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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장. 원정#5-
“씨발!”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얼음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싸늘한 감각이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죽는다!’
본능이 알리고 있었다.
저 빛은 맞는 순간 죽음이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준혁의 신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평소 준혁이 공격을 위해 사용했던 ‘천천’이 아주 오랜만에 원래의 회피 목적으로 사용됐다.
순식간에 구름 위로 솟구친 준혁이 바쁘게 아래를 살폈다.
하지만 눈에 보여야 할 새하얀 빛, 시스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
“흡!”
황급히 양손을 뻗어 머리 뒤로 넘겼다.
바쁘게 뽑아 든 무상곤과 에테르로 만든 육모방망이가 X 자로 교차하는 순간, 그 교차점에 거대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꽝!
“끄윽!”
충격과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최대한의 힘에 ‘와해’까지 일으켜 막았는데도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충격이었다.
‘미쳤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준혁은 황급히 두 팔을 움직여 단단하게 방어하며 몸을 움직였다.
초인에 가까운 준혁의 눈으로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빠바박!
온 힘을 다해 피하고 막았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단단한 가드를 뚫고, 영민한 회피를 추적해 들어온 시스템의 곤봉이 준혁을 두드렸다.
“끄윽!”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 방 맞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콰앙-!
숲 한가운데 커다란 구덩이가 파이며 먼지구름이 솟구쳤다.
준혁이 처박히며 만들어진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 가장 깊숙한 바닥에서 준혁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타개책을……. 윽!’
찌르르한 고통과 동시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손등에 박힌 적사의 송곳니, 준혁의 힘을 증폭시켜 주는 적사의 ‘전이’였다.
도핑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래의 한계를 넘어 날카로워진 감각이 시스템의 공격을 읽어 냈다.
날카로운 바람이 귓바퀴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직전처럼 제대로 맞는 공격이 없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최대한 흘린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한 가지 사실.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잊은 채 싸우고 있었다.
‘몰아일체!’
풀썩!
입고 있는 묵린갑부터 시작해 모든 장비들이 빛으로 변하며 준혁에게 빨려 들어갔다.
‘몰아일체’에 ‘전이’까지.
이 상태가 기존에 준혁이 낼 수 있었던 최고의 힘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하나를 더했다.
‘몰아일체!’
신수의 사체를 이용해 만든 육모방망이마저 빛으로 변하며 준혁에게 흡수되었다.
“크읏!”
깊은 곳에서 거대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시스템 또한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는 거대한 힘을 뿜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콰콰쾅!
굉음이 울리며 두 초월적인 존재가 맞부딪쳤다.
여전히 폭주하는 시스템보다 힘의 우위는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준혁도 밀리지는 않았다.
최대한으로 증폭된 힘과 수많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힘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준혁은 날아드는 곤봉의 궤적 안으로 오히려 손을 밀어 넣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곤봉과 준혁의 손목이 만났다.
‘큭!’
아직 타격점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실린 힘이 무시무시하다.
손목으로 빗겨 받았는데도 그대로 힘에 짓눌릴 듯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오히려 곤봉을 휘감듯 손목을 돌렸다.
마치 나뭇가지를 휘감은 뱀처럼 준혁의 손이 곤봉을 움켜쥐었다.
“끅!”
곤봉에 닿은 피부가 그대로 불타 버릴 듯한 작열감이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준혁은 오히려 곤봉을 쥔 손에 한층 힘을 주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큿!”
갑작스러운 변칙에 놀란 시스템이 곤봉을 뺏기지 않으려 손아귀에 바짝 힘을 주고 당긴다.
양쪽에서 당기는 두 개의 힘이 서로 만나려는 극히 짧은 찰나.
준혁이 당기던 힘을 풀었다. 그 대신 크게 한 발 앞으로 디디며 오히려 밀어냈다.
아무리 시스템이라 해도 인간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균형 감각도 인간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은, 양쪽에서 힘주어 당기다가 반대쪽이 힘을 빼고 오히려 밀어 버리면 몸의 균형이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균형이 무너진 시스템이 황급히 발을 움직이며 중심을 잡으려는 찰나.
이미 깊숙이 들어온 준혁이 한껏 몸을 낮춰 시스템의 품 안으로 들어섰다.
빠악!
정확한 힘의 이동을 따라 몸속의 에테르가 기민하게 반응하며 하나의 타격점을 향해 폭포처럼 쏟아졌다.
준혁이 팔꿈치로 쳐올린 것은 시스템의 명치 부위.
강렬한 충격에 시스템의 몸이 붕 떠올랐다.
준혁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시스템의 어깨를 그대로 잡아 걸어 땅바닥을 향해 내다 꽂았다.
꽈아앙-!
“크악!”
하지만 비명을 지른 것은 오히려 준혁이었다.
땅에 처박히는 순간 시스템이 또 한 번 빛을 터트리며 오히려 준혁을 날려 버렸다.
재빨리 바닥을 구르며 충격을 흩어 낸 준혁이 전면을 살폈다.
‘젠장! 이거 도대체 어떻게 상대를 해야……. 아, 가만?’
막막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찰나,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처음 시스템과 싸울 당시에 준혁은 ‘몰아일체’도 ‘전이’도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 상태로도 준혁은 시스템을 궁지로 몰아넣었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카잔시에서 싸울 당시만 해도 준혁은 ‘몰아일체’와 ‘전이’를 사용하고 대율의 사체로 급하게 무기를 만든 후에야 시스템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이 없는 상태로 시스템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었다.
환수들을 지구로 데리고 왔을 당시였다.
그때도 준혁은 도핑 없이 시스템에게 맞설 수 있었다.
그 당시 시스템이 방어력만 극한으로 올라가고, 공격력이 낮아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도핑 없이 시스템을 상대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뭐지?’
이런 때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시스템이 약해졌거나, 준혁이 강해졌거나.
준혁은 카잔시에서 싸울 당시와 비교해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시스템이 약해진 것인가?
아니, 지금 저 모습을 보면 결코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
‘제약이 걸려 있나?’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제약은 무엇으로 인해 생긴 것인가.
“하!”
준혁이 한숨처럼 웃음을 토했다.
‘여기!’
시스템의 코어로 추측되는 이 숲이 놈의 제약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숲이 망가지는 모습에 강제로 제약을 풀었다.
지금 폭주하고 있는 저 모습이 그 증거였다.
“어디 갈 데까지 가 보자!”
호통치듯 고함친 준혁의 두 손이 움직였다.
“화룡연무!”
“멈춰라!”
시스템이 광포하게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준혁은 빠르게 시스템과 거리를 벌리며 사방으로 ‘화룡연무’를 쏘아 냈다.
과격하게 풀어놓은 화염의 용들이 빽빽한 수림을 마음껏 헤집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사방이 붉게 물들고, 숲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구쳤다.
“끄아아아!”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른 시스템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폭사된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린 듯, 수십 번의 번쩍임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숲은 언제 불타고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불길이 꺼졌다.
하지만 준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불길을 날려도 또다시 화룡을 불러낸다.
“크아아아! 뭣들 하느냐! 이 미천한 짐승 놈들아!”
시스템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저건 또 무슨… 아니, 가만! 짐승?’
준혁이 신경을 거스르는 한 단어에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
어디선가 기묘한 소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던 준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미친!”
황급히 땅을 박찼다.
피잉-!
바람이 방금 전 준혁이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가까스로 그것을 피한 준혁이 빠르게 위치를 잡으며 주변을 살피는 사이,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렸다.
“숲은 훼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계약이 유효한 동안 우리는 동맹이지.
“그 말 믿어 보지.”
그리고 준혁이 끼어들었다.
“너는 잘도 분탕질을 쳐 놓고 남한테는 못하게 하냐?”
시스템에게 하는 말이었다.
시스템의 폭주로 숲의 일부가 망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준혁의 시선이 자연스레 새롭게 등장한 무언가에게로 향했다.
“이건 또 무슨 끔찍한 혼종이냐?”
-비웃는 것인가, 도살자?
준혁을 향해 ‘도살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존재는 배면계의 신수들밖에 없었다.
“그거야 니가 받아들이기 나름.”
-후후! 나 스스로도 그리 달갑지는 않은 모습이니 너의 감상도 충분히 이해한다.
신수는 의외로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알면 다행이고.”
-하지만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지.
“그래?”
준혁은 아예 팔짱까지 낀 채로 가만히 신수의 모습을 보았다.
한참 동안 입을 닫은 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인 준혁, 그리고 그런 준혁을 지그시 바라보는 신수의 모습은 묘한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신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준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하나 물어보자.”
-물어보라.
“그렇게까지 해서 원하는 게 도대체 뭐냐?”
-우리가 원하는 것, 네가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격’이 아닌 ‘신’이 되고자 하는 그거 말하는 거냐?”
-그렇지.
“뭐, 그거야 들어 보기는 했지.”
-우리는 그만큼이나 간절하다. 이런 간절함, 너 또한 한 발 들이고 있기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한 발 들여?”
-너의 ‘격(格)’.
“음!”
이는 린디웨에게 들었던 그 내용이었다.
무급(無級), 신의 격을 얻기 전 신수들의 상태를 통칭하는 그 단어.
하지만 준혁은 단 한 번도 그런 ‘격’을 얻고자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상태가 신격에 가까워지는 상태라 해도 딱히 거기까지 닿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당연히 ‘신’이 될 생각도 없다.
그러니 이놈이 말하는 간절함 따위 준혁에게는 없었다.
다만 지금 눈앞의 모습을 보면 진짜 간절하기는 한 모양이다.
“그런 몰골이 되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건가?”
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두 눈에 깃든 감정의 한편에는 짠한 마음도 있었다.
그 감정을 읽은 놈이 말했다.
-동정하는 것인가?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우리 사이에 그런 감정이 생기기는 힘들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뭐 짠하기는 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섯.
준혁이 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지금 눈앞의 ‘혼종’은 최소 다섯 마리의 신수가 뒤섞여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용의 그것이다.
팔과 손 또한 사람과 아주 유사하지만 오른쪽은 시커먼 털과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 있었고, 왼쪽은 파충류의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다리도 마찬가지다.
왼쪽은 바윗덩어리였고, 오른쪽은 갑각류의 외골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인 것은 놈의 전체적인 실루엣이 인간의 외형이라는 사실이었다.
놈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인간의 외형을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괜히 끔직한 혼종이라 말한 게 아니었다.
가만히 놈을 바라보던 준혁이 입을 열었다.
“뭐, 긴 얘기 필요하겠냐? 이제 시작하자.”
뇌까리듯 말을 던진 준혁이 불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야지. 우리의 결말은 늘 이랬으니까.
“덤벼!”
콰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