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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장. 폭풍전야#3-
“크흑, 흑!”
제임스 루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둠 속에서 크게 뜬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빈틈은 없는지 샅샅이 뒤졌다.
혹여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입을 틀어막은 두 손에 힘을 더했다.
저벅, 저벅!
그런 제임스 루버의 귓전으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미,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누군가의 나지막한 외침이 제임스 루버의 귓전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설마 내가 널 찾지 못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미(Jimmy), 제임스라는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이다.
즉, 제임스 루버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누군가의 말이었다.
그런데 제임스 루버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미, 이러면 곤란하다고.”
하지만 제임스 루버는 웅크린 채 몸을 숨긴 상자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제발…….’
끼익!
하지만 제임스 루버의 바람과 달리 상자 뚜껑이 단번에 열렸다.
그리고 강렬한 빛과 함께 제임스 루버의 시야에 잡힌 얼굴은 다름 아닌 리처드 개런이었다.
과거 제임스 루버의 가장 믿음직한 리더이자, 미국 랭킹 1위 길드 ‘팀 히어로’의 길드장인 것이다.
“오, 릭! 제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하는 제임스 루버의 모습에 리처드 개런은 힘겨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미.”
“제, 제발 살려 줘!”
리처드 개런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짙은 슬픔과 자멸감이 뒤섞여 있었다.
“지미, 내가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친구였던 거야?”
그 말에 제임스 루버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 위선자! 지금 날 죽이려고 하는 네 모습이야말로 나를 못 믿게 하는 거 아닌가?”
“후우! 도대체 뭘 보고 내가 널 죽이려고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퍼킹 개런! 그렇다면 네가 갑자기 꺼내 든 그 물건은 뭔데?”
제임스 루버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면 욕이라도 하겠다는 듯 악에 받쳐 외쳤다.
“하아! 그래. 나는 너에게 믿을 수 없는 친구였군.”
낙담한 듯 말을 마친 리처드 개런이 손에 든 작은 구슬을 힘을 주어 깨트렸다.
파삭!
가벼운 소음과 함께 쪼개진 술석에서 빛이 솟구쳤다.
“윽!”
제임스 루버가 기겁을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제임스 루버는 이내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후우!”
리처드 개런은 땀도 흐르지 않는데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 루버는 과거 팀 히어로 최고의 딜러였다.
또한 리처드 개런과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리처드 개런의 포섭 목록 가장 윗줄에 이름을 올린 친구였다.
하지만 제임스 루버는 제안을 거절했다.
더는 위험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알았다고 대답한 리처드 개런이 술석을 꺼내 들었다.
문제는 제임스 루버가, 리처드 개런의 술석을 보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오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기겁한 제임스 루버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도망쳤고, 리처드 개런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처드 개런이 꺼내 든 술석은 누군가를 해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저 재각성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없애는 물건이었을 뿐이었다.
편안하게 잠든 제임스 루버의 모습을 잠시 지켜본 리처드 개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가장 오래된 동료가 이런 오해를 한 이유가 어쩌면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괜히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어쩌면 좋은 친구는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혼원 길드 편입을 권유했을 때, 팀 히어로의 모든 길드원이 거부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자신을 성찰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동료를 모아야 할 때였다.
리처드 개런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두 번째 포섭 대상을 찾아 움직였다.
***
“어이구, 난리 났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준혁의 귓전에 들리는 김준석의 말이었다.
“왜?”
“이게 안 들렸냐?”
김준석이 꽤 놀란 표정으로 TV를 가리켰다.
TV에서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응?”
두 사람은 각성자였다. 그리고 각성자의 감각은 야생동물의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예민하다.
그런데 문 너머의 TV 소리가 안 들렸다고 말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놀란 사람은 준혁이었다.
“평소에 감각 조절 안 해?”
“응? 그게 뭔데?”
“헐! 그럼 평소에 어떻게 살아?”
“들리는 소리 무시하면서 지내는 연습하다 보면……. 뭐랄까? 배경음? 백색소음? 뭐 그런 정도 느낌이라 그냥 지내는데?”
“기가 막히는군.”
“뭐래는 거야?”
“감각을 조절해. 일상에서는 보통 사람 정도의 감각만 유지하라고.”
김준석이 기묘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그런 게 가능하냐?”
“가능하지.”
“어, 어떻게?”
“음……. 기본은 영력 조절, 아니 지금은 에테르지. 에테르를 조절하는 거. 뭐, 나중에 가르쳐 줄게. 그나저나 뉴스에서 뭐 나와?”
“세계 곳곳에서 각성이 풀린 각성자들이 단기 기억상실증 증상을 보인다는 뉴스.”
“아아…….”
원인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준혁이 길드원들에게 나눠 준 술석으로 인한 현상들이었다.
준혁이 어깨를 한 번 털며 말했다.
“거절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네.”
“뭐, 쉽게 선택할 일은 아니잖아. 괜히 저걸 무슨 현상이니 뭐니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난리다, 난리야.”
김준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하는 말에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리는 우리 집이 난리지.”
“응?”
“집 꼬라지 좀 보시지, 형님아?”
“뭐 어때서 그래?”
“형수님 보시면 형 등짝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는 데 500원 건다.”
준혁의 말대로 집은 정말 난리라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거실 바닥 곳곳에 널려 있는 옷가지에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 그리고 저만치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까지.
준혁이 시스템 내부에 침입했다가 돌아온 지 오늘로 일주일째였다.
이세연이 지유와 함께 환계로 피신한 상태니, 남자 둘이서만 지낸 지 딱 일주일째라는 뜻이다.
그 일주일 만에 집이 난장판이 된 것이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김준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혁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물었다.
“지금 보니 그 옷……. 일주일째 안 갈아입고 있는 거 같은데?”
“안 나가잖아.”
“허어! 뭐지, 이 잉여는? 결혼 전에 우리 집은 분명 깨끗했는데?”
준혁이 프로 선수가 되어 독립하기 전까지 김준석은 부모 역할까지 했었다.
그리고 당시 가사를 담당했던 김준석은 아주 성실한 주부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김준석이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는 나밖에 할 사람이 없었고. 그리고 나 평소에는 집안일 나눠서 하거든?”
“그럼 지금은?”
“유부남은 가끔 이런 자유도 누려야 하는 거다.”
당당하게 말한 김준석이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더니, 콘솔 게임기를 켜고 컨트롤러를 집었다.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지.”
“인마, 그러면 니가 좀 하든가.”
“내가 왜? 난 밥도 나가서 먹고, 내 빨래는 내가 하고, 내 방은 아주 깨끗하거든?”
준혁은 과거 소속 구단이 지방에 있었기에 그곳에서 작은 원룸을 구해 혼자 생활했었다.
그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지금도 똑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즉, 지금 집안의 난장판은 모두 전적으로 김준석의 몫이었다.
“저녁에 술 한잔할까?”
김준석이 아무런 맥락 없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준혁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마실 거면 좋고, 집에서 마실 거면 치우고 말씀하셔라, 형님아.”
집 청소를 함께 시키려는 김준석의 계략은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그렇게 좌절되었다.
말을 마친 준혁이 곧장 현관 쪽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 오늘도. 그럼 저녁에 봐.”
“그래, 갔다 와라.”
준혁은 인사와 함께 집을 나선 후 혼원 길드 사옥으로 향했다.
사옥에 도착한 준혁은 마주치는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지하 훈련실로 내려갔다.
길드 사람들이 각성자들을 추가로 영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준혁은 자신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우!”
가부좌를 튼 채 짧게 호흡을 고르고 눈을 감는다.
‘시스템 운영.’
준혁의 상태창에 표시되는 유일한 스킬 ‘시스템 운영’을 사용했다.
준혁의 의식은 곧바로 시스템 내부로 향했다.
길드원들이 사람을 모으는 동안 준혁이 하는 준비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였다.
준혁은 시스템을 소유하게 된 후, 이 시스템을 제대로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던전 시스템과의 싸움이나 환계에서의 협상 등 급한 일들을 하느라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꽤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던전 시스템의 잠적으로 인한 것이었다.
던전 시스템은 그날 코어 이전을 마치고 사라진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전한 코어의 안정화 때문이었다.
원래는 시간을 들여 하나씩 코어를 이전해야 했었다.
하지만 준혁의 방해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던전 시스템은 고육지책으로 모든 코어를 한꺼번에 이전했다.
그 과정에서 준혁이 코어의 절반 정도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과도하게 많은 장치를 이전하게 되었다.
준혁은 던전 시스템이 이전한 코어를 모두 안정화하고 자신의 내부에 정착시키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내다봤다.
최소 3개월.
준혁이 예상하는, 던전 시스템이 코어를 안착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이는 준혁이 코어의 이전 과정을 생생하게 보았기에 내놓을 수 있는 예측이었다.
그리고 꽤 정확하다고 자신했다.
준혁이 시스템을 통해 장치를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준혁이 시스템 내부로 침입한 것은 매우 훌륭한 한 수였다.
코어의 이전은, 시스템이 하나씩 차근차근 장치를 안착시켰다면 겨우 1개월이면 마무리되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절반만 이전했는데도 3배 가까운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하나씩 하면 그 하나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한꺼번에 흡수하면 다른 장치들이 요동치지 않게 제어를 하면서 안착 작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준혁의 시스템 내부 침입으로 3개월의 시간 여유를 얻은 셈이었다.
준혁은 그 시간 동안 시스템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며, 그 후에 자신을 더 성장시킬 방법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해야 할 시스템에 대한 이해부터가 아주 지난한 일이었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너무 거대한 장치의 집합이기 때문이었다.
장치 하나하나를 이해한다고는 해도, 장치 사이의 연계와 그로 인한 효과를 모두 파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일주일이나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이제 겨우 20퍼센트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하아! 많기는 진짜 많다.’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준혁은 진득하게 시스템 내부를 살폈다.
그리고 서서히 시간이 지나며 준혁이 완전히 그 일에 몰입한 어느 시점이었다.
“어?”
준혁이 저도 모르게 입으로 당혹스러운 외침을 뱉었다.
“뭐야, 이거?”
준혁의 질문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그의 망막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였다.
[조건을 충족하여 승급합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난데없이 나타난 메시지였다.
준혁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메시지를 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또 무슨 승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