에 드는 동료들하고만 경기를 할 순 없습니다. 최국성과 함께 경기를 뛰세요!]
[보상 : 부활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
[실패 : 1개월 부상]
‘재활 프로그램이 뭐지? 그거보다 실패 페널티가 미쳤네.’
이 메시지가 발생했을 때 이순신은 보상보단 실패 시 조건이 걸렸다.
무려 1개월짜리 부상.
심지어 경기를 안 뛰면 상처를 입는 개 같은 역 보상.
철저한 을이 된 이순신이 최국성에게 매달리는 이유였다.
‘설득은 설득대로 하고, 우선은 분석부터 해볼까?’
이순신은 비어있는 P.T. 룸으로 갔다.
문을 닫자 카이저가 나타났다.
“오늘은 시뮬레이션 훈련입니다.”
[선수를 선택하세요.]
이순신은 예상 엔트리를 짰다.
전방에 최국성과 맷코치, 후방에 자신과 황 관장이 배치된 형태였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주변이 어두워졌다.
주변이 축구게임의 관전 모드처럼 펼쳐졌다.
순식간에 전·후반 경기가 모두 끝났다.
결과는 9:0.
“하아……. 하아…….”
너무나 참담했다.
최국성의 드리블은 전직 국가대표였던 김남호에게 막혔다.
비격진천뢰의 확률은 저번 시합과는 다르게 40~50%로 팍 떨어졌다.
“다시 한번…….”
8:0, 7:0, 9:1…….
몇 번을 해봐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무슨 짓을 해도 대패를 막을 순 없는 것일까?
게임처럼 11명을 컨트롤 할 수 있어도 힘든 판에 무슨 수로 일주일 만에 조직력을 끌어올린단 말인가?
그때 이순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장면이 떠올랐다.
“리플레이.”
이순신이 리플레이한 경기는 9:1로 진 경기였다.
유일하게 득점에 성공한 경기이기도 했다.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그러자 이순신의 입가에 미소가 드러났다.
“이길 수 있다!”
***
마침내 결전의 경기 날.
머슬FC와 드랍FC는 황 관장의 제안으로 특별 유니폼을 맞췄다.
“우리가 저번에 진 것은 오합지졸로 보였기 때문이닷!”
저번 경기에서 머슬FC와 드랍FC는 누구는 파란색, 누구는 빨간색, 심지어 아예 웃통을 벗고 경기에 나선 선수들.
“푸흡.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상대편의 비웃음.
결국, 연습용 형광 조끼를 입고 경기를 나섰던 뼈 아픈 과거의 악몽을 재연하고자 하지 않았다.
“적토마 FC다!”
이운장의 팀이 경기장에 들어섰다.
젊은 시절.
오리온이라고 불리며 엄청난 미모와 실력을 자랑했던 그는 이제 더벅머리 수염 아저씨가 되었지만, 꽃중년이라고 불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 뒤에 무서워 보이는 인상을 준 남자는 이운장의 오랜 친구이자 무선 청소기로 불린 김남호였다.
2002년 당시에 세계 최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로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특히 거침없는 입담과 터프함이 강점인 선수였다.
쿵. 쿵.
김구름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묵직한 골키퍼가 그 뒤에 들어왔다.
선수 시절에도 골키퍼치고는 날렵해 보이진 않았지만, 특유의 안정감으로 대한민국 골대를 10년이나 책임졌던 선수였다.
비록 이운장은 부상으로 월드컵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세 사람은 같은 클럽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다.
어느덧 40대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해서 그런지 일반인들과는 다른 포스를 풍겼다.
“오늘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요. 저 녀석이 그 녀석이군요.”
이운장은 이순신을 쳐다보았다.
“그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줘.”
“알겠습니다. 국성이 저 녀석도 아직 축구화 안 벗은 거 보니 정신을 못 차렸네요.”
안 한다고 선언했지만, 최국성은 결국 경기에 나섰다.
이순신이 직접 가게에 가서 배달도 도와주고, 형수님과 친해지고 애들과 놀아준 결과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최국성의 마음도 조금은 풀어졌다.
적어도 이 녀석은 자신과는 다르게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황 관장은 이순신과 최국성을 보더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왠지 이길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 우리 연습 많이 했어.”
“기대합니다.”
이운장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달려라. 적토마. 파이팅!”
“머슬&드랍, 오늘은 지지 말자!”
양 팀은 구호를 외치고 경기장에 들어섰다.
이운장의 적토마 FC는 이운장, 김남호, 김구름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매우 탄탄했다.
비록 프로에 입문하진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까진 볼을 찼던 선수들로 이루어졌다.
킥오프는 적토마 FC의 선축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프라인에는 이운장과 김혁규 두 사람이 서서 준비했다.
“네가 이순신이구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축구화를 신고 있냐?”
이운장의 직설적인 도발.
착해지고자 노력했던 이순신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하하. 그땐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하니 예쁘게 봐주십시오.”
이순신이 아니라 보살이었다.
그의 넉살에 이운장은 씨익 웃으며 김혁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늘 경기 재밌겠네. 스페인 유망주 대 브라질 유망주의 대결이 될 테니.”
이순신은 김혁규를 바라보았다.
씨익 웃자 김혁규도 씨익 웃었다.
삐이이익-
이운장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김혁규는 공을 받자마자 현란한 개인기로 치고 나가려고 했다.
쫘아아악-
이순신이 빠르게 김혁규에게 접근했다.
툭.
빠르게 김혁규의 공을 커트했다.
“리턴!”
김남호가 전진했던 선수들을 불렀다.
하지만 이순신의 슛이 더 빨랐다.
“미친 여기서 슛을?”
뻐어어엉!
이순신이 찬 슛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응?”
팔짱을 끼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구경하던 김구름은 다급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툭.
“젠장!”
고르지 못한 잔디에 그는 그만 다리가 꼬여서 넘어졌고, 공은 골대를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