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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장. 변수들#3-
화면 왼쪽 위에 숫자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1천을 돌파했고, 그러고도 쉬지 않고 숫자를 불려 갔다.
“뭐, 뭐 이렇게 많아?”
영력 레이더는 전 세계를 감시권에 두고 있었다.
탐지 반경이 100킬로미터가량인 레이더를 세계 전 지역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릴리안 우드가 만든 레이더의 우수성 덕분이었다.
준혁에게서 배운 장치에 대한 이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마나 감지기 등을 만들었던 천재성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영력 레이더의 탐지 반경은 100킬로미터에 달했고, 대량으로 찍어 낸 레이더를 세계 전 지역에 빈틈없이 뿌렸다.
레이더를 설치하는 일은 길드에 속해 있는 100여 명의 각성자 몫이었다.
그들 역시 준혁 덕분에 ‘게이트 오픈’을 사용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지금 화면에 떠 있는 숫자는 세계에 있는 새로운 각성자의 정확한 숫자였다.
‘100,000’.
정확하게 10만 명이었다.
1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는 정확하게 10만.
이 숫자는 아주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데요?”
릴리안 우드가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준혁도, 유민섭도, 강이찬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10만 명이다.
세계에 영력을 가진 각성자가 10만 명이 있는데,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바일레어 대통령이 리처드 개런을 부르지 않았다면, 준혁 또한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바일레어 대통령이 지금껏 말하지 않은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이 갑자기 기존과 다른 방식의 각성자가 되었다고 하면 그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 지도자의 입장에서, 얻을 것도 많지만 잃을 것도 많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 10만 명이 모두 그런 입장일까?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사람들 속에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좀 심각해져서 이른바 관종이라 불리는 이들도 꽤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건도 그 사실이 알려진 바가 없었다.
10만 명의 각성자가 모두 그것을 밝히기 힘든 상황일 수는 없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다른 힘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준혁의 결론에 릴리안 우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사실 10만에 딱 떨어지는 숫자도 너무 작위적이죠.”
유민섭이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지도……. 펼친 거 말고 지구본 형태로 볼 수 있습니까?”
“네.”
릴리안 우드가 당연하다는 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내 화면에 평면으로 펼쳐져 있던 세계지도가 지구본 형태로 바뀌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유민섭이 자신의 설명을 보탰다.
“작위적인 게 또 하나 있습니다. 각성자가 모든 땅에 너무 고르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평면으로 펼쳐 놓는 세계지도는 왜곡이 생긴다.
구체를 평면으로 그리기 때문에 실제 땅 크기와 다르게 표시된다.
그런데 펼쳐진 세계지도만 봤을 때도 고르게 분포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을 지구본 형태로 바꾸니 명확하게 드러났다.
“우리나라만 봐도 인구 밀집이 심각한 서울과 시골의 분포 비율이 똑같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사막이나 중동 사막에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으음…….”
유민섭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작위적인 느낌이 너무 명확한데, 그 목적을 도통 알 수가 없다.
준혁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제가 좀 만나 보고 와야겠습니다.”
“만나다뇨, 누굴?”
“이 각성자들이요.”
“만나서 뭘 하시려고?”
“한 가지 짐작 가는 게 있어서 확인해 보려고요.”
그렇게 대답한 준혁이 릴리안 우드에게 물었다.
“혹시 이 화면, 제 휴대폰에서도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습니까?”
“화면만 전송하는 건 어렵지 않죠.”
“그럼 부탁드립니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준혁의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
“안녕하세요.”
“네? 누구… 신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던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젊은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을 가는데 본 적도 없는 덩치 큰 남자가 말을 걸어온 탓이었다.
그런데 빨간 머리의 태도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덩치 큰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오면 여자가 아닌 남자라도 일단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빨간 머리는 그런 반사적인 모습이 없었다.
빨간 머리가 다름 아닌 각성자이기 때문이었다.
덩치 큰 남자는 메구탈로 얼굴을 바꾼 준혁이었다.
준혁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승객의 수가 대략 10명 정도 보였다.
확인을 끝낸 준혁이 여자를 향해 아주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 혹시 각성자입니까?”
“뭐, 뭐야?”
빨간 머리가 깜짝 놀라 준혁을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손을 뻗었다.
꽝!
굉음이 지하철 승강장을 따라 길게 퍼져 나갔다.
인근에 있던 승객들의 시선은, 준혁이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이미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음!’
그리고 준혁의 표정이 변했다.
‘이건!’
‘탐색’을 사용하고 있는 준혁의 시야에 확실히 잡히는 것이 있었다.
빨간 머리의 몸에서 뻗어 나온 영력이 승강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지하철을 기다리는 자세로 돌아갔다.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이거였군.’
준혁은 뻗어 나간 영력이 아주 작은 단위의 장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당연히 장치의 용도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다.
문제의 장치는 준혁의 머리로도 날아들었었다.
하지만 장치는 준혁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온 후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영력을 매개로 하는 장치였는데, 준혁의 몸속에 있는 에테르가 영력을 에테르로 환원시켜 버린 탓이었다.
이로써 보통의 사람들이 각성자의 존재를 모르는 이유, 강이찬과 리처드 개런이 바일레어 대통령의 각성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확인되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이 날아들었다.
“다, 당신도 각성잔가요?”
빨간 머리가 준혁을 향해 물었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각성자가 타인에게 드러나는 순간 영력이 어떤 작용을 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각성자 본인은 그 일들을 모두 기억한다.
준혁은 조금 더 알아볼 생각으로 일단 장단을 맞췄다.
“역시 각성자가 맞는군요. 저와 같은 각성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인들한테는 아무리 말을 해도 기억을 못하더라고요. 나중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가 되기에 더는 시도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빨간 머리의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스쳤다.
“아, 역시 나만 있는 게 아니었어!”
반가운 표정과 함께 떠오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안도감의 정체는 여자의 말에서 곧 밝혀졌다.
“난 진짜 나만 각성한 건가? 왜 아무도 모르지? 너무 무서웠어요.”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자신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성격에 따라 그것이 무서울 수도 있다.
준혁은 좀 더 알아볼 생각으로 빨간 머리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시간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여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방금 전 떠올렸던 안도감의 원인을 생각하면 이상한 반응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위험에 대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은 성격에 따라 고독감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전철역을 나서서 두 사람이 자리 잡고 앉은 곳은 인근 공원의 벤치였다.
-인터넷, 인터넷 물어봐요!
준혁의 머릿속으로 유민섭의 ‘텔레파시’가 날아들었다.
모든 상황을 유민섭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가장 의문인 부분이었다.
아까 영력이 뻗어 나가며 작용한 장치를 보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한 것이 소문나지 않은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통신망을 타고 흐르는 것은 1과 0으로 구성된 2진수 데이터다.
그 통신망으로 영력이 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인터넷에는 단 한 건도 이와 관련한 글이 올라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준혁은 빨간 머리와 똑같은 방식의 각성자 행세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거짓말을 들키지 않고 물어볼 정도의 말재주가 없었다.
만담하듯 말하는 것과 상대를 구슬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재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근방에는 유민섭이라는 최고의 코치가 있었다.
-뭐라고 말할까요?
-그동안 답답했죠? 저도 그랬습니다.
유민섭의 말을 준혁이 그대로 따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준혁은 유민섭의 아바타가 되었다.
“저도 정말 답답했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도 안 되고.”
준혁의 말에 빨간 머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난 진짜 그게 이상하더라고요.”
유민섭이 준혁을 통해 건넨 말은 별다른 내용이 없다.
하지만 같은 고충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두루뭉술하게 뉘앙스만 풍겨도 바로 넘어오게 되어 있다.
“나도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도대체 왜…….”
“내 말이. 게시판에 글만 올리려고 하면 갑자기 기억이 끊어지잖아요. 게다가 글을 올린 것 같은 느낌이 분명 있는데 글은 찾아볼 수도 없고. 나 진짜 무서웠어요.”
-아, 그런 거였군. 말로 하는 건 이야기 들은 사람의 기억을 자르고, 글을 써서 게시하는 건 아예 각성자의 기억을 끊어 버리는 거였네요.
“아, 그런 거…….”
반사적으로 유민섭의 말을 따라 하던 준혁이 흠칫 놀라 제 입을 막았다.
빨간 머리가 멈칫하며 물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볍게 손사래를 치는 준혁의 머릿속으로 유민섭의 앙천대소가 거대하게 울려 퍼졌다.
-푸하하하하하!
준혁은 재빨리 유민섭의 ‘텔레파시’를 끊어 버리고는 빨간 머리에게 다시 말했다.
“아, 그리고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이상한 거, 어떤 거요?”
“우리는 각성했잖아요.”
“그랬죠.”
“그래서 평소에 분명 힘이 막 넘치는데……. 어떤 때는…….”
짝!
“맞아요! 그럴 때 있어요. 갑자기 잠도 안 깨고 엄청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빨간 머리는 아예 손뼉까지 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이 짐작했던 부분이었다.
‘이 짐승 놈들은 변하지를 않네.’
준혁이 아는 신수의 지상 목표는 결국에는 ‘신’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힘을 먹는다.
환계에 침입해 환수들을 잡아먹으려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간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영력을 심어 주고, 그 영력이 자연스럽게 커지도록 한 후에 주기적으로 다시 흡수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준혁의 행동에 빨간 머리가 깜짝 놀란다.
“네?”
“대충 알아볼 건 알아봤으니, 저는 이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걸어가는 준혁의 뒤로 빨간 머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며 은신을 펼치고 있는 흑호의 등에 올라타 버린 준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충은 알겠는데…….’
궁금했던 것은 대강 다 파악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 분포는 도대체 뭐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땅덩어리에 아주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10만이라는 숫자의 각성자.
그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 부분을 고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