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74장. 굉황-전초전#1-
“음…….”
혼원 길드의 회의실.
준혁과 10명의 배면계 경험자, 그리고 릴리안 우드에 리아 클레르까지 모두 13명이 앉아 있는 회의실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팔짱을 끼고 앉아 눈을 내리깐 채, 가끔 입술을 씰룩이거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니, 그중에 딱 한 사람, 준혁만이 혼이 가출한 표정으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코스, 조스, 호스.”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말을 한 사람은 강이찬이었다.
“뭐라고?”
강태웅이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코스, 조스, 호스요.”
“그게 뭔데?”
“시스템을 운영체제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면 OS잖아요. 그러면 김준혁 OS가 되니까, 김의 KIM에서 K를 따서 KOS 코스.”
“설마 조스는 준혁의 J를 따서 JOS인 거냐?”
“당연하죠. 뭐, 호스는 말 안 해도 알겠죠?”
“허이구!”
강태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유민섭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각!”
“아, 왜요? 좋잖아요.”
“너무 촌스러워.”
“그럼 민섭이 형이 해 보시죠?”
“신배면계 시스템이라고 하자.”
강이찬이 작정했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기각!”
“왜?”
“너무 길어요.”
결국 참지 못한 준혁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들아! 그게 도대체 왜 중요한 건데?”
사건의 발단은 강이찬이었다.
‘준혁 형님, 시스템은 뭐라고 불러야 하죠?’
‘없는데?’
‘아, 왜요?’
‘꼭 있어야 하냐?’
‘당연하죠.’
‘당연?’
‘배면계 거는 배면계 시스템이라고 불렀고, 던전은 던전 시스템이라고 불렀죠? 그런데 거기에 던전 시스템이 사람이 되었는데 그놈도 시스템이라고 부르잖아요. 이거 무슨 개나 소나 시스템… 이 아니고, 아무튼 죄다 시스템. 헷갈리니까 이름을 정해서 불러야죠.’
그래서 갑자기 준혁이 소유한 시스템의 이름 짓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두 번의 기각, 아니 준혁의 의견까지 묵살당하면서 세 번의 기각이 발생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은 침묵에 잠긴 채 고민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십니까?”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세계에 10만의 영력 각성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다시 1개월이 흘렀다.
10만의 각성자 소식 외에는 세상은 조용했다.
아니, 정확하게 세상이 조용하지는 않았다.
던전과 각성자가 사라지면서 무너진 산업 구조 재건에 세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혼원 길드에게는 매우 조용한 한때였다.
영력 각성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준혁은 매우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의 하루는 훈련과 휴식만 반복하는 매우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그때 홀로 한참 고민하던 김준석이 불쑥 말했다.
“신시스템, 뉴시스템, 뉴시스. 이런 건 어떻습……. 아, 아닙니다.”
날카로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김준석이 알아서 찌그러진다.
그리고 결국 참다못한 준혁이 책상을 탕 두드리며 외쳤다.
“내 거는 그냥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그 망할 놈은 그냥 ‘던전’이라고 불…….”
“기각!”
강이찬이 용감하게 첫 번째로 기각을 부르짖었고, 다른 이들 역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한 건 준혁이었다.
“애초에 내 건데 내 맘대로 이름도 못 지어……. 아니, 이게 아니지. 부를 일도 거의 없는데 도대체 이름이 왜 필요한 겁니까? 됐고, 원래 회의 안건으로 돌아가요.”
그랬다.
원래 시스템의 이름을 정하기 위한 회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안건이 있다고 하기도 애매하기는 했다.
이제부터 뭘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아니, 이름이라는 게…….”
강이찬이 끝까지 들러붙어 보았지만 정신을 차린 준혁은 넘어가지 않았다.
“일단 서로의 전력부터 확실하게 이야기해 봐야겠습니다. 저쪽은 현재 ‘던전’과 ‘신수’라는 두 개의 전력입니다.”
준혁은 매우 자연스럽게 저쪽의 이름을 ‘던전’으로 확정했다.
그것을 눈치챈 강이찬이 뭐라 한마디 하려 했지만, 날카로운 준혁의 눈빛에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던전은 이후에 만나 봐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뭐, 엄청 강해지기는 했겠죠. 일단 그 문제는 그때 생각하고…….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건 신수입니다.”
유민섭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효과가 있을까요?”
“어떤 효과요?”
“신수가 거의 70마리 정도 남았다면서요? 근데 영력 각성자는 겨우 10만입니다. 적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신수 하나가 가지는 힘을 생각하면, 10만 명에게서 영력을 찔끔찔끔 받아 간다고 갑자기 강해질 거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충분히 품을 만한 의문이었다.
준혁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혁이 고민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제가 말하려던 부분은 그 10만 명의 각성자에 관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요?”
“변수.”
“변수요?”
유민섭을 포함한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10만 명의 각성자에 관한 게 아니라면 또 어떤 변수가 있단 말인가.
“그 짐승 놈들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세월을 살아온 놈들입니다.”
“네. 그건 알죠. 깨어나고, 봉인당하고, 깨어나고, 봉인당하고.”
“놈들은 그 긴 세월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이 살았습니다.”
“뭘 좀 해 보려고 하면 인간 각성자가 나와서 봉인시키니 변화가 없을 수밖에 없죠. 새삼 인간의 위대함이 느껴진다니까?”
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말하자는 게 아닌 건 알죠?”
“압니다. 말해요, 그냥.”
“그런 놈들이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변화라는 건?”
“네. 군대를 만들었죠. 어처구니없게 합체도 시도했습니다. 즉, 과거처럼 항상 답보해 있던 놈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그 신수들이 또 무슨 짓을 해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네요.”
준혁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놈들은 평생을 강해지는 것에만 몰두해 온 놈들입니다.”
“음, 답 정해 놓고 희의라고 이름 붙이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뭘 얘기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네요. 그 새끼들 진짜 무슨 미친 짓을 하고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말이군요.”
“네. 인간이 아니니 인간적인 생각은 기대하기 어렵고……. 뭔가 아주 대단한 놈이 튀어나올 거라고 봐야죠.”
이야기를 하는 준혁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굉황.’
배면계 최강이라 불린 신수였다.
신수 사냥을 시작했던 초기에 준혁이 속해 있던 그룹은 굉황을 만났었다.
그리고 그룹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준혁만 홀로 남아 그 자리에서 도망쳤었다.
그 후, 준혁은 홀로 절치부심하며 힘을 키웠다.
신수들을 사냥하며 점차 등급을 높였다.
그럼에도 굉황과의 만남은 끝까지 피해야만 했다.
그만큼 강했던 놈이기도 하지만, 준혁이 그 강렬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던 탓이었다.
‘왠지 그놈이…….’
그런 과거가 있다 보니 무서운 신수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굉황’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르니까.’
서둘러 머릿속의 생각을 떨쳐 낸 준혁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자, 우선 이것부터 받아요.”
준혁이 허공에 에테르 덩어리를 만들어 회의실 사람들에게 하나씩 내보냈다.
준혁이 만든 장치, 스킬을 심어 주는 장치였다.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것을 잠시 음미한 후 모두 준혁을 보았다.
“와해를 응용해서 만든 영력 파괴 스킬입니다. ‘영력 분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아, 패시브입니다.”
‘와해’는 준혁의 시스템이, 던전이 만들어 내는 장치에 적용된 논리·연산의 기본 구조를 부수는 스킬이었다.
시스템이 던전을 죽이기 위해 만든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준혁은 그 ‘와해’의 구조를 부수는 방법과 에테르가 영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응용해 ‘영력 분해’를 만든 것이다.
가만히 스킬을 살피던 강태웅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게 있다고 우리가 신수에게…….”
강태웅은 최근 자신들이 던전, 그리고 신수와 싸우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자신들이 가세한다고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준혁의 힘,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10만 명의 영력 각성자를 만들어 낸 던전의 힘, 마지막으로 직접 체험했던 신수의 힘.
그 존재들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자신의 힘은 한 줌도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준혁의 생각은 달랐다.
“어린아이가 격투기 선수를 이길 수는 없죠.”
“말해 뭐 합니까?”
“하지만 우리는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죽이려는 겁니다.”
“네?”
“독이 묻은 바늘이 있으면, 어린아이도 격투기 선수를 죽일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독성이 약한 독이라 해도, 그 바늘로 수십 번을 찌르다 보면 격투기 선수라도 죽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강태웅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건 어린아이가 격투기 선수의 몸에 바늘을 찌를 수 있다는 전제에서의 이야기죠.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아무리 격투기 선수라도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격투기 선수의 손발을 묶어 줄 내가 있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
“우리를 도와줄 존재들이 있죠.”
“어떤?”
“환수들.”
준혁과 동맹을 맺은 환계의 환수들은 지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준비에는 준혁이 심어 준 스킬을 훈련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구상은…….”
그때 강이찬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의견 있습니다.”
“무슨?”
“혹시 합체는 못해요?”
“뭐?”
“그러니까……. 우리 길드에 속해 있는 각성자들이 전부 합체해 버리면, 우리도 엄청나게 강해지지 않을까요?”
강이찬의 말에 준혁이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한다.
“만화를 너무 많이 봤네.”
“아니, 왜요? 그 신수들도 합체했다면서? 그럼 우리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상상력이 지나치다.”
단숨에 강이찬의 말을 끊은 준혁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지금 보내 준 스킬은 패시브입니다. 신수를 상대하면 자연스럽게 발동되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고, 나중에 강당에 다른 헌터들도 전부 모아 줘요.”
혼원 길드 지하에는 여전히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헌터들이 있었다.
“자, 아까 말했듯이 우리는 또 하나의 전력이 있습니다. 바로 환수들이죠. 환수와 인간을 연계해서 일단은 신수를 상대할 방법을 고민해…….”
그때였다.
갑자기 말을 끊은 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건!”
뒤이어 회의실에 있던 헌터들 역시 기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여, 영력!”
“신수!”
갑자기 온 세상을 뒤덮는 듯한 거대한 영력을 감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영력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숨에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으로 거대한 영력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그 영력에서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굉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