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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장. 던전-난타전#2-
이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느낌,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위화감.
그것을 인지한 것은 하늘이 까맣게 물든 자정이 지난 시점이었다.
싸움의 여파로 머리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때마침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하늘을 파랗게 비추고 있었다.
그 밤하늘 위에서도 싸움은 이어졌고, 어느새 새벽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준혁은 위화감을 확신했다.
싸움의 양상은 똑같았다.
파고들어 주먹을 날리고, 또 파고든다.
틈틈이 날아드는 카운터는 피했고, 기회가 있으면 카운터에 다시 카운터를 날려 보내기도 했다.
비슷한 역량이니 전개 상황에 따라 아예 피할 수 없는 공격도 있었다.
물론 일방적이지는 않다.
준혁이 맞을 때도 있지만, 던전이 맞을 때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똑같은데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뭐지?’
분명 싸움의 양상이 변하지 않는데도 무언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이 묘한 감각.
준혁의 계획으로 약해졌다고는 해도, 던전은 애초에 상식의 범위로 잴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렇게 약해졌는데도 준혁보다 강했다.
그럼에도 준혁이 비슷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심안’과 ‘탐색’이었다.
상대의 의도를 미리 보고, 힘을 어떻게 쓰는지 볼 수 있기에 비슷한 역량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위화감의 정체를 찾기 위해서는 결국 ‘탐색’과 ‘심안’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탐색’의 시야.
변함이 없다.
놈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에테르에는 변화가 없었다.
몇 번을 살펴봤지만 확실했다.
그렇다면 ‘심안’의 시야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없는데?’
없었다.
처음 싸움을 시작한 순간과 지금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놈이 피하는 간격도, 카운터를 치려고 기회를 엿볼 때 나타나는 잔상도, 회피와 방어를 고민하며 떠오르는 두 종류의 잔상까지.
모든 것이 똑같았다.
‘똑같은데 왜……. 아니, 잠깐!’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똑같을 수 있지?’
변화가 없다.
그게 말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 싸우면서 놈의 싸움 방식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점이었다.
당장 준혁만 해도 그렇다.
똑같은 인파이터 스타일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 내부적인 움직임마저 똑같을 수는 없다.
진화한다.
준혁 또한 절대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시스템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장치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것만 이용하면 일반적으로는 기적이라 부르는 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니 준혁은 진화한다.
이는 단순히 준혁에게만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장이다.
인간은 실전을 겪으면서 몸이 직접 경험을 쌓고, 그것을 인지하며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한다.
스포츠나 격투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반 사무직이나 영업직, 기술이 필요한 업무까지도 인간은 몸소 겪으며 성장한다.
준혁도 싸우면서 성장했다.
주먹을 뻗을 때 정타를 넣기 위해 다양한 고민을 한다.
에테르를 어떻게 사용할까, 어떤 식으로 페이크를 넣어 볼까, 변칙을 끼워 넣는 것은 어느 타이밍이 좋을까?
상대를 이기기 위해 하는 고민이고, 그것을 시도해 경험을 쌓고, 오류를 수정한다.
그 모든 과정이 성장이다.
게다가 이 싸움은 어마어마한 경험의 압축이다.
그런데 상대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준혁이 성장한 만큼 던전도 성장하고 변화가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미세하게 계속 변화하는 준혁을 상대하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던전의 성장 속도가 준혁의 성장 속도를 추월했다.
그렇기에 전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한 준혁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던전은 지금 준혁을 가지고 노는 셈이었다.
그리고 준혁의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던전의 얼굴에 지루한 표정이 떠올랐다.
“끝인가?”
“뭐?”
“이게 네 발전의 끝인가?”
그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준혁이 황급히 밀어 넣던 주먹을 빼려는 순간, 던전의 몸 주위에 있던 잔상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회수하는 주먹보다 더 빠르게 준혁의 품으로 파고드는 던전의 잔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까드드득!
준혁은 이를 악물었다.
‘못 피한다.’
빠아악!
던전의 주먹이 준혁의 배를 뚫어 버릴 기세로 파고들었다.
“끅!”
짧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준혁의 신형이 격렬하게 뒤로 밀려났다.
이번에도 그보다 빠르게 던전의 잔상이 따라붙었다.
콰앙!
정면에 에테르 막을 펼치며 양손을 내밀어 막았다. 하지만 던전의 주먹은 가드마저 뚫고 들어왔다.
빠바박!
정신없이 날아와 꽂히는 손발에 준혁은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변했다.
그때 주변에서 갑자기 에테르가 퍼지는 듯하더니 공간이 일그러졌다.
‘오지 마.’
흑호의 ‘도약’으로 공간이 열렸다는 것을 인지한 준혁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속에서는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엇!”
깜짝 놀란 준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김준석의 얼굴이 보였다. 유민섭, 최유나, 리쉬옌의 얼굴도 보였다.
“피해!”
기겁한 준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던전의 시선이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던전의 잔상이 김준석에게로 뻗어 가는 것도 보였다.
준혁이 황급히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빠악!
묵직한 소음과 함께 던전의 신형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아!”
준혁의 입에서 당혹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환수였다.
불쑥 튀어나온 환수가 던전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결국 사용했나?’
환계의 요구에 따라 스킬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징집’을 베이스로, 신수 다섯 마리를 합체시켰던 장치도 참고해서 만들어 준 스킬이었다.
하지만 저 스킬은 뒤에 올 부작용이 컸기에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했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은 자신의 당부가 틀렸다는 사실이었다.
부작용을 감수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는 스킬이었다.
던전은 그만큼 무서운 놈이었다.
그때 희미한 빛줄기가 날아들어 준혁의 몸을 감쌌다.
“얼른 일어나요.”
장민호의 ‘힐링’이었다. 물론 준혁이 손봐 준 아주 효과가 뛰어난 ‘힐링’이었다.
그 효과 덕분에 빠르게 몸이 회복됐다.
“얼른 가!”
짧게 한마디 던진 준혁이 빠르게 환수 옆에 섰다.
-결국 썼냐?
-저런 존재를 없애려면 어쩔 수 없었지.
-인정.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환수가 정면에서 압박하고, 준혁이 주변을 돌며 공격한다.
환수가 탱커의 역할을, 준혁이 딜러의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초월적인 두 존재가 협공을 펼치고 있는데도 던전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동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2 대 1의 상황인데도 우위를 차지했다.
쾅!
환수의 커다란 몸집이 뒤흔들렸다.
쩌억!
거센 충격에 준혁의 고개가 격하게 돌았다.
-어떻게 된 거지?
환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준혁에게 물었다.
-뭐가?
-분명 ‘힘’은 비슷한데 훨씬 더 강해졌다. 아까 보았을 때는 협공하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역부족이다.
-무시무시한 학습 능력이 있는 것 같더라고.
-반갑지 않은 이야기군.
빠바박!
던전의 주먹이 속사포처럼 준혁과 환수의 몸을 구타했다.
크허어어!
삐이익!
네 존재가 득달같이 던전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랑, 흑호, 백효, 적사였다.
하지만 네 마리 환수의 공격은, 던전의 움직임을 아주 잠깐 멈추는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싸움.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준혁이 일대일로 싸울 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았다.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티고, 어느 정도의 공방도 주고받았다.
하지만 결국 강렬한 한 방에 손해를 보는 것은 준혁과 환수 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웠을 때, 환수가 준혁을 향해 말했다.
-저 녀석들을 다오.
-음?
-너의 권속들.
-아니, 그건!
격렬하게 싸우는 중인데도 순간적으로 손을 멈출 정도로 준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은 주변에서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네 마리 환수에게서 먼저 나왔다.
-하십시오, 주인님!
-싫어도 방법이 없잖아?
-우리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배고파!
네 마리 환수는 준혁의 영향으로 여느 환수들보다 훨씬 더 강했다.
게다가 에테르를 사용한다.
저 네 마리가 환수와 합쳐진다면 분명 유의미한 효과가 있으리라.
하지만 부작용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다른 고민 할 때가 아니잖아, 주인 놈아!
흑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준혁도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후의 부작용을 고민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심각한 사치였다.
“큿!”
이를 악문 준혁이 네 마리 환수를 향해 장치를 던졌다.
‘징집’을 베이스로 만든 ‘융합’이었다.
과정이 길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해당 스킬을 가진 존재들이 대상을 떠올리고 동시에 ‘융합’을 사용하면 된다.
지잉-!
가벼운 떨림과 동시에 다섯 존재가 순식간에 한데 뭉쳤다.
환수의 외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연기로 이루어진 짐승의 형태였다.
하지만 내뿜는 힘은 확연히 달랐다.
크허어엉-!
길게 내지른 포효와 함께 휘두른 앞발이 던전의 몸뚱이를 묵직하게 후려쳤다.
파고드는 속도도, 휘두르는 힘도 직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당연히 던전의 반응도 달랐다.
황급히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한참을 옆으로 튕겨 날아간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준혁이 황급히 놈을 쫓았다.
손에는 에테르로 빚어 낸 육모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빠박!
휘두른 육모방망이가 놈의 몸뚱이를 두드렸다.
환수에게 맞은 충격에 순간적으로 내부가 뒤흔들린 놈은 반응하지 못했다.
뒤이어 환수가 달려들었다.
크게 벌린 입 속에서 에테르로 빚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을 내뿜는다.
으득!
세차게 물어뜯는 순간 뼈가 으스러지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그리고 들려온 것은 경악에 찬 환수의 외침이었다.
으스러진 것은 환수의 송곳니였다. 정확하게는 으스러진 게 아니라 흩어졌다.
놈의 몸을 감싼 빛이 환수의 이빨을 흩어 버렸다.
준혁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 언제?”
놈의 몸속에서 하나둘 새로운 에테르 입자가 생성되고 있었다.
던전히 한층 강한 빛을 내뿜으며 물었다.
“내가 왜 너와 장단을 맞추며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나?”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놈은 스스로 성장한 끝에 진작 준혁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적당히 준혁의 공격에 맞춰 주며 시간을 끌었다.
희롱.
아니다.
놈에게 상대를 얕보고 가지고 논다는 식의 유희와 같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놈의 몸속에서 하나둘 자리 잡고 있는 에테르 입자를 만들 시간.
준혁의 ‘와해’를 배출하기 위해 버렸던 장치들.
그 장치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던 빈껍데기 장치들.
시간을 끌며 그 장치를 복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혁이 펼치고 있는 ‘탐색’마저 피한 상태로.
그것을 확인한 준혁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괴물.”
배면계에서 복귀한 후 준혁은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뒤이어 준혁의 가슴팍에 묵직하게 얹힌 것은 절망이었다.
하지만 절망에 빠질 여유조차 없었다.
크허어엉!
길게 내지른 포효와 함께 환수가 다시 던전에게 달려들었다.
환수의 몸뚱이는 연기와 같은 영력에서 빛의 입자인 에테르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탐색’으로 보는 준혁의 시야 속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보였다.
환수는 자신의 존재를 태우며 던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준혁에게 말했다.
-방법을 만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