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백의종군
금도끼. 은도끼 설화처럼 일단 한 번을 빼고 나면, 더 큰 보상이 들어올 것이라고 이순신은 생각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그런데 보상이 생각보다 더 컸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이순신의 두 눈은 커졌다.
백의종군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의 정도 아니고 필요 없다는데 챙겨주다니…….
다만, 칭호라는 건 처음 보기에 약간의 호기심은 생겼다.
“이게 뭡니까?”
“숨겨진 시험까지 모두 통과했네. 자네는 능력을 다룰 자격이 있어. 숭고한 희생정신에 이 충무공은 감탄했다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하자면 충무공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준 덕에 히든 보상을 얻은 셈이었다.
“아까 본 것은 자네의 미래네.”
이순신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고작 21살인 이순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났던 미래.
“네?”
“자네는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대참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네.”
단숨에 인생 2회차의 결말을 본 이순신은 좌절했다.
노력이라는 걸 해보기도 전에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가?
빡이 제대로 친 이순신은 충무공에게 물었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그렇다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의 파도 같은 공격을 막아낼 수비수라네.”
충무공은 눈을 감았다.
침묵.
대답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졌다.
정해진 미래를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미래를 노력 없이 이루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로 한 번 재기해보도록 하죠.”
“고맙네. 우리는 자네를 도울 것이야. 항상 모든 경기에 최선을 다해주게. 어쩌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 테니…….”
충무공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이 병장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이순신이 고개를 돌리니 분대장이 나타났다.
“별거 아니고, 잠시 멍 좀 때렸어.”
“그러십니까?”
“사실 갑작스럽게 어울리는 건 좀 닭살 돋잖아. 그깟 한 경기 좀 이겼다고…”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둔 거 아닙니까?”
두 사람에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순신은 군 생활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갔으면 했다.
“이 병장님, 제대하시면 뭐 하실 겁니까?”
이거야말로 진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충무공을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고민했을 문제.
이제는 목표가 생겼다.
“축구나 다시 해보려고.”
“축구요? 정말입니까? 꼭 하셔야 합니다. 두 번 하셔야 합니다. 이 병장님이 가진 재능이라면 충분히 됩니다. 되고도 남습니다!”
분대장이 급발진했다.
그 누구보다도 이순신의 재기를 바라던 사람이었다.
“오버하지 마.”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 번 최선은 다해볼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분대장은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더니 PX로 달려갔다.
‘왜 저래?’
이순신이 의아한 듯 쳐다봤다.
금세 분대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대하면 여기에 꼭 연락해보십시오. 제 이름 대면 잘해주실 겁니다!”
분대장이 쪽지에 적은 건 누군가의 연락처였다.
***
전역신고를 마친 이순신은 제대했다.
그가 향한 곳은 어머니가 살고 있던 임대 아파트.
한동안 머물면서 재기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공개테스트 일정이었다.
K리그부터 K리그2.
심지어 K3 리그까지 모두 검색했다.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제일 빠른 건 화성FC에서 주최하는 공개테스트인가?”
화성FC는 한때 K리그, K리그2 바로 아래인 K3에 속한 팀이었다.
“조건이 꽤 까다롭네.”
3부리그라고 해도 명색이 돈 받고 뛰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공개테스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 고등학교 축구팀 졸업자/졸업예정자
- 현재 대학팀 소속이거나 대학팀 졸업예정자
- 프로 또는 내셔널리그 경험자
-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 선수등록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
- 제출 서류는 신청서, 학력증명서, 경기실적증명서, 선수경력 증명서…….
이순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짜증이 스르륵 밀려왔다.
“뭔 놈의 서류가 왜 이렇게 복잡해…”
그중에서 한 조항이 굉장히 걸렸다.
‘선수등록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
“그래도 영구제명까지는 아닌 게 다행인가…”
옛날에 귀화니 뭐니 하면서 싸질러놓은 똥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단 테스트는 한 달 후… 그 안에 필요한 서류는 최대한 떼보자.”
오랜 외국 생활로 어쩌면 서류전형에서 탈락할 수 있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시작도 전에 포기하는 건 이순신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되든 안 되든 넣어보자!”
물론 축구선수를 서류로만 뽑는 것은 아니었다.
통과 이후 단 한 번의 기회에서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야만 재기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몸을 끌어올리고, 실전 감각을 올려야만 했다.
“분대장이 준 선물을 사용해볼까?”
순신은 분대장이 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신나는 여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왔다.
“흠음흠.”
이순신은 본인도 모르게 같이 흥얼거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전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이요?”
“아드님의 군대 선임입니다. 혹시 이야기…….”
“아!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회에서 자신을 이토록 반겨준 이가 있던가?
약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 이순신은 그가 불러준 장소와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섰다.
***
“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이순신이 1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의 한 시내였다.
“뼈 빼고는 다 빼 드리겠습니다……. 아니 근육은 남겨놔야 하는 거 아닌가?”
이순신은 홍보문구에 의아함을 품고 안으로 들어섰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그는 아직도 한국식 유머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례합니다…….”
“어서 와요! 어서 와! 이야 화면보다 실물이 더 낫네. 어릴 적 그대로야! 내가 팬이었어!”
분대장이 소개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인 황 관장이었다.
황 관장은 눈을 반짝거리며 이순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 고맙습니다.”
잊힌 유망주를 기억해주는 건 선수 본인에게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래. 축구선수를 다시 하고자 하신다고?”
“넵.”
“그럼 잘됐네. 마침 사람도 필요한 참이었는데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몸 만들면 되겠네!”
황 관장은 시원하게 호의를 베풀었다.
“이곳에서요?”
이순신은 잠시 둘러보았다.
웨이트 머신, GX룸, 사우나 등 규모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곳.
‘뭐. 지금 입장에서 파주나 태릉선수촌 같은 환경을 제공 받는 건 말도 안 되지.’
이순신은 씨익 웃었다.
“좀 성에 안 차지?”
“아닙니다. 다만 알바가 아닌 회원으로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군대에서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아껴 쓰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온전히 몸을 끌어 올리는 데 시간을 쓰고 싶었다.
“많은 돈까지는 챙겨주지 못하겠지만 월 20만 원 정도는 챙겨줄게. 아침, 저녁으로 딱 청소만 두 번 해주면 돼. 그 외에 시간은 뭘 하든 자유. 어떤가?”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
어디서도 이런 아르바이트는 구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우리 팀에 들어와.”
“네?”
분대장이 그의 아버지를 소개해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황 관장은 헬스장을 운영하고 있음과 동시에 ‘머슬FC’라는 조기 축구회의 단장이었다.
몸도 만들고, 실전 감각도 쌓고…….
이순신은 생각했다.
재기하기 위해서 이만큼 파격적인 조건이 있을까?
이미 백의종군을 선택한 몸.
뛸 수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재밌네. 재밌어.’
늘 최고의 환경에서만 운동했던 이순신에게 이 정도 모험은 흥미진진 그 자체였다.
이순신은 당장 그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러닝으로 몸도 풀고, 축구 근력 향상을 위한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순신아.”
“네.”
“지금부터 마감 때까지 GX룸 비니까 마음껏 연습해라.”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축구공을 가지고 GX룸으로 들어갔다.
실내라서 축구화를 신을 순 없었다.
“이런다고 훈련을 못 할 건 없지.”
[백의종군. 훈련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당장 써먹을 수 있을 스킬부터 생길 줄 알았는데 훈련?
어쩌면 이순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스킬이 아니라 훈련이었다.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무리 인터넷방송이 발달한 시기라지만, 그걸 따라 하는 건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
심지어 전담 코치를 둘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자신을 지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껏해야 황 관장뿐…….
그에게 축구를 배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 도대체 어떻게 재기를 한 걸까?’
2회차 때 어찌어찌 재기는 했다고 한 게 어쩌면 뻥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완전 답정너구만. 당연히 해야지.”
이순신은 성공과 실패 중 택일을 하라는데 선택지는 하나뿐…….
그러자 이순신 앞에 사람 형상의 실루엣이 세 개나 나타났다.
[코치를 선택해주십시오]
[스위퍼, 리베로, 중앙수비수]
“그래도 골 맛을 좀 보려면 리베로가 낫겠지? 여차하면 답답할 땐 내가 넣어야 하니까.”
이순신은 골에 대한 욕심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리베로 특화 코치를 선택했습니다.]
리베로 실루엣 이외의 코치는 스르륵 사라졌다.
“네가 이제부터 내 코치구나. 이름이 뭐냐?”
사람 형상의 실루엣은 아무 말도 없었다.
“반말로 해서 기분이 나쁜가?”
[지금부터 카이저 코치와 함께 훈련을 시작합니다.]
“카이저라 하면 그 선수의 별명 아닌가?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코치님.”
[카이저 코치가 예의 바른 모습을 보면서 웃습니다.]
‘얼굴의 표정이 없었지만, 감정은 있나 보네.’
카이저는 이순신에게 공을 굴렸다.
[볼 컨트롤 훈련을 시작합니다.]
카이저는 발바닥 앞부분으로 공을 밀고 당겼다.
눈감고도 할 수 있던 기초 훈련이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백지수표, 아니 백의종군답게 이순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축구에서 실력도 중요하지만, 성실성도 중요했다.
그래야만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기본기는 배신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왼쪽 500번, 오른쪽으로 500번을 하다 보니 땀이 흘렀다.
종아리가 조금 땅겼지만, 이 정도쯤은 참아냈다.
친절한 카이저는 눈앞에 영상을 띄웠다.
감각훈련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닌 몸이 기억하는 머슬 메모리의 영역이었다.
즉 발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눈과 뇌는 수비수의 플레이를 익혔다.
때로는 영상과 자신이 지금 하는 동작이 겹쳤다.
공이 발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건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좋아.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어!”
이순신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했다.
[카이저 코치가 매우 흡족해하고 있습니다.]
슛~ 볼은 나의 친구~♬
이순신은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기초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자세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카이저 코치님을 따라 하세요.]
줄곧 팔짱을 낀 채 구경하던 카이저가 움직였다.
그는 한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순신은 그를 따라 했다.
‘이렇게 하면 되나?’
[몸의 중심을 낮추십시오.]
카이저는 친절하게 알려줬다.
[카이저 코치님의 공격을 막으세요.]
카이저는 화려한 개인기를 쓰면서 이순신에게 돌진했다.
“큭.”
난생처음 해보는 수비에 이순신은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무게중심은 뒤로 컨트롤해야 합니다.]
카이저는 친절하게 알려준 후 다시 돌진했다.
“수비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아까보다 움직임이 가벼워진 이순신은 자신의 등 뒤로 카이저가 넘어가지 않게 막았다.
‘이번엔 아예 빼앗아볼까?’
이순신은 카이저가 왼쪽으로 치고 나갈 때 다리를 뻗었다.
“으아아아악!”
이순신은 순간 엄청난 찌릿함을 느꼈다.
“빼앗겨서 그런가? 이번엔 꼭 뺏겠어!”
오기가 생긴 이순신은 몇 번이나 도전했다.
“으아아악.”
[카이저 코치님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하아……. 하아…….”
계속되는 감전으로 이순신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거 페널티가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카이저는 대꾸가 없었다.
[카이저 코치가 돌파를 시도합니다.]
“흐아아압!”
스르르륵!
이순신은 미끄러지면서 깊은 태클을 시도했다.
“됐다!”
아까 익힌 감각훈련 덕분에 태클에 성공한 후에도 공은 이순신의 발에 걸렸다.
“봤죠?”
이순신이 한껏 의기양양해지려고 할 때,
“으아아아아아악!”
이순신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전류를 느꼈다.
“아니. 왜! 빼앗았으면 됐잖아!?”
[태클해야 한다면 난 이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말디니-
그제야 이순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