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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장. 굉황-격전#2-
대한민국 서울의 서쪽 끝은, 김포공항 너머의 김포평야 어림이다.
그리고 동쪽 끝은 하남시 미사리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서쪽과 동쪽 끝의 두 점을 이은 거리가 채 40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굉황의 몸길이는 무려 50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집채만 한 어떤 것이라는 식의 표현은 가져다 댈 수도 없다는 뜻이다.
몸길이가 50킬로미터면 뱀과 같은 그 몸통의 길이는 또 어떨까?
기본 단위가 킬로미터 단위다.
그런 굉황의 몸뚱이를 공격하는 일은, 거대한 산을 공격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산이면 차라리 낫다.
지금 굉황을 공격하는 혼원 길드의 10개 팀이 힘을 합하면 산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굉황의 몸뚱이는 그렇지가 않았다.
쾅, 쾅, 쾅, 쾅!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각자 들고 있는 무기에 응집된 에테르는 건물 하나쯤은 단번에 무너트릴 정도의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굉황의 몸을 뒤덮고 있는 비늘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술법, 혹은 마법을 가진 헌터들의 공격 또한 일점사로 한 점을 집중적으로 두드렸다.
당연히 그들을 등에 태우고 있는 환수들 또한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여전히 결과는 없다.
이들이 내지르는 모든 공격에 ‘영력 분해’라는 패시브 스킬이 담겨 있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개인의 생각은 이미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지휘를 맡고 있는 유민섭과 양태군 두 사람의 명령에만 의지해 손발을 휘두른다.
-1, 3, 4, 7팀 강하!
-4, 9팀 후퇴.
유민섭과 양태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개의 팀이 빠르게 위치를 바꾼다.
동시에 커다란 압력이 바람을 일으키며 일대를 휩쓸었다.
굉황의 몸부림이었다. 그 탓에 굉황의 몸뚱이가 요동쳤다.
이는 거대한 산이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당황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유민섭과 양태군, 그리고 준혁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굉황의 몸부림이 멈추자 10개 팀은 다시 자리를 잡고 공격을 퍼부었다.
‘저거 아무래도?’
‘그렇죠?’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동감합니다.’
굉황을 목격한 순간 유민섭과 양태군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저 정도로 큰 괴물을 상대하는 데는 전략이니 전술 같은 게 필요 없었다.
준혁이 괴물의 머리 쪽에서 싸우고 있기는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에 연계를 한다거나 따로 전술을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세울 수 있는 공략법은 딱 하나였다.
저 괴물의 유일한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바로 저 거대하기 짝이 없는 덩치가 약점이었다.
놈의 몸에 비하면 인간의 크기는 먼지보다 작았다.
그 공격을 놈이 일일이 반응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몸에서 돋은 촉수 같은 작은 굉황들이 있었지만, 환수와 연계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공략법은 ‘닥치고 일점사’였다.
그렇게 일단 한 점을 뚫으면 속살이 드러날 것이고, 그 속살에 공격을 퍼붓는다는 계획이었다.
이들의 공격에는 ‘영력 분해’라는 패시브 스킬이 얹혀 있었다.
그것을 놈의 내부로 밀어 넣으면 무엇이든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민섭과 양태군이 하는 일은 굉황의 움직임 전체를 살피는 것이었다.
몸통의 앞뒤를 살피면 공격하고 있는 지점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미리 예측이 가능했다.
그것을 통해 미리 피하거나 다가가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한참 공격을 들이부었을 때였다.
쩌적, 펑!
굉황의 비늘 한 장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폭딜!”
신이 난 양태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고, 혼원 길드의 헌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테르를 쏟아부었다.
-배고파아!
-시끄러!
-배고파!
흑호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청랑은 백효와, 흑호는 적사와 듀오를 꾸렸다.
청랑과 백효는 굉황의 목 어림을 공격했고, 흑호는 적사를 목에 감은 채 꼬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흑호는 적사를 이대로 씹어 삼키는 게 낫지 않을까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배고파!
늘 그렇듯 적사는 같은 말만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혼원 길드 헌터들이 공격하고 있는 몸통의 중간 지점을 지나, 더 뒤쪽으로 날아가려던 때였다.
-적사.
-배고파!
-인간 세상에 그런 말이 있더군.
-배고파!
-용서가 허락보다 쉽다.
-배고파!
-오늘 널 씹어 먹고 주인님의 용서를 받겠다.
-배…….
조용해졌다.
-이 뱀 새끼, 역시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아니었네. 지금까지 말을 다 무시하는 거였어.
흑호의 온몸에서 발출된 섬뜩한 살기가 적사를 향해 엄습했다.
바짝 긴장한 적사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는 순간.
-윽! 이거 안 푸냐!
흑호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적사는 흑호의 목에 감겨 있었고, 몸에 힘을 주니 저절로 흑호의 목을 죈 것이다.
-배…….
-진짜 용서받는 일 벌이는 수가 있다!
적사는 완전히 침묵했다.
그리고 때마침 굉황의 꼬리 어림에 도착했다.
흑호의 방식으로 서너 번만 더 허공을 딛고 달리면 도착할 거리.
그런데 그 순간 적사가 화살처럼 허공을 날았다.
-엇, 아직!
당황한 흑호가 뭐라 외치는 사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적사의 몸이 빛을 뿜으며 거대하게 변했다.
키하아아-!
적사는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내뱉으며 거대해진 몸으로 굉황의 꼬리를 향해 날았다.
굉황은 용이다.
그리고 용의 몸은 뱀과 같다.
즉, 꼬리로 갈수록 그 두께가 점점 가늘어진다.
물론 굉황 정도 되는 거대한 크기라면 가늘어진 꼬리라도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하다.
하지만 적사 또한 거대하게 몸을 바꾸었다.
굉황의 꼬리 정도라면 충분히 휘감을 수 있었다.
휘리릭!
굉황의 꼬리 쪽에 돋아 있던 작은 굉황들이 적사를 보자마자 흥분해 달려든다.
하지만 적사는 개의치 않았다.
쉬리릿, 콰득!
미끈한 소음과 함께 적사의 붉은 긴 몸뚱이가 굉황의 꼬리를 휘감았다.
그 과정에서 작은 굉황들이 그대로 터져 나가며 연기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꼬리 방향으로 몸을 휘감고, 고개를 격하게 꺾어 굉황의 꼬리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린다.
어찌나 크게 벌렸는지, 얼굴이 위아래 두 갈래로 쪼개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그리고 마침내 위와 아래를 닫았다.
-엇, 설마?
그 광경을 바라보는 흑호의 두 눈에 선명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따악!
-배고파아…….
목소리가 애처롭다.
흑호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참으로 궁금한 순간이었다.
적사의 이빨은 1밀리미터도 박히지 않았다.
이빨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아, 이 멍청한 뱀 새끼. 신나서 뛰쳐나갈 때 알아봤다.
원래는 흑호가 먼저 나서기로 했었다.
그런데 적사가 천지 분간 못하고 무작정 달려든 것이었다.
탁!
굉황의 꼬리에 착지한 흑호의 앞발이 날카롭게 발톱을 세웠다.
에테르를 머금고 섬뜩한 기운을 품은 흑호의 발톱이 굉황의 단단한 비늘을 후려친다.
쾅, 콰쾅!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비늘의 바깥쪽을 두드렸는데, 폭음은 비늘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쾅, 콰콰쾅!
흑호의 스킬 ‘침투’였다.
백효가 정찰에 특화되었다면, 흑호는 암살에 특화된 환수였다.
‘침투’는 어떤 사물의 겉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타격하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지금 준혁에 의해 그 효용이 업그레이드된 상태.
흑호가 쉴 새 없이 ‘침투’를 밀어 넣는다.
가만히 맞고 있을 굉황이 아니었다. 사라졌던 작은 굉황이 새롭게 돋아나 흑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텁, 터텁!
하지만 돋아나는 족족 적사가 기다렸다는 듯 작은 굉황들을 그대로 삼켜 댔다.
그리고 작은 굉황은 영력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미친 듯이 집어삼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적사.
한 번 삼킬 때마다 적사의 몸이 붉게 빛나며 몸집이 자꾸만 커져 갔다.
준혁의 시스템 영향으로 에테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영력 덩어리를 삼키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력을 사용할 당시에도 마나를 사용하는 괴물을 삼키고 성장했던 적사였다.
즉, 적사는 무엇이든 집어삼키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흑호가 괜히 돼지뱀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콰자자자작!
쉴 새 없는 폭발에 굉황의 비늘이 마침내 터졌다.
-적사!
이제야말로 진짜 적사의 시간이었다.
-배고파아아아!
적사가 정말 하기 싫다는 듯 앙탈 섞인 외침을 토했다.
그러면서도 비늘이 깨지면서 드러난 굉황의 속살을 향해 머리를 뻗었다.
푸욱!
수평이 되도록 주둥이를 벌린 적사의 위아래 이빨이 그대로 굉황의 살점에 박혔다.
그리고.
콰아아아아-!
거대한 빛이 적사의 이빨을 통해 굉황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거대한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 뱀의 몸뚱이.
그 끝에는 인간의 몸에 굉황의 얼굴이 달린 용 대가리들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매달려 있었다.
그 수백의 용 대가리가 준혁 한 명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빽빽하게 감싸고 있는 탓에, 포위망 내부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흑의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분명 포위 공격이었다.
용 대가리들은 도망갈 틈까지 막고 파상공세를 펼쳤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포위당한 준혁이 훨씬 더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여덟 방향에 위아래까지 해서 모두 열 줄기의 공격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준혁을 때리지 못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달려드는 용 대가리들을 두드렸다.
준혁은 탐색으로 영력의 흐름을 살피고, 심안으로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다.
기운의 흐름이 보이고, 행동이 완벽하게 눈에 보이는 상황이니 한 대라도 얻어맞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처럼 ‘쌍생상사’는 사용하면 좋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이놈들은 각자가 개개의 용 대가리가 아닌, 모두 굉황의 몸이기 때문이었다.
“망할! 질리지도 않냐!”
달려드는 용 대가리 다섯을 한 번에 터트린 준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터트려도 다시 용 대가리가 재생되는 탓에 진도가 나가지가 않았다.
싸움에는 도가 튼 준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일이 신이 나도 이렇게 끝없는 반복 작업에는 질릴 수밖에 없었다.
“가망 없는데 적당히 좀 하지?”
준혁이 다시 한 번 말해 보지만, 굉황이 그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싸움을 길게 끌고 가 준혁을 지치게 만들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화룡연무!”
“뇌호강전!”
틈틈이 술식까지 불러내 가며 포위망을 뚫어 보려 하지만, 굉황의 재생 능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준혁이 날려 버린 용 대가리만 해도 벌써 1,000에 가까웠다.
하지만 죽일 때마다 다시 재생되는 용 대가리는 끝이 없었다.
-이대로 말려 주마!
자신의 방법이 통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굉황의 득의만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럴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 크아아악!
굉황이 갑자기 비명을 터트렸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도살자!
준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 갑자기 준혁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준혁을 포위하고 있던 용 대가리들이 갑자기 물러간 것이었다.
“드디어 됐군!”
준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굉황의 얼굴 거죽 속에서 강렬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멈춰…….
굉황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굉황의 몸뚱이 표면에 마치 금이 가듯 새하얀 균열이 생겼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강렬한 빛이었다.
-오늘 완전히 죽여 주마!
퉁!
가볍게 허공을 박찬 준혁의 신형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푸우우욱!
무상곤이 굉황의 이마에 박혔다.
과아아아앙-!
텅 빈 하늘에, 절대 생길 수 없는 메아리를 일으킬 정도로 드센 폭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