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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장. 동맹#2-
신수들의 대답에 준혁은 기분 좋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대로군.’
지구상에 있는 인간 중에 준혁만큼 신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죽은 로건 베런즈가 부활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준혁은 홀로 남아 신수를 상대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신격을 가진 존재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민하고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신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고민만큼 신수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준혁이 생각하는 신수의 가장 큰 정체성은 다름 아닌 ‘집착’이었다.
반드시 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집착.
그것이 없다면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긴 세월을 견디며 신격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단순히 목표만을 향하지 않는다.
신수라는 놈들의 공통적인 정체성인 만큼, 거의 모든 일에 집착한다.
준혁만 보면 미쳐 날뛰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준혁은 이 신수들이 새로운 집착을 품게 되었으리라고 보았다.
바로 자신들을 모욕한 던전 시스템에 대한 앙갚음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물론 준혁이 모르는 면도 있었다.
신수가 ‘법칙’이라 부르는 시스템을 향한 적대감이었다.
배면계 시스템이 소환한 인간들에 의해 매번 봉인당했던 그 기억도, 지금 던전 시스템에 대한 분노에 장작을 밀어 넣었던 것이다.
-시작한다.
준혁의 말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다.
-그런데 시간 좀 걸린다. 그때까지 버텨.
-뭐라?
과호루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폭주한 던전 시스템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수의 사정일 뿐.
준혁은 다시 ‘심안’을 펼쳤다.
“큭!”
하지만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갈 뿐 ‘심안’이 발현되지 않았다.
‘이런 젠장!’
이유는 간단했다.
직전의 싸움에서 ‘심안’을 사용하느라 과도할 정도로 에테르를 소진한 탓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이 뒤집힌 던전 시스템은 신수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었다.
-크아아악!
신수들의 입에서 수시로 고통에 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신수들은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당연히 신수들의 목숨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숲의, 시스템 코어의 일부가 망가진 데 대한 응징이 끝나면 던전 시스템은 코어를 이전하려 할 것이다.
준혁은 그것을 막아야 했다.
그런 일을 혼자 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러니 신수들이 진짜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했다.
“쯧!”
준혁이 꺼내 든 방법은 인벤토리에서 꺼내는 엘릭서였다.
처음 봉인이 풀린 후 카이르무스를 사냥하며 얻은 엘릭서는 모두 네 개였다.
그중 준혁이 사용한 것은 핵 공격을 받은 후 마신 하나가 전부였다.
그때 이후로 엘릭서는 정말 필요할 때만 쓰기 위해 아끼고 아껴 왔다.
지금은 꼭 써야 했다.
주저 없이 엘릭서를 들이켰다. 곧장 바닥났던 에테르가 차오르고, 온몸에 힘이 넘쳤다.
‘심안.’
장치를 만드는 데 ‘심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필요했다.
시간 때문이었다.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한 시간이 아닌 생각할 시간.
머릿속에 떠올린 장치의 설계를 이미지로 만들어 겹겹이 쌓아 올릴 시간이 필요했다.
‘심안’은 생각을 시각화하는 스킬이지만, 감각과 사고를 가속시키는 스킬이기도 했다.
지금 순간에 가장 필요한 스킬인 셈이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준혁은 머릿속 이미지를 구체화시켜 갔다.
준혁의 세상 속에서는 한없이 느리게 흐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쾅, 콰쾅!
-이, 이놈이!
신수들이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리지만, 던전 시스템은 그 모든 외침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신수들도 마냥 맞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다섯 중 하나가 당하는 동안 나머지 넷이 온 힘을 다해 던전 시스템을 공격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어떤 공격도 시스템에게는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원래도 무서울 정도로 강한 놈이었는데, 준혁과 신수가 싸우는 동안 코어를 이전하면서 더 강해진 모양이었다.
“그만 죽어…….”
오른손에 한껏 힘을 끌어모으던 시스템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준혁이 서 있었다.
그리고 준혁의 손에서 빠르게 떠오르는 하얀빛 덩어리.
시스템은 그것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장치였다.
장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감히!”
퉁!
가볍게 튕기는 소리와 달리 빛의 속도로 준혁을 향해 날아가는 시스템의 신형.
준혁도 당연히 그런 시스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심안’으로 한껏 느려진 감각 속에서.
‘조금만 더!’
실제 시간 속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심안’의 감각 속에서는 그 속도가 더디기만 했다.
그렇잖아도 ‘심안’으로 과부하가 얹힌 상태였다. 그런데 장치를 만드는 데도 사고의 가속이 필요했다.
이는 혼원 길드 사람들에게 ‘게이트 오픈’을 심을 때도 있었던 현상이다.
과부하에 한층 더 기어를 높인 탓에 준혁은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다.
시스템과의 거리는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시스템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신수들을 최대한 멀리 날려 보낸 채 싸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됐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장치가 준혁의 손안에 담겼다.
직선으로 날아오는 시스템의 주먹과 그 앞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잔상을 살폈다.
‘저놈도 마음이라는 게 있나?’
머릿속으로는 순간적으로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몸은 이미 시스템의 주먹질에 반응하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와 자세, 날아와 꽂히는 주먹의 궤적, 그리고 저 멀리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신수들의 위치까지.
무서운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력한 시스템을 상대하는 데도 ‘심안’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준혁은 황급히 상체를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장치를 신수들을 향해 날렸다.
날아오는 주먹이 자신의 가슴팍 앞을 스치는 타이밍이었다.
시스템이 준혁이 날리는 장치를 막는 것조차 대비한 절묘한 각도.
파앙!
준혁은 시스템의 주먹을 휘감고 있는 맹렬한 에테르에 휘말려 그대로 날아가 처박혔다.
“미친!”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분명 피했는데, 그 여파만으로 몸이 튕겨 날아갔다.
끔찍할 정도로 강한 놈이다.
하지만 목적만큼은 달성했다.
우웅-!
묵직한 소음과 동시에 다섯 마리 신수가 하나의 점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인간의 형태로 합체한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다시 힘을 얻게 되면 역으로 준혁을 공격할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저 다섯 신수를 합치게 만들 장치는 준혁이 만드는 것이다.
던전 시스템이 만들었을 때처럼 일일이 파괴할 필요도 없다.
본인이 만들었으니, 장치를 해체하는 정도는 생각만으로 가능하다.
그렇기에 준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외쳤다.
“맡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혁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준혁이 자리를 뜨는 것과 동시에 신수가 시스템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르릉!
신수와 시스템 사이에 거대한 뇌전이 번뜩였다.
‘음?’
몸을 물리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신수의 힘이 자신과 싸울 때보다 훨씬 더 강했다.
‘뭐지?’
준혁이 만든 장치는, 시스템이 만든 것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그러니 장치 때문에 더 강해졌을 리는 없었다.
준혁은 재빨리 ‘탐색’과 ‘심안’을 통해 신수를 살폈다.
“하!”
준혁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저것들 진짜 집착 하나만큼은…….’
신수는 자신의 근원을 태우고 있었다.
신격의 증거인 근원을 태워 그것으로 제 힘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생명력을 끌어와 공격력을 증폭시킨 셈이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배신하고 모욕한 시스템을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징그러운 것들!’
준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자신과 싸울 때 저런 짓을 했다면, 그때는 정말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신수에게 자신들의 염원이 더 중요했기에 근원을 태우는 짓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스템과 싸웠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은 결코 시스템을 죽일 수 없고, 반대로 시스템은 반드시 자신들을 죽일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모든 것을 던지고 싸우는 것이다.
준혁은 서둘러 고개를 털며 빠르게 달렸다.
신수가 시스템을 상대하는 동안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했다.
숲을 없애야 했다.
준혁 앞에 떠오른 술식이 빛나고, 뒤이어 네 마리 화룡이 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시뻘건 화광이 빽빽한 숲을 붉게 물들였다.
“네놈이 감히!”
반사적으로 숲의 이상을 알아차린 시스템이 준혁을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준혁은 여전히 ‘심안’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엘릭서를 통해 에테르도 가득 채워진 상태라 아직까지 몸에 무리도 없었다.
황급히 바닥을 굴러 피하는 순간, 시스템이 준혁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 숲으로 뛰어들었다.
화룡들이 여지없이 터져 나갔다.
황급히 불을 끈 시스템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또다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세찬 물줄기가 숲으로 쏟아져 내렸고, 숲은 어느새 흠뻑 물기를 머금었다.
보통의 빗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한 불길에도 증발하지 않는 물이다.
준혁의 ‘화룡연무’를 원천봉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준혁은 손에 든 에테르 창을 어느새 거대한 도끼로 바꾸었다.
수평으로 휘두른 도끼날이 거대한 나무의 밑동을 두드렸다.
쩌엉!
요란한 소리가 새롭게 숲을 진동시켰다.
“멈춰라!”
당연히 시스템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스템은 준혁에게 닿지 못했다.
어느새 끼어든 신수 때문이었다.
“큭!”
와락 인상을 구긴 시스템의 손에 새하얀 빛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손안에 가득 찬 빛 덩어리를 신수를 향해 내쏘려는 찰나.
빠악!
어느새 달려든 준혁의 일격에 시스템의 팔이 격렬하게 튕겨 올라갔다.
시스템이 하려던 것은 하나로 합친 신수를 다시 흩어 놓는 장치였다.
‘심안’의 감각 속에서 그것을 가장 먼저 파악한 준혁이 미리 달려들어 분리를 막은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친 시스템이 준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준혁은 또 한 번 그것을 피해 냈다.
뒤이어 신수가 다시 전장에 뛰어들었다.
준혁이 나무를 넘기고, 시스템이 그것을 막고, 신수는 시스템을 방해하고, 시스템이 신수를 흩어 놓으려 하면 다시 준혁이 그것을 막는다.
똑같은 패턴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반복될 때마다 한 그루씩 한 그루씩 나무가 넘어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숲의 나무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를 일.
시스템은 결국 결심을 했다.
꽈아앙-!
시스템이 힘껏 땅을 두드리는 순간 거대한 압력이 준혁과 신수를 후려쳤다.
“크윽!”
타격이 아닌 우악스럽게 밀어내는 힘이었다.
온 힘을 다해 버텨 보지만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러다 결국 발이 붕 떠오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튕겨 날아갔다.
한참을 날아가 땅에 처박힌 준혁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다시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숲의 상공에 떠 있는 시스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준혁은 저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또 무슨?’
시스템이 숲을 향해 거대한 빛 덩어리를 던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