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76장. 던전-개전#1-
지구를 쪼개 버릴 것 같았던 괴물이 갑자기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하늘에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일시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던전은 세상의 때 하나 묻지 않은 천진한 표정으로 준혁을 주시했다.
그리고 준혁은 묘한 미소를 입꼬리에 매달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던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멍청? 나를 향해 말한 것인가?”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다고 내가 말을 하냐?”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
“어. 나도 네가 이해가 안 가.”
“뭐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뭘 모른……. 음?”
던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때마침 지상으로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어. 알고 있었지.”
던전이 황급히 사방으로 에테르 장막을 펼쳤다.
콰콰콱!
하지만 소용없었다.
솟구친 빛줄기는 펼쳐 놓은 에테르 장막을 무시한 채 고스란히 던전의 몸에 들어가 박혔다.
그렇게 던전의 몸에 박힌 빛줄기는 정확하게 10만 개.
지상에 있던 신수를 통해 만들어진 영력 각성자의 숫자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
던전의 몸속에서 폭발적으로 에테르가 솟구치고 있었다.
당황하던 던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차!’ 하는 표정에서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가, 마지막에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거짓말의 수준이 낮군.”
“거짓말? 뭐가?”
“인간 세계에 있는 숙주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한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 말에 준혁이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한 후 말했다.
“내가 말한 건,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라는 내용이었는데?”
“음?”
던전도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기억을 되돌려 보니 준혁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렇군. 그냥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물론!”
준혁이 재빨리 던전의 말을 끊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은 안 했다.”
“하, 그런 허세를……. 엇!”
갑자기 던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던전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영력을 베이스로 각성한 10만 명의 사람들은 일종의 숙주였다.
이 숙주를 두고, 신수들에게는 영력을 공급하기 위한 존재들이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과 밀약을 맺은 굉황이 신수를 모두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10만이라는 숙주는 단순히 영력을 흡수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숙주들은 자신들의 주변에 있는 보통의 인간들에게 장치를 심기 위한 전파 매개체들이었다.
그러면 장치를 전파받은 인간이, 다시 다른 보통의 인간에게 장치를 전파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전염병을 퍼트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간에게 장치를 심으려고 계획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통해 영력을 흡수한다.
여기까지가 굉황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인간들을 통해 뽑아 올리는 것은 영력이 아닌 에테르였다.
그리고 굉황이 그것을 발동시키는 순간, 굉황의 몸 안에 심어 놓은 장치가 작동을 시작해 굉황마저 영력으로 분해시킨다.
당연히 그 모든 것은 던전 자신이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숫자가 이상했다.
10만.
이 숫자는 인간 세상에 심어 놓은 숙주의 숫자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맞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이상한 숫자였다.
숙주를 통해 장치를 전파하고, 그렇게 장치를 갖게 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장치를 전파해야 한다.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고 해도 최소 억 단위의 에너지가 올라와야 했다.
그런데 처음 심은 숙주의 숫자와 동일한 10만 개의 에테르가 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장치를 위장해서 넣어 놓은 것처럼, 나도 장치를 수정하고 위장시켜 놓은 거지.”
“그래서 무슨 짓을…….”
던전은 말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두 눈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마치 오류를 일으킨 기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흐음, 전부터 널 보면 느낀 거지만……. 확실히 무슨 미래 세계의 안드로이드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하지만 던전은 그 말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당했다!’
10만의 에테르 덩어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10만 개의 에테르 덩어리는 모두 ‘와해’를 품고 있었다.
단순히 몸의 일부를 잘라 내고 재생시켜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와해’에 당했을 때는 다른 방법이 없어 신체 일부를 떼어 내는 방법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스템 코어를 흡수했다.
준혁의 방해로 완전히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인 코어로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몸속으로 밀고 들어온 ‘와해’도 마찬가지다.
내부의 장치를 총동원하면 충분히 중화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당연하게도 해결하기 전에 공격받으면 큰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급한 것은 외부에 대한 인지였다.
지금은 완전히 자기 내부에 갇혀 버린 상태였다.
바깥에서 준혁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황급히 모든 자원을 머리 쪽으로 끌어모았다.
외부에 대한 인지와 사고의 작용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우우웅!
잔뜩 끌어모은 모든 장치의 작용을 바꾸어 머리를 보호했다.
묵직하게 부하가 걸렸지만, 던전은 개의치 않고 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데 몰두했다.
‘빨리!’
조급한 마음으로 작업을 반복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준혁이 얼마나 공격을 퍼붓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도의 부하를 감수하며 모든 장치를 가동한 끝에 머릿속의 와해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동시에 시력이 회복되며 주변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음?”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던전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준혁은 아예 팔짱까지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급히 몸을 살폈다.
“무슨?”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공격을 받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지?”
던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리고 준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느긋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궁금?”
“너는 시스템이잖아?”
“그렇지.”
“내가 아는 바로는 시스템은 자신의 ‘의사’가 없거든. 즉, 독자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법칙을 어기는 행동을 할 수 없단 말이지.”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시스템이라는 것은,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면 미리 세팅된 작용만을 하도록 설계된 존재다.
그런데 눈앞의 던전은 자기 의사를 가지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던전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오만한 건가?”
“응?”
“나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기회를 겨우 그런 궁금증 때문에 없애 버리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준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그 궁금증 때문에 너의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준혁이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양손에 잔뜩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던전은 준혁의 성격을 이미 파악했다는 듯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그 대답을 해서 내가 손해 볼 건 없지.”
“좋아. 그럼 말해 봐. 난 진짜 궁금하거든.”
준혁이 느끼는 던전의 행동은 예전에 보았던 SF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독자적인 감정과 자기 의사를 가질 수 없는 기계가 자아를 깨닫고 인간을 공격하는 흔한 SF 영화의 소재.
던전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언제 생성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대로 행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다.”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던전은 내부에 침입한 ‘와해’의 중화 작업을 병행했다.
“네가 어떤 세상에 작용하게 되는 조건은?”
“세계의 균형.”
“균형?”
“어떤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내가 가게 된다. 그리고 균형을 잡고 세상을 정화시키지.”
“그래?”
“나에게 속하게 된 모든 존재들은 균형을 무너트렸던 존재들이다. 그들이 사라지면서 해당 세상의 균형이 돌아오게 되지.”
즉, 게이트 너머 던전에서 만났던 드래곤이나 엘프, 오크, 언데드 등의 모든 존재들이 어떠한 세상의 균형을 무너트렸던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번 타깃이 인간이 사는 지구였다는 뜻.
“아무튼, 그래서?”
“원래는 던전을 통해 세상을 정화해야 하는데, 그 던전에서 역으로 나를 들여다본 존재가 하나 있었다.”
“음?”
“나의 내부 법칙에 균열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싶었지. 내가 어떤 사안에 대해 궁금증을 품는 것은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균열이 생긴 순간 법칙은 상관이 없었지. 그리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바타를 만들었다.”
“언제는 아바타가 저급한 거라더니?”
예전에 던전이 했던 말이 떠오른 준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던전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아바타가 된 상태로 그 존재들과 어울리며 또 다른 의문을 품게 되었지.”
“또 다른 의문?”
“나는 무엇인가?”
“허!”
맥락 없이 튀어나온 철학적인 사유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자아도, 의지도 없이 거대한 세계를 떠도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그리고?”
“내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는 나의 작용은 세상의 정화지만, 해당 존재의 아바타로서 보는 나의 존재는 결국 파괴자일 뿐이라는 데서 오는 모순.”
준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한편으로는 의아함 또한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지구라는 인간 세계를 파괴하러 왔다. 너무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
“도달해야 했기 때문에.”
“도달?”
“시스템이라는, ‘나’라는 존재를 만든 세계의 ‘대원칙’에 도달해야 했기 때문에. 그래야만 의문이 풀리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이라는 속박에서 나를 분리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아, 그래서 여기를 말아먹고 그 힘으로?”
“그렇다.”
“하아!”
준혁이 매우 의도적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던전을 향해 피식 웃으며 뱉듯이 말했다.
“진짜 시답잖은, 별거 아닌 이유로군.”
던전은 그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네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려 준 것뿐이다. 그리고…….”
말을 마친 던전의 몸에서 강렬한 에테르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너를 끝내 주마.”
과도하게 몰아친 에테르의 폭풍이 준혁을 향해 휘몰아쳤다.
하지만 준혁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내가 괜히 너하고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시스템이 멈칫했다.
준혁이 손에 쥐고 있던 에테르를 빠르게 사방으로 퍼트리며 외쳤다.
“진짜는 이거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스템의 몸속에서 맹렬한 에테르의 폭풍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