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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장. 변수들#4-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으며, 벽 또한 없는 하얀색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새하얗지만 또 한편으로는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림자도 없다.
그야말로 진짜 무(無)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하나의 운집이 있었다.
빛도 그림자도 없고, 사물도 없으며, 거리의 기준 또한 없다.
그런 이유로 운집한 존재들의 크기 또한 가늠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속에 인간이 끼어든다면 하나의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들의 운집이었다.
신수(神獸).
끊임없는 성장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신이 되고자 하지만, 신의 격(格)은 얻었으되 결코 신이 되지는 못한 존재들.
70여 개체가 새하얀 세계의 한곳에 뭉쳐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있었고, 그 시선의 끝에는 신수와 다른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시스템이었다.
한꺼번에 코어를 흡수했던 시스템은 아직도 그 기괴한 덩어리의 형태를 완전히 정돈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전체를 보면 얼굴과 몸통, 그리고 사지가 있기에 단순한 덩어리의 형태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원래 가지고 있던 명확한 인간의 형태는 아니었다.
거대해진 머리에는 종양처럼 구체의 덩어리가 중첩되어 솟아 있다.
종양 덩어리가 마구 솟아 있는 건 머리만이 아니다.
온몸이 똑같다.
팔다리는 길어지고 부풀어 올라 관절의 구분이 불가능했고, 손발 역시 마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손가락에 또 다른 손이 돋은 것처럼 늘어나 증식하는 세포 줄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내뿜는 존재감은 이전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주 서 있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신수조차 본능적으로 긴장할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시스템이 신수들을 향해 물었다.
“만족스러운가?”
시스템은 코어를 흡수한 직후, 몸을 가누는 것은커녕 생각의 정돈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매우 정상적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흡수한 코어를 어느 정도는 정리했다는 뜻이다.
시스템의 말에 신수들 중 가장 서두에 있는 한 존재가 반응했다.
-이 정도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지.
“그래도 우리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셀 수 없는 세월을 살면서 들어 본 중 가장 웃기지 않는 농담이군.
“농담이라?”
비아냥대는 듯한 시스템의 반응에 앞서 나선 신수의 온몸에서 거대한 영력이 솟구쳤다.
쿠쿠쿠쿵-!
그 힘에 세계가 크게 뒤흔들리며 거센 진동이 퍼져 나갔다.
시스템의 존재감에 긴장을 했지만 그것이 겁을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방으로 힘을 흩뿌린 신수, 거대한 한 마리 흑룡이 시스템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과호루, 해함, 하하구, 야천, 만재에게 한 짓을 알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나?
하지만 시스템은 여전히 느긋했다.
“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놈들이지.”
흑룡의 이름은 굉황이었다.
배면계에서는 준혁과 지독한 악연으로 길고 긴 싸움을 했었고, 현실에 와서도 수없이 부딪쳤던 배면계 최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존재였다.
굉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속이라? 그들이 너에게 숲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을 파괴하는 놈을 동맹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시스템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말꼬리를 전환했다.
굉황이 잠시 그 뒷말을 기다리고, 시스템이 말을 마무리했다.
“너희 짐승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서로를 아꼈지?”
그 물음에 굉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다.
신수들은 서로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들은 동족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길고 긴 세월 동안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가 바로 신수라는 위치였다.
애초에 ‘종’ 자체가 다른데 동족으로 생각할 리가 없다.
오히려 서로 하나의 몸이 되는 것에 나섰던 과호루, 해함 등이 의외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환계에서 백안을 중심으로 힘을 합치고 전술적으로 싸웠던 그 신수들이 궤도를 이탈한 것이었다.
준혁 또한 그런 사실을 알기에, 예기치 못한 신수들의 행동에 놀랐던 것이다.
굉황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시스템이 말을 이었다.
“내가 건네준 것들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텐데?”
-부족하다.
“흐음, 하긴……. 정말 적은 양이기는 하겠군.”
-인간 각성자를 늘려라. 그러지 않으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구에 나타난 영력 각성자들은 신수에 의한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신수의 요구가 있었고, 그것을 시스템이 받아 준 것이었다.
이 방법은 던전 시스템의 소멸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시스템은 과호루를 중심으로 한 신수의 융합을 제안할 때, 이러한 방법 또한 제안했었다.
다만 그 시기가 던전 시스템의 소멸과 교묘하게 겹쳤을 뿐.
“각성자를 늘리는 것은…….”
시스템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굉황을 보았다.
물론 이목구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얼굴에 떠올린 표정이기에 겉으로는 조금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가 적정한 수준이지?”
-지금 인간 세상에서 올라오는 영력을 혼자 받아야만 유의미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지.
“허, 그럼 지금의 70배 정도로 늘리라고?”
10만의 70배면 700만이다. 즉, 전 세계에 700만 명의 각성자를 만들어 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
“그렇게 하면 김준혁 그자가 눈치챌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멍청한 이야기를 하는군.
“뭐라?”
-도살자가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음? 그건 그렇지.”
시스템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이 알고 있는 준혁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뭐, 힘들지 않지.”
시스템은 깊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운집해 있는 신수들 사이에서 가벼운 동요가 퍼져 나갔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신수들의 가장 강력한 욕구.
성장, 격의 초월, 그것에 대한 원초적인 반응이었다.
기괴한 형태를 띤 시스템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고, 70여 개의 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받아라.”
시스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70여 개의 빛 덩어리가 각각의 신수를 향해 두둥실 날아갔다.
처음 지구상에 영력 각성자를 만들 때와 똑같다.
이 과정을 거쳐 인간 각성자의 영력을 흡입했었다.
신수들이 빠르게 그것을 낚아채면서 빛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럼 지금부터…….”
시스템이 또 하나의 빛 덩어리를 떠올렸다.
파삭!
가벼운 소음과 동시에 빛 덩어리가 강렬한 빛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크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이 무슨!
신수들의 거대한 몸뚱이가 갑자기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찌그러지는 신수들의 몸속에서 거대한 영력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종이 모형을 구기듯 무작위한 형태로 찌그러지던 신수들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둥근 종이 뭉치처럼 변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둥글게 뭉친 덩어리들에서 짙은 잿빛 영력이 풀썩 피어올랐다.
그리고 영력이 새어 나올 때마다 뭉쳐져 있던 신수의 몸뚱이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때 한 신수의 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놈, 네놈이 배신한 것이냐?
덩어리로 변해 영력으로 변하고 있는 신수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두 존재가 있었다.
하나는 시스템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던 굉황이었다.
굉황의 긴 주둥이의 꼬리가 빙글 말려 올라갔다.
-우리가 언제 서로 배신이라는 걸 할 정도의 유대가 있었던가?
틀린 말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모든 신수는 같은 ‘종’이 아니다.
당연히 동족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서로가 경쟁자다.
같은 용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동족이 아니었고, 유대감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배면계에서 신수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신수가 신수를 잡아먹는다면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알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공격하고 잡아먹을 수는 있다.
그렇게 강해질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의 평균보다 강할 경우, 다른 개체들은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강해진 개체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오히려 힘을 모아 강해진 하나를 제거한다.
다른 모든 신수를 제압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면 협공을 당해 죽는다.
하지만 겨우 하나의 개체를 잡아먹는 정도로 다른 모든 신수를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배면계에서는 신수들 사이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신수들 사이에 변수가 끼어들었다.
시스템이었다.
시스템은 신수들과 다른 별개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변수가 신수들 사이에서 당연한 듯 내려오던 불문율을 뒤틀었다.
백안을 통해 군대가 조직된 것도, 과호루 등이 융합한 것도 그 변수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변수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신수들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신수들이 갖는 특유의 오만함과 타성에 젖은 태만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 지구의 각성자를 통해 영력을 받은 적이 있기에, 시스템이 보낸 장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시스템이 만든 장치는 몇 겹의 위장이 있었기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개체라도 주의를 했다면, 다른 개체의 진행 상황을 보고 장치를 받아들인 신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개체도 일말의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굉황이 함께 있던 모든 신수의 영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콰르르릉!
세계가 또 한 번 흔들렸다.
굉황이 힘을 내뿜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흔들림이었다.
동시에 굉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영력 덩어리들이 굉황에게 흡수되었다.
쿠우웅-!
-좋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속에서 날뛰는 그 힘에 굉황이 어지럽게 허공을 날았다.
이전보다 서너 배는 거대해진 흑룡의 몸뚱이에서 짙은 회색 영력이 퍼져 나와 새하얀 세상을 잿빛으로 물들인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군.
굉황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70여 개체였다.
그 정도로 많은 신수를 흡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굉황은 ‘신’이 되지 못했다.
시스템이 비웃듯 물었다.
“그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
-크흐흐! 그런 것은 아니지.
“나는 이제 약속을 지켰다.”
시스템의 말에 굉황이 거대한 몸뚱이를 뒤틀어 시스템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약속을 지킬 것이다.
굉황의 장담에 시스템의 얼굴이 묘하게 찌그러졌다.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길을 열어 주겠다.”
시스템의 팔이 움직였다.
-필요 없다.
빠르게 시스템의 행동을 저지한 굉황이 자신의 영력을 움직였다.
동시에 허공에 영력으로 뭉쳐진 게이트가 열렸다.
“훗!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겨우 이런 정도로?
“기대하고 있겠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겠군. 작별이다.
말을 마친 굉황이 게이트를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