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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장. 동맹#1-
가장 먼저 부서진 것은 하늘이었다.
새까만 하늘에 쩌적 금이 가며, 그 틈새로 새하얀 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후두둑! 떨어진 하늘의 파편이 파스스! 부서지며 가루가 되더니 마지막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하늘부터 시작해 무너져 내린 신수가 만들어 낸 세상은 빠르게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당연히 거대한 몸집으로 준혁을 공격하던 다섯 마리의 신수도 육체가 무너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은 원래 서 있던 그 황무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신수는 움직임이 없었다.
“큭!”
준혁은 짧은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긴 시간 유지한 ‘심안’으로 인해 걸렸던 과부하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속을 얻기 위해 일부러 얻어맞은 등의 통증도 한몫을 했다.
준혁은 고통에 이를 악문 채 신수의 상태를 살폈다.
찡그린 준혁의 표정 속에서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신수 주위로 보이는 잔상이 변하고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신수 주위의 잔상이 서서히 변하더니 지금은 해함, 하하구, 과호루, 야천, 만재의 형태로 갈라져 요동치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하나로 합쳐졌던 신수가 다시 원래의 다섯 마리 신수로 나뉜다는 의미다.
이 정도 왔으면 굳이 ‘심안’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후우, 후!”
매우 느리게 흐르던 세상이 다시 빨라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지만, 준혁은 빠르게 원래의 감각을 회복했다.
그때였다.
쩌정!
뭔가 깨지는 듯한 소음이 크게 울리더니 갑자기 거대한 존재감들이 솟구쳐 올랐다.
-김준혁!
-네놈은 도대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나뉜 다섯 마리의 신수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신수들의 목소리에는 짙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지금 이놈들은, 조금 전 창조된 세상에서 본 놈들과 다르다.
창조된 세상 속에서 만났던 이놈들은 각각이 2.5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각각 1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1의 힘은 다섯이라도 결국 1일 수밖에 없었다.
파앙-!
공기를 터트리며 쏘아져 나간 준혁의 신형이 보이지 않는 도마뱀, 만재의 턱을 쳐올렸다.
육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놈이다. 하지만 놈이 영력을 사용하는 한 ‘탐색’의 시야에서도 숨을 수는 없다.
크게 들린 턱을 지나 곧장 배 아래로 위치를 옮겼다.
주먹을 쳐올리며 ‘천천’을 사용한다.
강렬한 충격에 만재의 거대한 몸뚱이가 중력을 거스르며 솟아올랐다.
-이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따라붙은 놈은 흑표범, 야천이었다.
거대한 앞발이 날아들고, 그에 따라 영력과 함께 주변이 갑자기 깜깜하게 변했다.
콰콰콰쾅!
주변을 에워싼 어둠이 거칠게 준혁의 전신을 두드려 댔다.
하지만 지금 준혁은 풀 도핑 상태였다.
거듭된 성장과 재각성, 거기에 더해진 ‘몰아일체’와 ‘전이’로 증폭시킨 준혁의 상태는 1의 힘을 가진 신수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통증이 없다는 건 아니다.
“큭! 이럴 때 진짜 짜릿하더라!”
통증이 짜릿한 게 아니었다.
이 정도 타격을 웃으면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거다.
목숨 걸고 싸웠던 신수를 이렇게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 손으로 만재의 이빨 하나를 그러쥐고, 남은 한 손으로는 야천의 발톱을 틀어쥐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두 마리 신수가 발톱과 이빨을 잡힌 채 작디작은 인간에게 휘둘려지는 꼴이 대놓고 비현실적이다.
물론 두 마리 신수에게는 극도의 리얼리티.
-으, 으윽!
-놔라, 이놈!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준혁 주변의 빛이 쉴 새 없이 점멸한다.
야천이 가진 권능의 기본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상대의 정신을 옭아매고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어둠이었다.
그 어둠이 지금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어둠을 이용한 그 어떤 권능도 준혁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만재 또한 마찬가지.
만재의 권능은 빛이었다.
가시광선의 영역의 빛으로 세상을 교란시킨다.
놈은 투명한 것이 아니라,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빛을 이용해 환상을 만들고 현실과의 경계를 비틀어 버린다.
물론 그런 만재의 능력 또한 지금의 준혁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크으읏!
신수들은 단 한 번도 힘으로 밀려 본 적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배면계로 소환된 수많은 인간과 싸웠고, 수도 없이 봉인당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힘으로 휘둘린 적은 없었다.
홀로 그 아수라장을 헤쳐 온 준혁도 힘으로 신수를 봉인한 적은 없었다.
그런 놈들이 이렇게 우악스러운 힘에 휘둘리니,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준혁은 끝없이 ‘천천’을 반복하며, 허공에 뜬 채 두 마리 신수를 가지고 놀았다.
-그만둬라!
-멈춰라, 도살자!
바닥에 남아 있던 해함, 하하구, 과호루가 황급히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나머지 세 마리 신수를 확인하려던 준혁의 고개가 갑자기 한 지점에서 덜컥 멈췄다.
숲이었다.
시스템의 코어의 상징인 숲이 가장자리부터 나무들이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이 새끼 급했구나!’
신수에게 준혁을 상대하게 만들고, 그사이 자신은 시스템을 이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몰랐으면 모르되 아는 이상 그냥 둘 수 없는 법.
때마침 아래에서 뛰어오른 세 마리 신수가 들이닥치는 시점.
세 마리 중 가장 가벼운 축에 속하는 해함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빠아악!
거센 소음과 동시에 해함의 거대한 몸뚱이가 허공에 길고 긴 포물선을 그린다.
착지점은 문제의 숲.
끝이 아니다.
손에 잡고 있던 야천과 만재 또한 숲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용, 과호루에게 손을 뻗었다.
쾅, 콰쾅!
거대한 신수의 추락으로 숲의 일부분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시스템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 멍청한 짐승 놈들!”
하지만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머지 과호루의 거대한 몸뚱이가 숲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큭!”
시스템이 황급히 위로 솟구쳐 날아드는 과호루를 받아 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강력한 한 줄기 기운.
빠아아악!
준혁의 주먹이 통렬하게 시스템의 안면을 강타했다.
“어?”
하지만 당혹성을 흘린 쪽은 오히려 준혁이었다.
온 힘을 다해 휘둘렀는데도 시스템은 고개만 거칠게 돌아갔을 뿐, 그 자리에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몰려오는 경각심에 준혁은 황급히 몸을 물렸다.
거의 동시에 준혁이 있던 공간이 통째로 뒤틀렸다.
‘미친!’
합체한 신수와 아주 고된 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코어의 일부를 이전했을 뿐인 시스템의 힘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져 있었다.
이놈이 모든 것을 이전했다면 얼마나 더 무서워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라도 놈이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살자-!
굉음과 함께 갑자기 땅이 울렸다.
콰르르륵!
숲 가장자리의 흙이 밀려나며 무언가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거대한 바위산 신수, 하하구였다.
아무리 준혁이 강해졌어도, 땅에 붙어 있는 놈을 내던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숲으로 왔는데 놈이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하하구의 등장에 준혁보다 시스템이 먼저 반응했다.
“이 미친놈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하구의 등장으로 숲이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스템은 황급히 과호루를 멀리 집어 던지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시스템이 착지와 동시에 땅바닥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크아악!
동시에 하하구가 비명을 내질렀다.
“허!”
그 모습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하구의 베이스는 바위다.
배면계에서 처음 하하구를 만났을 당시 준혁은 꽤 놀랐었다.
곤충을 베이스로 한 신수도 보았고, 나무를 베이스로 한 신수도 보았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영양분을 먹고 성장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위는 무생물이다.
성장이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과연 이 존재에게 신수의 수(獸)라는 글자를 붙이는 게 맞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놈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생물, 감각이 없는 무생물이 죽을 듯이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은 한 편의 풍자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가 질렸다.
뭐 저런 무지막지한 놈이 다 있단 말인가.
‘미치겠네!’
저런 놈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막막한 기분만이 밀려왔다.
콰르르륵!
거대하게 솟아 오른 바위산의 일부가 뭉텅 쪼개져 나가며 푸스스 흩어졌다.
-역시 법칙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든 것은 해함이었다.
땅에서 솟구친 수십 개의 거대한 집게가 시스템을 향해 날아들었다.
뒤이어 급히 정신을 차린 하하구 또한 시스템이 딛고 있는 바닥을 무너트리며 놈을 파묻는다.
나머지 세 마리 신수 또한 시스템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또 뭔…….’
홀로 덩그러니 놓인 준혁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저들끼리 싸워 대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얼핏 이해가 가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동맹의 상태인데 다짜고짜 자신들을 공격하니 배신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준혁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거 괜찮은데?’
준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체 없이 다섯 마리 신수를 향해 ‘감응’을 펼쳤다.
-어이.
갑작스레 텔레파시로 말을 거는 준혁의 부름에 다섯 마리 신수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혁은 신수를 향해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잠깐 손을 잡아 볼까?
-손을 잡는다고?
-그래, 나하고 손잡자. 저 새끼 마음에 안 들잖아?
-무슨 꿍꿍이지?
-나도 저놈이 제일 싫거든.
그런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다섯 마리 신수와 시스템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섯 마리 신수는 준혁을 상대로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었다.
그런 신수들이 시스템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질없다.
-음?
-우리가 손을 잡아도 이 법칙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
흥분하기는 했어도 매우 냉정한 판단을 하는 과호루였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저 다섯 신수에 준혁이 끼어도 현재의 시스템을 상대로는 중과부적이었다.
하지만 준혁에게는 매우 강력한 카드가 하나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다시 혼종으로 만들어 주지.
-뭐?
그 말에 다섯 신수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속에 짙은 불신이 깃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준혁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시스템, 아니 너희가 말하는 법칙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 그렇지만 어찌 인간이?
준혁은 시스템을 갖고 있고, 장치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모든 힘의 근원인 에테르를 다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치를 만드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혼원 길드의 헌터들에게 ‘게이트 오픈’ 스킬을 심어 준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물론 아주 새로운 장치를 만드는 것까지는 아직 무리였다.
하지만 한 번 본 장치를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과호루가 급히 물었다.
-그 말에 거짓은 없는가?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하고 나서 손잡으면 되잖아?
이번에도 신수들은 냉정하게 결정을 했다.
-좋다, 도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