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3화 (4/161)

3화. 충무공이 보여준 미래

어슬렁어슬렁.

이순신은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엇! 이 병장님이 왠일이십니까?”

“원래 축구 안 하시잖아요?”

순신네 분대 상병과 일병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구경이나 좀 하려고.”

4:10으로 지고 있는 상황.

분대장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쩝. 걍 대충이라도 좀 뛰어주지.’

프로와 아마추어는 급이 다르다.

지금은 잊힌 유망주지만, 한때는 엄청나게 날린 축구선수라는 걸 분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이순신의 실력이 반의반이라도 발휘되면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

하지만 염세주의자가 된 이순신에게는 그저 축구는 공놀이일 뿐이다.

삐이이익-

경기는 곧 재개됐다.

전술은 없고 전투만 있는 군대스리가.

누구 하나 어딘가 부러져야지만 끝나는 전쟁.

순신은 양심적 전쟁을 거부해왔다.

하아암.

순신은 지루한지 하품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괜히 나왔나…”

이순신은 좀이 쑤시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우우우웅-

그 순간 빠른 속도로 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퍽!

소리가 나기 직전.

엄밀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이 멈췄다.

무언가 순신의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이 순신의 몸에 닿기 전에 다리가 더 빨랐다.

정강이와 발등 사이로 공을 콱 물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공을 발등으로 툭툭 찼다.

“오~ 역시 선출 클라스!”

“그냥 선출이 아니지. 무려 청대잖아!”

주변에서 환호성이 나왔다.

공을 찼던 상대편 공격수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녀석의 계급은 고작 이등병.

그는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 선수로 활약했다.

다만 부족한 실력 탓에 스카웃을 받지 못했다는 걸 쉽사리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나 순신이 잘나갈 때 주전자나 날랐던 그는 열등감이 휘몰아쳤다.

‘나도 저 새끼처럼 푸시를 받았다면…’

마귀에 쓰였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퇴물 꼰대. 한번 뒤져봐라.’

크로스를 가장한 강슛을 순신을 향해서 찼던 것이다.

‘뭐야? 저 볼 컨트롤은? 아무리 선출이라고 하지만, 오랫동안 축구를 안 한 사람의 몸놀림이 아니야.’

이등병이 놀라고 있는 사이, 이순신의 눈빛이 변했다.

“어떤 새끼냐?”

뜨거운 체육활동 시간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공 좀 주십시오.”

눈치 없는 상대편 이등병 새끼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순신은 공을 손으로 잡은 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대편 분대장이 이등병에게 눈짓을 줬다.

사과가 먼저였다.

“죄송합니다.”

공을 찬 일병이 마지 못해서 고개를 까닥이며 사과를 했다.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눈은 웃는데 입은 가만히 있었다.

순신은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순신네 분대장에게 공을 넘겼다.

“나 어디 들어가면 되냐?”

“네?”

분대장은 잘못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몸을 푸는 모습을 보자 진심이구나 싶었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하시는 분이 왠일이십니까?”

“글쎄. 오늘 아주 그냥 빡치는 일이 연속으로 있어서?”

분대장이 씨익 웃었다.

예전에 기자회견에서 당당히 귀화하겠다고 외치던 겁나 싸가지 없는 눈빛이었다.

“골 좀 팍팍 넣어 주십쇼.”

“에이~ 이 병장님. 들어오면 반칙 아닙니까?”

반대편 분대장이 나섰다.

“야. 너네가 이기고 있으면서 쫄리냐?”

“쫄리긴. 씹새야. 아무리 그래도 청대까지 지냈던 사람이 들어오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무려 PX빵 20만 원어치가 걸린 빅게임이다.

10입 냉동만두가 무려 50봉이고, 콜라와 사이다까지 배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예민한 건 당연했다.

분대장들이 으르렁거릴 때 순신이 나섰다.

“그만들 해라. 나 수비 볼게.”

상대편 분대장은 쾌재를 부를 때, 순신네 분대장은 울상이 됐다.

이순신이 골키퍼 바로 앞 센터백 위치에 섰다.

“이 병장님. 진짜 공격 안 하실 겁니까?”

내심 아쉬운 분대장이 물었다.

“응. 안 해.”

‘젠장’

분대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을 때 순신이 물었다.

“저 새끼 오늘 몇 골 넣었냐?”

순신은 자신을 저격한 이등병을 가리켰다.

“한 5골 정도 넣었을 겁니다.”

“오케이. 이제부터 저 새끼는 한 골도 못 넣게 내가 막아줄게.”

분대장은 간만에 활활 타오르는 순신의 의지가 느껴졌다.

“간만에 골 맛 안 보시렵니까? 제가 대지를 가르는 패스로 찔러드리겠습니다.”

“난 참교육만 하면 돼.”

분대장은 재차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

‘젠장. 이건 여포를 가지고 보급부대에 처박아 둔 꼴이잖아…’

아쉬운지 침을 꼴깍 삼키고 최전방으로 돌아갔다.

삐이이익-

경기가 재개됐다.

상대편 이등병은 빠르게 치고 달렸다.

그 앞을 순신이 막아섰다.

‘흥. 퇴물 주제에 날 막겠다고? 심지어 공격수가?’

이등병은 빠르게 오른쪽으로 골을 치고 달리고자 했다.

적어도 스프린트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순신이 가볍게 다리를 뻗어서 공을 빼앗았다.

일병이 당황할 틈도 없이 순신이 분대장에게 크로스를 올려줬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깔끔한 택배였다.

“크로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순신이 이등병을 보며 씨익 웃었다.

골!

아주 가볍게 넣었다.

5:10.

드디어 더블 스코어가 됐다.

이등병의 얼굴이 빨개졌다.

“공 주십시오!”

공을 받은 그는 자신의 장기인 치고 달리기를 시도했다.

이순신이 따라붙었다.

“꽤 빠르네.”

순신의 칭찬에 이등병은 자신감이 붙었다.

“라고 할 줄 알았지?”

어느새 이순신은 이등병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페인팅이다.’

이등병이 상체를 흔들었다.

“뭐하냐?”

이순신이 팔짱을 끼고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빈틈!’

이등병이 오른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는데…

툭.

이등병은 공만 두고 앞으로 굴렀다.

‘이 사람 뭐야?’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이등병은 넘을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통곡했다.

그 뒤로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4번, 왼쪽 1번, 심지어 패스도 막혔다.

“뛰어!”

전술은 간단했다.

이순신이 공을 뺏는다.

앞으로 찔러준다.

골을 넣는다.

흐름이 넘어왔다.

4:10의 점수 차는 11:10으로 오히려 1골이나 앞서게 됐다.

그중에서 순신은 5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상대편은 궁여지책으로 이등병을 반대쪽으로 포지션을 이동시켰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는 건 이순신이었다.

“왜 자꾸 저만 쫓아다니십니까?”

“너만 막으면 끝나니까.”

이등병의 표정은 울상이 됐다.

결국 상대편 분대장은 이등병을 뒤로 내렸다.

최전방공격수였던 이등병을 플레이메이커 자리로 내려서 순신의 뒤를 침투하여 골을 노리는 작전이었다.

‘단 한 번. 한 번이다!’

이등병에게 이제 승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제치고 골을 넣는 것이 목표였다.

“병장님! 여깁니다!”

이등병이 손을 들었다.

분대장의 쓰루패스가 안타깝게도 순신에게 걸렸다.

‘이런 빡대가리!’

이등병은 다시 턴을 해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숨을 헐떡이며 자세를 잡는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상대편이 그 누구도 자신의 진영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순신이 넘어가지 말라고 제지를 시켰다.

“아! 이대로 시간 끌어서 뭐하려고요! 볼 돌리기는 개똥매너 아닙니까?”

이등병이 계급을 무시하고 소리쳤다.

그때 순신이 씨익 웃었다.

뻥!

하프라인과 페널티 라인 사이에서 이순신은 슛을 찼다.

한 마리의 용이 나무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대편 사이로 날아가서 그대로 그물망에 꽂혔다.

삐이이익-

순신의 군데스리가 데뷔골이자 쐐기 골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앙!”

순신네팀은 이순신을 잡아다가 위로 던졌다.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은 월드컵 우승보다 더욱 감격스러웠다.

***

순신네 분대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수북이 쌓여있는 과자, 음료수, 냉동식품 냄새가 내무반을 가득 채웠다.

“잘 먹겠습니다!!!!”

수십 개의 손과 눈이 바삐 움직였다.

이순신은 그저 만두 한 조각이나 챙겼다.

“간만에 뛰니까 어떠십니까?”

분대장이 닭강정을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나쁘진 않네. 그런데 순돌이는 괜찮냐?”

“순돌이요? 그런 애가 있었던가요?”

이순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가리에 붕대를 감은 녀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에 홀렸나?’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 병장님. 전역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좋은 추억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는 말년 병장 중 최고로 멋졌습니다.”

“축구 다시 해보시는 거 어떠십니까? 클라스가 다릅니다!”

“닥쳐.”

이순신은 간만에 들은 칭찬이 멋쩍은지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운동선수가 담배라니.

그런데 다시 축구를 시작하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그게 말이 안 돼요?”

“넌 강순돌!?”

고개를 돌리니 강순돌이 나타났다.

“아까 다친 데는 괜찮냐? 그런데 몸은 왜 빛나냐?”

사실 이순신은 살짝 쫄렸다.

하지만 쫀 척을 해서는 안 됐다.

“충분히 반성했죠?”

“반성? 무슨 반성?”

“음. 18개월 동안 열심히 반성한 줄 알았는데…”

순간 강순돌의 모습이 조선 시대 갑옷을 입은 할아버지로 바뀌었다.

“여기 민간인 출입금지인데요?”

너무 놀란 나머지 이순신은 입에서 본인이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았다.

“이를 어이할꼬. 곧 엄청난 재앙이 닥칠 텐데.”

“재앙?”

-아- 한국 축구의 비극입니다.

이순신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그라운드가 펼쳐졌다.

일본에게 5:0… 그것도 상암에서 깨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성기를 두른 중국 선수들에게 6:0이라는 대굴욕을 당한 한국 축구팀.

심지어 말레이시아에 1:0으로 지는 바람에 월드컵진출에 실패하는 최악의 상황.

“이게 뭐야!”

“이 충무공이 네게 보여준 것은 앞으로 7년 후에 한국 축구가 겪을 대참사다…”

“뭔 개 같은.”

“화내는 거 보니 아직 희망이 있군.”

백발의 노인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라운드의 해상제독. 현무의 왕 이순신으로 거듭나겠는가?”

“능력?”

“그렇다. 국가를 배신하고 귀화를 한 건 우리에겐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고생한 네가 반성했다고 판단하여 우리는 너를 서포트하기로 결심했다.”

“힘이라…”

인생 1회차도 이미 충분히 빡겜이었기 때문에, 2회차라면 조금은 쉽게 가도 될 법한데 이순신은 겁나 답답한 새끼였다.

“그 힘 필요 없어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시 올라갈 거니까. 그리고 누구보다 골을 많이 넣으면 되니까!”

충무공이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순신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전은 예상치 못할 때 의미 있는 법이다.

이제 고작 21살이다. 많은 유망주처럼 한때 스쳐 지나가는 낙엽이 아니라 라이언킹이라 불리던 선수처럼 우뚝 일어서고 싶었다.

충무공은 씨익 웃었다.

[충무공이 당신에게 백의종군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순간 이순신이 웃었다.

“후훗. 계획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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