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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장. 폭풍전야#6-
준혁은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턱!
갑자기 손바닥에 하나의 감각이 와닿았다.
그것은 더 이상의 진입을 막는 하나의 거대한 벽이었다.
‘왜?’
공허한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불쑥 솟구친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막지 마라!’
화가 났다.
준혁은 의식 속에서 장치들을 보고 그 진리를 이해하고 머릿속에 완전하게 담으며 이곳까지 왔다.
그것은 일종의 ‘탐미(耽美)’였다.
이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탐미와 같은 맥락이었다.
인간은 위대한 자연 앞에 서면 넋을 잃고 빠져드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이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손이 빚은 위대함을 향한 경이다.
회귀, 혹은 귀소의 본능이기도 했다. 자신을 낳아 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본능이었다.
준혁의 시스템, 장치, 법칙에 대한 탐미는 그와 궤를 같이했다.
그리고 앞을 막는 벽은 그러한 탐미의 욕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치솟는 불쾌감은, 그로 인해 피어오르는 분노는 아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본능이었다.
자아를 잃고 분노한 인간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폭력이었다.
콰앙-!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시스템 안에서 스킬은 발현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무기는 맨몸이었고, 그것을 모두 동원했다.
콰콰쾅!
쉴 새 없이 손발을 날렸다.
그런데 시스템 운영 속에서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성이 날아간 상태로 고통마저 없으니 준혁의 폭력은 점점 원초적인, 짐승의 그것으로 변해 갔다.
머리로 들이받고, 손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깨물었다.
하지만 그 모든 행위는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했다.
준혁을 막아 세운 벽에는 긁힌 자국 하나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혁은 여전히 온몸을 이용해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빨로 물어뜯다 아무 반응이 없으니 또다시 머리를 젖혔다.
꽈앙-!
“끄악!”
동시에 준혁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갑자기 신경을 쥐어짰다.
고통은 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신호다.
지금 준혁이 느끼는 통증도 같은 이유로 그의 진짜 의식이 보내는 신호였다.
“무, 무슨!”
고통으로 인해 준혁의 진짜 의식이 깨어났다.
탐미에 빠져 본능만 남아 있던 상태가 아닌, 준혁이 준혁으로서 살아오며 형성된 자아가 눈을 뜬 것이었다.
그 진짜 자아를 깨우기 위한 통증이었다.
‘내가 뭘 한 거야?’
천천히 기억을 되돌렸다.
“윽!”
그리고 저도 모르게 와락 인상을 구긴다.
구겨진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쪽팔려.’
이불킥을 수십만 번 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흥분하기는 해도 이성을 잃은 적은 없었는데, 아예 짐승처럼 답도 없이 들이박은 자신의 모습에 얼굴은 물론 온몸이 화끈해질 지경이었다.
준혁은 부끄러운 기억을 애써 기억 한편으로 밀어 놓았다.
가만히 눈앞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벽에 대 본다.
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빨리 위를 향해 상승했다.
어차피 시스템의 내부, 준혁의 의식 내부였다. 오르고 내리는 것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하지만 준혁의 의식이 떠올라 벽을 넘으려는 순간, 벽이 갑자기 높아졌다.
아무리 올라가도 벽은 준혁이 절대 넘을 수 없는 높이로 솟구쳤다.
아래로 내려가도 마찬가지.
이는 벽이 준혁의 접근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두드려도 깰 수 없고, 넘을 수도 없다.
“하!”
준혁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는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벽이라는 의미였다.
준혁은 도전적이고, 의외로 집요하지만 쓸데없이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벽은 굳이 넘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벽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것을 얻었다.
“후!”
준혁은 짧은 한숨과 함께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빠르게 현실을 향해 움직였다.
“하아!”
길게 내뿜은 준혁의 한숨에 강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괜찮냐?”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준혁에게 묻는 사람은 김준석이었다.
김준석 옆에는 리쉬옌과 최유나가 있었고, 김준석 뒤로는 유민섭과 장민호, 강태웅이 득달같이 달려와 준혁을 에워쌌다.
“뭡니까?”
준혁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이 자식아, 도저히 안 깨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김준석의 말에 뭔가를 짐작한 준혁이 물었다.
“며칠이나 지난 거야?”
“열흘!”
“허!”
“뭐, 뭐야? 왜?”
이번에는 김준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열흘이라고 말하자마자 준혁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오른 탓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걱정이 많았겠네.”
열흘 동안 이성을 잃고 깨지지 않는 벽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들어서 그렇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강당에 네 개의 게이트가 열리더니 강이찬, 백호진, 리처드 개런, 양태군이 뛰쳐나왔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등장한 네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왜 그래?”
준혁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강이찬이었다.
“아, 갑자기 무시무시한 기운이 퍼지기에 신수라도 왔나 싶어서 달려왔죠.”
“응?”
준혁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격한 반응은 오히려 준혁 옆에서 지키던 김준석을 포함한 네 사람에게서 나왔다.
“어? 어어!”
“미, 미친!”
“이거 뭡니까?”
준혁의 한숨 소리에, 준혁이 깨어났다는 사실에만 놀라서 다른 걸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준혁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 이거 무슨!”
스스로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수없이 등급을 올려 보았기에 준혁은 그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등급이 오르면 갑작스레 스탯이 올라간다.
처음에는 그 갑작스러운 스탯 변화에 힘 조절이 어려워 실수도 할 정도다.
그러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힘 조절은 하더라도 스탯의 변화로 인한 위화감은 어쩔 수 없이 느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확인해 보니 몸에서 힘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던전 시스템 내부에서 만났던, 다섯 마리 신수가 합쳐진 그놈보다 서너 배 강한 힘이었다.
‘어쩌다가?’
준혁은 급히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아!’
준혁의 얼굴에 격렬한 표정 변화가 떠올랐다.
‘이, 이것 참…….’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에테르의 흐름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흐름을 몸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과거에는 에테르가 그대로 외부로 발출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에테르가 십여 개의 장치를 거치면서 증폭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효율의 상승이었다.
장치 속에서 진리를 보고 깨달으며, 그것을 몸에 새긴 결과가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변화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될 것 같은데?’
장치의 창조가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준혁이 사용한 장치는 모두 기존에 있던 장치를 복제한 것이었다.
게이트 오픈이나 회피를 다른 사람에게 심은 것도, 던전 시스템 내부에서 다섯 마리 신수를 합친 것도 모두 기존에 있던 장치를 재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없던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친김에 손끝에서 에테르를 뽑아 올렸다.
실체화한 에테르가 아주 미세한 덩어리로 뭉치며 작은 도형들을 만들고, 어느새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장치가 되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열 명이 경이로운 눈으로 준혁의 손바닥 위에 생성된 에테르 덩어리를 보았다.
준혁의 눈에는 그 미세한 단위의 장치가 명확하게 보였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빛나는 에테르 덩어리로만 보였다.
그럼에도 이것이 그저 단순한 에테르 덩어리가 아니라는 정도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 준혁의 손 위에 있던 에테르 덩어리가 김준석을 향해 날아갔다.
“어?”
김준석이 깜짝 놀라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 직후.
“뭐, 뭐냐?”
기겁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준혁이 날린 에테르 덩어리를 맞는 순간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탓이었다.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번 써 봐.”
“어? 어어, 그래.”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륵!
갑자기 김준석의 손바닥 위에 불길이 솟구쳤다.
“대, 대박! 뭡니까? 갑자기 왜 마법, 아니 술법이라니!”
강이찬이 기겁해서 외쳤다.
준혁이 피식 웃으며 손바닥 위에 또다시 에테르의 실타래를 뽑아 올렸다.
한 번 만들어 본 것이라 그런지 두 번째부터는 생각하는 순간 장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하나씩 날려 주었다.
“워, 워우!”
“미쳤네요! 이거 진짜!”
“존경합니다.”
평소 말이 없는 최유나조차 반응을 보일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준혁이 날린 것을 받아들인 순간 머릿속에 스킬이 떠오르고, 그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물론 지금 만든 불길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스킬을 창조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만 있다면 준혁은 좀 더 복잡하지만 큰 위력을 가진 스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배면계의 술사들이 ‘술석’을 이용해 술법을 일으키는 것과는 달랐다.
배면계 술사들이 술석을 이용해 일으키는 일들도 절반 정도는 창조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지면 그것은 응용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술법들을 조합해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준혁의 능력은 술사가 아닌 사람이 술법을 쓸 수 있게 해 주고, 투사가 아닌 사람에게 물리적인 공격 스킬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그리고 준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번에 모였던 사람들 훈련은 잘되고 있습니까?”
그 물음에 유민섭이 애매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단 에테르를 다루다 보니 우리가 훈련할 때보다는 진도가 빠른데…….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죠.”
“다 데리고 와 봐요.”
“네?”
“일단 다 데리고 오십시오.”
준혁의 말에 유민섭이 재빨리 게이트를 열었다.
백여 명의 각성자가 엘리베이터나 계단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사이 준혁은 새롭게 에테르의 실타래를 뽑아 올렸다.
그러는 사이 백여 명의 각성자가 모두 강당에 모여 줄을 섰다.
강당에 모인 각성자들도 준혁의 모습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준혁의 손에 올린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장치를 만들어 낸 준혁이, 가운데 가장 앞에 선 하시모토 타츠야를 향해 장치를 날렸다.
“어!”
순간적으로 기겁했던 하시모토 타츠야가 갑자기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제 손을 움직였다.
우우웅!
하시모토 타츠야의 손에 에테르가 피어올라 하나로 뭉쳐졌다.
“허!”
준혁은 ‘에테르 운용’이라는 스킬을 만들어 심어 준 것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하시모토 타츠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네, 흑태자 님!”
오랜만에 듣는 흑태자 ‘님’이라는 소리에 준혁이 움찔했다.
하지만 하시모토 타츠야 입장에서는 그 정도 호칭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도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할 수 있겠네요.”
준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달아 장치를 만들어 냈다.
각성자들에게 기적과 같은 스킬을 심어 준 준혁은 사람들과 회의를 거듭하며 장치를 고민해 나갔다.
준혁과 혼원 길드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평화 속에서 다가올 거대한 싸움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