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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장. 던전-난타전#1-
“그런데!”
“음?”
“네가 말한 너를 들여다봤다는 그 존재가 혹시 인간이었냐?”
“그건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지금 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랬군.”
“어, 그랬지.”
평온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준혁과 던전이 떠 있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두 존재의 싸움으로 인한 힘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하늘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 격렬한 싸움 중에 평온한 대화가 이어지는 상황.
“자존심도 없나 봐?”
준혁이 주먹을 뻗으며 질문을 함께 던진다.
“자존심?”
준혁의 주먹이 들어오는 궤적에 손바닥을 밀어 넣으며 던전이 되묻는다.
“시스템씩이나 돼서 인간의 형태로 실체화한 거 말이지.”
“그런 무의미한 감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뻗어 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받으려던 던전의 손이 슬쩍 내려간다.
손목으로 뻗어 오는 주먹을 받아 올리며 그대로 손목을 꺾어 준혁의 팔꿈치 안쪽을 내리누른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손을 빼며 오히려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곧장 날아든 것은, 백스핀을 잔뜩 머금은 채 안면으로 돌아 들어오는 준혁의 팔꿈치.
던전의 상체가 뒤로 꺾이다 자연스레 하체가 앞으로 향하고, 그 힘을 그대로 실어 준혁의 겨드랑이로 발을 차올렸다.
휭, 파앙!
타깃을 잃은 에테르가 수직으로 솟구치더니 이내 거대한 압력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준혁은 여전히 앞으로 나갔다.
주먹을 뻗고, 팔꿈치를 휘두르고, 무릎을 세우는가 하면 머리로 들이받기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던전은 정확하게 반보 거리만큼 몸을 물렸다.
끝없는 공방.
준혁은 끊임없이 몰아쳤다.
던전은 정확하게 반걸음 거리를 유지한 채 준혁의 공격을 받아 흘려 냈다.
한쪽만 공격하고, 한쪽만 피하는 것은 또 아니다.
던전은 기회가 올 때마다 카운터를 시도했고, 준혁은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카운터를 절묘하게 받아 내며 역으로 카운터를 날렸다.
복싱으로 치면 준혁은 인파이터, 던전은 아웃 복서였다.
비슷한 역량에 절대 지치지 않는 체력을 지닌, 그런데 정확하게 반대되는 스타일을 가진 두 복서가 싸운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끝이 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시합은 사용하는 스타일의 우열이 아닌 두 복서의 역량을 겨루는 시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싸움은 끊임없이 하늘을 두드렸고, 그 폭력적인 충격을 고스란히 받는 하늘은 점점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
“비켜!”
짧게 던진 말속에 담긴 것은 차가운 살기였다.
표정이 존재하지 않는 얼굴 위에 서린 섬뜩한 감정은, 그 앞을 막고 있는 환수마저도 반사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게 할 정도였다.
스르릉!
맑은 쇳소리와 함께 한 자루 장검이 새하얀 칼날을 드러냈다.
장검을 쥔 이는 최유나였다.
새하얗게 빛을 머금었던 또 다른 무기 하나가 대도로 변했다.
최유나 옆에 선 김준석이었다.
그 둘만이 아니다.
리쉬옌, 유민섭, 강이찬, 장민호, 강태웅, 백호진, 양태군, 리처드 개런, 릴리안 우드, 리아 클레르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막아선 환수들을 노려보았다.
크르르르!
청랑은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며 헌터들을 막아섰다.
그 옆에는 흑호가 거대한 발톱을 빛내고 있었고, 허공에는 백효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호버링을 유지하며 헌터들을 감시했다.
-청랑아, 비키자. 응?
김준석이 달래듯 말을 걸었다.
준혁이 건네준 ‘텔레파시’ 스킬은 환수와 대화도 가능한 수준이었기에 말을 걸 수 있었다.
-안 됩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는 주인님의 명령입니다.
흑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너희가 도움이라도 될 것 같냐? 방해만 안 되어도 다행이지.
콰르르릉!
어두운 밤하늘이 또 한 번 거친 포효를 흩뿌렸다.
밤을 절반이나 지난 지금까지 준혁과 던전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배면계를 겪고 돌아온 10명과 던전 관리자였던 2명은 현재 준혁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결과를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싶었다.
쩌정!
청랑과 흑호가 에테르를 뿜어내며 위협적으로 한 발 나섰다.
-절대 안 됩니다.
-말하지 않았나? 너희는 가 봐야 방해만 될 뿐이라고.
청랑과 흑호가 한마디씩 던졌을 때 최유나가 다시 한 걸음 나섰다.
-목숨, 건다.
-뭐?
-방해되면 죽겠다.
-미친!
흑호가 버럭 화를 내며 한마디 뱉었다.
하지만 그다음의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최유나의 눈에 떠오른 빛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르르!
흑호의 으르렁거림이 한층 낮아졌다.
-진짜 미쳤군.
그리고 ‘진짜 미친’ 사람은 최유나만이 아니었다.
-내 동생이다. 형이 동생을 안 구하면 누가 구하나? 혁이한테 방해가 되는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 버릴 테니 이제 비켜.
화들짝 놀란 청랑이 황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작은 주인님을 생각…….
김준석의 대답은 명쾌했다.
-안 죽으면 되잖아!
어차피 설득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억지를 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딸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동생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나도 걸어요.
-내 목숨값이 좀 비싼데 이럴 때 걸어야 될 것 같네.
저마다 한 소리씩 하며 흑호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딘다.
김준석이 한층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흑호야, 열어.
이들에게는 ‘게이트 오픈’이 있었다. 그런데도 준혁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흑호 때문이었다.
준혁이 지인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흑호에게 ‘게이트 오픈’을 막는 스킬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가장 선두로 나선 최유나와 흑호 사이에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흑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흑호의 눈에는 보였다.
단단한 듯하지만 잘게 떨리고 있는 최유나의 눈동자가 명확하게 보였다.
저 눈은 분명 겁을 먹고 있는 눈이었다.
그럼에도 싸우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저러는가.
흑호는 준혁과 계약으로 묶인 주종 관계였다.
환계와 배면계 사이에 맺어진 법칙에 의해, 계약을 맺는 순간 자연스럽게 종속된다.
그렇기에 흑호가 준혁에게 가지는 충성심은 일종의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아니다.
아니, 모든 인간은 그렇지 않다.
본능처럼 따르게 되는 종속적인 관계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제 목숨까지 걸면서 돕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최유나는 그것을 하겠다고 한다.
최유나만이 아니다.
지금 나선 모든 인간이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공포를 향해 걸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터벅!
한참 동안 최유나와 눈싸움하던 흑호가 무심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잉!
동시에 사람들을 가두고 있던 일종의 결계가 사라졌다.
커엉-!
깜짝 놀란 청랑이 흑호를 향해 크게 짖었다.
하지만 흑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말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이들과 같은 생각이다. 여기 있느니 차라리 올라가서 주인님을 돕겠다.
두 환수는 태생이 다르다.
늑대, 개과인 청랑의 충성심은 매우 맹목적이다.
하지만 호랑이, 고양이과인 흑호는 개과와는 다른 변덕이라는 특성이 있었다.
크르, 크르륵!
청랑이 이빨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런 청랑에게 불쑥 다가간 것은 김준석이었다.
-포기해.
김준석의 목소리는 매우 단단하게 변해 있었다.
절대 말릴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흑호가 결계를 해제한 이상 청랑은 ‘게이트 오픈’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내가 문을 열…….
흑호가 ‘도약’을 펼치려 할 때였다.
-우리도 함께 간다.
갑자기 허공에서 불쑥 무언가 나타나 바닥에 착지했다.
-아니!
깜짝 놀란 것은 흑호와 청랑, 그리고 백효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진 존재는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하지만 익히 아는 상대이기도 했다.
환수였다.
그런데 환계에서 보았던, 굉황과의 싸움에서 헌터들을 등에 태우고 다녔던 그 환수가 아니다.
흰색에서 붉은색으로, 다시 푸른색이나 녹색, 노란색 등등 쉴 새 없이 색깔이 바뀌는 연기로 만들어진 짐승이었다.
정확하게는 연기가 아닌, 짙은 영력으로 빚어진 짐승.
네 개의 발과 거대한 날개가 달린 환수.
-왜 그런 결정을!
흑호가 기겁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답하는 환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놈은 대원칙을 건드리려 한다.
-대원칙?
-인간과 법칙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 대화에서 법칙이 대원칙을 건드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만약 그 일이 진짜 일어난다면, 그것은 환계에도 생각지 못한 위험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 그것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할 수밖에.
-큭!
흑호가 와락 인상을 구기는 사이, 환수가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인간들, 너희는 날 수도 없으면서 무슨 수로 저 하늘 위의 인간을 돕겠다는 거지?
그제야 헌터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문제가 있었다.
아까는 환수를 타고 움직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시적으로 힘을 빌려주지.
말을 마친 환수의 몸에서 12줄기의 영력이 날아가 각 헌터의 등에 맺혔다.
“어, 어어!”
강이찬이 화들짝 놀라 제 등을 살폈다.
그의 등에는 영력으로 빚은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환수가 설명을 더했다.
-그것을 통해 하늘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허, 허허!”
유민섭이 기가 찬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에 따라 유민섭의 등에 달린 영력의 날개도 슬쩍 펄럭이며 어깨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그때 강이찬이 더 일찍 했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
정황상 환수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 자신들을 등에 태웠던 환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청랑이나 흑호와 비교해도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없는 형태였다.
환수는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와 함께 싸웠던 각각이 하나가 되었다.
-뭐? 그런 것도 가능해?
-우리는 일족의 왕이 일족을 품어 그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
‘징집’이었다.
-그렇게 일족을 품은 왕들이 다시 하나의 개체가 되었다.
-뭐? 그런 게 가능해?
-원래는 가능하지 않았지. 우리의 부탁으로 인간이 만들어 준 기술이다.
‘징집’은 왕이 자신의 일족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서로 다른 종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환계의 법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준혁에게 부탁해 그 스킬을 만들었고, 던전과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생각에 사용한 것이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해서 준혁이 형님을 도와줬으…….
강이찬이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려 했지만, 환수가 바로 그 말을 잘랐다.
-우리도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신중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닐 텐데?
환수의 말에 화들짝 놀란 강이찬이 흑호를 향해 외쳤다.
-문 열어!
-이미 열었다.
그 말대로 한쪽 공간이 일그러진 채 헌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최유나였다.
“가.”
늘 그랬듯 짧디짧은 한마디와 함께 빠르게 몸을 날렸다.
사람들도, 남아 있던 환수들도 모두 ‘도약’으로 준혁의 전장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도약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모두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꽈광!
만신창이가 된 준혁이 던전에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야이 개새끼야!”
버럭 소리를 내지른 김준석이 던전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