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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장. 원정#4-
거대한 두 마리 화룡이 좌우 양쪽으로 흩어졌다.
정확하게는 용의 형상으로 빚은 불덩어리다.
화르르르!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의 높이로 대지를 훑는 두 마리 화룡, 그 뒤로 거대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
시스템의 얼굴에 악귀와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파앙!
시스템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빛 덩어리가 두 마리 화룡을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미 번지기 시작한 들불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하늘을 향해 번쩍 손을 뻗는다.
과르르릉!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갑자기 밤이라도 된 듯 사위가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분위기였다.
물론 준혁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어딜!”
짧은 외침과 함께 그대로 시스템을 향해 쇄도했다.
손에는 어느새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육모방망이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무상곤이 아닌, 신수의 사체를 이용해 새롭게 만든 물건이었다.
당연히 ‘와해’가 깃들어 있다.
빠아악!
육모방망이를 쥔 손을 타고 묵직한 충격이 되돌아왔다.
육모방망이를 막은 것은 시스템의 팔, 정확하게는 팔뚝에 토시처럼 착용하고 있는 완갑(腕甲)이었다.
맞닿은 무기와 방어구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육모방망이에 깃든 ‘와해’의 효과가 사라졌다.
준혁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손에 든 육모방망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사이에 준비 많이 했나 봐?”
시스템은 어느새 전신 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까?”
시스템 또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쏴아아!
그리고 시스템이 불러들인 먹구름이 어느새 거센 빗줄기를 쏟아부었다.
빠르게 번지던 들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일단 예상은 맞았고.’
이곳에 오자마자 보았던 황무지, 지금의 초원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시스템이 갖고 있던 장치, 자원, 그리고 그 구성을 상징하는 사물들이었다.
그중 황무지는 실체화한 시스템의 몸에 이미 이식이 끝난 자원이고, 초원의 풀은 아직 이식하지 못한 자원일 터였다.
그래서 해 본 실험이었다.
이 초원의 풀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 자원과 연결되어 있는 거라면?
그리고 준혁의 가정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시스템은 지금껏 보인 적 없는 격렬한 감정을 표출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흡!”
땅을 박차며 쇄도한 준혁의 양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에테르로 만든 빛나는 육모방망이가 소나기처럼 시스템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시스템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느새 곤봉을 하나 꺼내 들어 준혁과 맞서 싸웠다.
길고 짧은 두 자루 봉이 공간을 휘젓는다.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둔탁한 소음이 울리고, 그 위로 날카로운 살기가 오고 갔다.
부웅!
수평으로 커다란 궤적을 그린 시스템의 곤봉이 준혁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재빨리 위치를 바꾸며 곤봉의 궤적을 막아서기 위해 움직인다.
시스템의 눈동자가 빠르게 준혁의 움직임을 살피며 곤봉을 쥔 양손에 밀어 넣은 힘의 균형을 바꿨다.
곤봉의 궤도가 비틀리며 급격하게 낮아져 준혁의 발목을 노렸다.
시스템의 눈이 번뜩 빛을 품었다.
이건 확실하게 먹히는 공격이다.
준혁의 육모방망이는 다시 위치를 바꿀 수 없고, 이미 반대쪽 발을 들고 있기에 발을 들어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순간 준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시스템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 모든 상황이 찰나의 순간에 진행된 일들.
꽝!
굉음과 동시에 준혁의 육모방망이 끝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반발력에 준혁의 몸이 갑자기 옆으로 밀려 나갔다.
육모방망이 끝으로 에테르를 발출하며 그것을 터트려 반발력을 얻은 것이었다.
시스템의 곤봉이 허무하게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반발력에 빙글 돈 준혁이 그대로 바닥을 한 바퀴 굴러 시스템의 발등을 찍었다.
“흡!”
깜짝 놀란 시스템이 황급히 발을 뺀다.
하지만 준혁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신 바닥을 구르며 시스템의 하반신을 쉴 새 없이 공격한다.
캉, 카앙!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모두 피하지 못했다.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드문드문 시스템의 다리 갑옷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스템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시작된 공격이 끝없이 몰아치니 반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됐다!’
쉴 새 없이 시스템의 하반신을 두드리던 준혁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시스템이 입은 갑옷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와해’였다.
‘와해’는 준혁이 얻은 시스템이 준 최고의 무기였다.
오직 던전 시스템을 공격하기 위해 탄생한 스킬이었다.
그런 스킬이 갑옷 하나 걸쳤다고 막힐까?
게다가 저 갑옷 역시 던전 시스템이 만들어 낸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와해’의 치명적인 효과를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 던전 시스템의 왼쪽 다리 갑옷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깜짝 놀란 시스템이 황급히 왼쪽 다리를 뒤로 물렸지만,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더 빨랐다.
빠악!
묵직한 충격과 함께 던전 시스템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육모방망이에 맞은 왼쪽 다리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하나 떨어지며 파스스 흩어졌다.
하지만 준혁은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황급히 바닥을 구르는 시스템을 덮치며 한층 거세게 방망이를 내리찍었다.
꽝, 꽈광!
빗발치듯 떨어지는 몽둥이세례에 정신없이 얻어맞은 시스템의 갑옷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준혁의 몽둥이질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시스템의 한쪽 팔이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이런!”
깜짝 놀란 시스템의 온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고,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준혁을 덮쳤다.
과아아앙-!
징을 치는 듯한 묵직한 소음과 함께 준혁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후우, 후!”
짧게 호흡을 고른 준혁이 다시 달려들고, 어느새 갑주를 새롭게 만들어 낸 시스템이 싸움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싸움은 명백하게 준혁의 우위였다.
보유한 힘 자체는 시스템이 월등히 우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준혁의 우위는 당연한 결과였다.
준혁에게 ‘와해’라는 치명적인 무기가 있는 것도 그 이유였지만, 가장 큰 원인은 경험이었다.
과거의 준혁은 수없이 많은 싸움을 거쳤다.
그중 목숨을 걸지 않은 싸움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을 이기고 홀로 배면계에서 귀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던전 시스템의 싸움 방식은, 자료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페이크 동작도 있지만, 그것 또한 매뉴얼에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힘이 강하기는 해도 경직된, 그리고 정직한 공격만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정석과 파격을 모두 아우르고, 싸움판 자체를 장악하는 준혁에게 교본과 같은 싸움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힘을 뿜어내는 방식으로 밀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시간을 버는 정도에 불과했다.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는 놈이야.’
시스템이 준혁을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찰나, 준혁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뭐지, 저거?’
뒤늦게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시스템의 뒤쪽 저 먼 초원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숲?’
거대한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있는 커다란 숲이었다.
‘황무지, 초원, 그리고 숲?’
황무지도, 초원의 풀도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저 숲의 나무 역시 상징이다.
이 땅 전체가 던전 시스템이 갖고 있는 자원이라고 볼 때, 저 숲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코어?’
린디웨와 함께 방문해 들여다보았던 그것.
준혁이 자아를 잃을 뻔했던 시스템, 아니 세계의 대원칙.
그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풀도 아닌 나무다. 대원칙, 코어가 아니라도 시스템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발견했다면 준혁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부우웅-!
다시 시스템을 향해 짓쳐 들었다.
과격한 공격에 시스템이 흠칫하며 황급히 몸을 물렸다.
거칠게 땅을 찍은 육모방망이에서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굉음이 울리고 사방으로 흙먼지가 비산한다.
‘뭐지?’
지금까지와 다른 분위기의 행동에 시스템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찰나였다.
끼이이익!
자욱한 먼지 속에서 기묘한 소음이 일어났다.
점점 더 알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투투퉁, 쏴아아!
날카로운 기운이 갑자기 하늘 높이 솟구쳤다.
“무슨?”
시스템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하늘로 솟구친 무언가를 보았다.
화살이었다.
이 역시 에테르를 이용해 만들었는지 하얗게 빛나는 화살들이었다.
문제는 화살이 향하고 있는 방향.
“안 돼!”
기겁한 시스템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먼지 속의 준혁은 쉴 새 없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한 번에 10개의 화살이 쏘아져 나가고, 잠깐의 틈도 없이 다음 10개의 화살이 시위에 걸려 허공으로 솟구친다.
순식간에 100여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앞서 쏜 화살이 느리게, 나중에 쏜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며 100개의 화살이 동시에 숲을 향해 쏟아졌다.
숲 위쪽 허공에서 한 점의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사방으로 퍼지며 거대한 빛의 장막으로 숲 전체를 감쌌다.
순간 이동으로 자리를 옮긴 시스템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펼친 거대한 배리어였다.
콰콰쾅!
빛의 장막을 두드리는 100여 개의 화살이 과격한 불꽃을 퍼트리며 폭음을 울린다.
“김준혁…….”
씹어 뱉듯 준혁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 시스템의 두 눈이 갑자기 커다랗게 변했다.
등판에 갑자기 무언가가 찰싹 달라붙었다.
준혁이었다.
“떠, 떨어져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곤봉을 휘두른다.
하지만 직전까지 등에 붙어 있던 준혁은 사라지고, 곤봉은 애꿎은 허공을 훑었다.
‘무극’이었다.
대상과의 거리를 0으로 만들어 주는 준혁의 스킬.
“확실히 네가 더 무겁네.”
무극은 스킬 사용자와 대상 중에 더 가벼운 쪽을 무거운 쪽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이었다.
지금은 준혁이 끌려왔기에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준혁의 이동은 무게와 상관없었다.
던전 시스템이라는 격이 다른 존재를 끌고 올 수 없기에 준혁이 끌려온 것이었다.
준혁이 피식 웃으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기가 코어인 모양이지?”
그 웃음을 본 순간 시스템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머, 멈춰!”
“화룡연무!”
이번에는 네 마리의 화룡이 술식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크아아아!”
시스템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하얗게 물든 손에서 또 한 번 빛이 폭사되려는 찰나였다.
퍽!
강렬한 충격과 함께 시스템의 팔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준혁의 육모방망이가 시스템의 팔을 쳐올린 것이었다.
“넌 나랑 싸워야지?”
한층 짙은 미소와 함께 준혁의 주먹이 시스템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쩌억!
통렬한 타격음과 함께 시스템의 고개가 격렬하게 밀려 나간다.
“죽어라!”
시스템의 분노에 찬 외침이 실체화된 힘으로 변해 숲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시스템의 몸뚱이가 새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으득!
그 모습에 이를 악문 사람은 준혁이었다.
“아놔! 돌겠네!”
번쩍!
세상을 탈백시킬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숲을 불태우던 네 마리 화룡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준혁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언가가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