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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장. 종전#2-
“큭!”
던전은 다급한 신음을 쏟으며 몸을 뺐다.
얼굴에 떠오른 당혹스러운 표정은, 그가 인간의 형상을 갖춘 이후 짓는 가장 격렬한 감정의 표출이었다.
준혁이 곧장 뒤를 쫓았다.
손에 들린 육모방망이는 쉴 새 없이 공간을 두드렸다.
과격할 정도의 몽둥이질이 난무하는데 오히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계를 초월한 움직임이 자연의 물리적 반응까지도 짓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파괴력은 진짜다.
한쪽은 쫓고, 한쪽은 피했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 끝에 던전에게 실낱같은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했다.
준혁의 육모방망이와 던전의 단봉이 새하얀 빛을 머금은 채 맞부딪쳤다.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정전이라도 된 듯 갑작스러운 암흑이 내려앉았다.
아니, 그것은 ‘암흑’이 아니었다.
‘무(無)’였다.
빛은커녕 어둠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무’의 파장이 일시적으로 하늘을 뒤덮었다.
‘소멸’과 ‘소멸’의 충돌 여파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없애는 두 개의 스킬이 충돌하며 일어난 여파였다.
빛을 삼켰고, 어둠을 삼켰으며, 소리는 물론 세상의 법칙조차 모두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소멸’은 그 정도로 파괴적인 스킬이었다.
이 ‘소멸’에 얻어맞은 환수가 몸의 일부만 잃고 무사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융합’을 거듭한 끝에 신격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파괴하는 두 개의 ‘소멸’이 부딪친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싸움이 재개되었다.
‘소멸’을 품은 육모방망이와 단봉이 쉴 새 없이 충돌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무’로 뒤덮였다.
시간과 공간, 차원까지 초월했던 공방은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은 아주 원초적이고 순수한 폭력의 교차였다.
둘은 기본적으로는 피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무기를 들어 막았다.
그렇게 두 개의 에테르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어김없이 ‘무’가 찾아왔다.
‘무’는 말 그대로 대원칙조차 일시적으로 없애 버리는 괴멸적인 현상이었다.
그로 인해 ‘무’가 내려앉을 때마다 지구의 자전마저도 쉴 새 없이 멎었다 돌기를 반복했다.
지구의 자전이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만들어진 영상으로 보았다면 피식 웃음이 터질 광경이지만,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무’라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대원칙마저도 소멸시킨다.
즉, 지구의 인간들은 시간마저 사라진 그 순간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지구의 생명체들만이 아니다.
멀찍이 싸움을 살피고 있는 환수마저도 깨닫지 못했다.
신격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신격을 가지지는 못한 존재의 한계였다.
“후, 후우!”
던전은 틈만 나면 호흡을 골랐다.
던전이, 시스템에서 빚어진 작위적인 존재가 호흡에 곤란을 느낀다는 것은 언뜻 들으면 난센스다.
하지만 이는 던전이 그만큼 인간에 가까운 존재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믿을 수가 없군.’
던전의 눈동자는 여전히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속에 깃든 것은 짙은 불신이었다.
‘어떻게 겨우 그 정도로?’
준혁은 ‘융합’을 사용했다.
그런데 준혁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은, 대단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그 격은 높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격을 겨우 벗어난, 아직 무급에도 닿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존재 12명이 더해졌다고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처럼 대화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잠깐의 틈만 있어도 자신이 만든 ‘소멸’에 자신이 끝장날 판이었다.
던전의 베이스는 ‘시스템’이었다.
그런 근원을 갖고 있는 던전은 절대 인간을, 눈앞의 준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던전은 어디까지나 갖고 있던 힘과 능력을 인간의 형상으로 빚은 껍데기에 옮겨 넣은 상태였다.
그러니 가지고 있는 힘은 1의 변화도 없었다.
다만 점점 강해진 것처럼 느껴진 것은, 자신의 장치를 이전시키는 과정 중간중간에 만난 탓에 착시가 일어난 것뿐이었다.
장치, 권능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갖고 있던 것을 지금도 그대로 갖고 있다.
다만 높은 응용력으로 장치를 중첩시켜 ‘소멸’이라는 스킬을 만든 것이 새롭다면 새로운 것.
그에 반해 준혁은 성장했다.
그저 보통의, 평범한 인간에서 시작한 존재였다.
배면계에서 인간의 한계까지 성장해 신수들을 모두 봉인하고 인간 세계로 귀환했다.
봉인됐던 힘이 풀린 이후, 더블 각성을 했다.
그 상태로 꾸준하게 성장을 이어 갔다.
린디웨에게 지식을 받았고, 준비되어 있던 시스템을 소유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준혁은 성장을 거듭했다.
깨달음을 갈구했고, 몸을 부딪쳐 법칙으로 파고 들어가 또 다른 성장의 자원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던전과 싸움을 시작했을 때, 혹은 던전의 강함에 절망감을 느꼈을 때.
그때 준혁의 상태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완전한 격의 상승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마치 컵에 물이 가득 찬 상태와 같았다.
몇 방울.
단 몇 방울의 물이 부족해 격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부족한 몇 방울의 물을 12명의 동료가 보태 준 것이었다.
그로 인해 준혁은 벽을 넘었다.
‘신격’이라는, 신에 가까운 격이라고 불리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런 수준이었기에 던전의 ‘소멸’도 순식간에 카피할 수 있었다.
지금 던전과 박빙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싸움은 한층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피했고, 피하지 못하면 막았다.
하지만 서로의 공격을 모조리 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상대가 휘두른 ‘소멸’에 맞아 몸의 일부가 터져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소멸’에 몸이 터져 나갔던 환수와 달랐다.
‘소멸’에 맞고, 맞은 부위가 순간적으로 반투명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 싶게 순식간에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피하고, 막고, 때린다. 혹은 맞는다.
그 또한 수십 수백 번 반복되며 싸움이 이어졌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서로의 격은 다르지만 가진 힘과 능력은 똑같은 두 존재의 싸움은 변화가 없었다.
마치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는 양팔 저울처럼 어느 한쪽도 내려가지 않고 완벽한 균형을 유지한 채 무려 일곱 번의 밤과 낮이 흘렀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면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긴장감도 최고치다.
바람만 불어도 끊어져 버릴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당겨진 긴장감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변화도 없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싸움의 양상이 변한 것은 일곱 번째 밤이 물러갈 때쯤이었다.
수평선 너머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높디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은 둥근 지구의 표면을 보여 주듯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
그 둥근 수평선 한가운데 붉은 점이 솟으며 마치 반지 위의 보석처럼 빛나는 딱 그 순간이었다.
준혁의 두 눈에 지금껏 없던 서기(瑞氣)가 어렸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콰콰콰쾅!
지금껏 한없이 조용하던 싸움이 갑자기 소란스럽게 변했다.
준혁의 온몸에서 과격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오히려 당황한 쪽은 던전이었다.
‘왜? 갑자기 무슨?’
얼마나 당황했는지 던전이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고의, 명백한 고의였다.
방금 준혁은 일부러 던전의 공격에 몸을 내밀었다.
‘도대체 왜?’
같은 질문만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소멸’의 폭격으로 넝마가 되었던 준혁의 육체가 빠르게 원래 상태로 되돌아왔다.
“하, 하하!”
그리고 준혁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웃음이었다.
“뭐냐?”
던전이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푸하하하!”
점점 커진 웃음소리가 파안대소로 바뀌며 하늘 가득 울려 퍼진다.
너무 길게 웃어 대는 통에 숨이 가쁘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던전으로서는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참을 웃어 대다 가까스로 진정시킨 준혁이 던전을 향해 말했다.
“너와…….”
“음?”
“나의 차이.”
육모방망이를 갈무리한 준혁의 빈손에 새롭게 하얀빛 덩어리가 맺혔다.
던전이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그 빛을 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장치였다.
던전이 익히 알고 있는, 조금 전까지 죽어라 싸우며 사용했던 ‘소멸’이었다.
“네놈, 나를 놀리는 거……. 음?”
던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혁의 손에 떠 있던 ‘소멸’의 성질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던전이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건 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준혁의 손에 맺힌 빛, 처음에는 ‘소멸’이었다가 서서히 성질이 바뀐 장치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읽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는 글자로 문장을 써 놓아서 읽을 수는 있는데, 그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격이었다.
구성 하나하나는 잘 알고 있는 것들인데, 그것을 중첩해 만들어 낸 최후의 결과물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법칙이 있다고?”
지금 던전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당혹감 따위가 아니었다.
공포였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던전이 급히 물었지만 준혁은 대답 대신 몸을 움직였다.
부웅-!
소리가 살아났다.
“큿!”
화들짝 놀란 던전이 황급히 단봉을 들어 막는다.
꽝!
맹렬한 소음과 함께 던전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뭐냐,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변한 거라고는 준혁의 손에 맺힌 알 수 없는 장치 하나뿐인데, 그것만으로 이런 차이가 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악문 던전이 다시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테르 단봉이 종횡무진 공간을 휘저으며 준혁에게 쏟아졌다.
꽝, 꽈광!
여지없이 터져 나오는 폭음, 그리고 최대한 버티다가 결국 튕겨 나가는 던전.
“크윽! 도대체 뭐냐?”
던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준혁이 휘두르는 저 장치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렇게 갑자기 강해졌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준혁의 입이 열렸다.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굳이 이름을 붙여 보자면…….”
“붙인다면?”
“소멸의 반대.”
“응?”
“탄생.”
솔직하게 무슨 말인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아무런 걱정도 없다는 듯 준혁이 설명을 이었다.
“세상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 소멸하잖아?”
“그렇지.”
“그런 거다. 죽음은, 소멸은 새로운 탄생으로 가는 과정이잖아.”
“그게 도대체?”
“탄생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파괴만을 아는 시스템은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지.”
말을 마친 준혁이 환한 표정으로 던전을 후려쳤다.
주먹을 휘두르는 족족 이리저리 튕겨 나가는 던전의 모습은 지독하게 재미없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준혁은 웃고 있었다.
던전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서?
아니다.
준혁이 진심으로 기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거였어!’
핵심은 죽음, 그리고 탄생이었다.
죽음과 탄생, 혹은 탄생과 죽음.
이것은 각기 다른 별개의 의미가 아니다.
연속적이고 영원히 이어지는,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였다.
이 죽음과 탄생, 소멸과 창조 사이를 이어 주는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달아야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융합된 12명의 동료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준혁은 즐거웠다.
“끝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