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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장. 원정#3-
“여긴?”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각이 이상했다.
분명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데 세상이 뒤집어져 보였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이 거꾸로 서 있었다.
물구나무를 선 것도 아닌데 발이 위로, 머리가 아래로 마치 물구나무를 서서 보는 풍경 같았다.
분명 제대로 서 있는데 사실은 거꾸로 서 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다가드는 감각은 매우 기묘했다.
다들 부산스럽게 제 손발을 확인하며 감각을 점검해 본다.
그중 유일하게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준혁 하나뿐이었다.
“여기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감각이 엉키죠. 그냥 신경 끄는 게 좋습니다.”
‘차원’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조금 애매하기는 했다.
정확하게는 허구의 공간이었다.
시스템이라는 것은 원래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위치하는 장소 역시 실존할 수 없다.
실존하는데 실존하지 않는 장소.
당연히 그곳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인 이 공간 역시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사실 준혁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시스템을 통해 습득한 정보를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준혁이 릴리안 우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릴리안 우드가 가운데 서 있고, 그 옆에 무훈 길드 출신의 헌터 몇 명이 서 있었다.
다음 기착지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 사람이 릴리안 우드였다.
그리고 주변의 헌터들은 릴리안 우드가 게이트를 유지하는 동안 호위를 설 사람들이었다.
‘게이트 오픈’을 사용하는 데는 가장 능숙하지만, 실제 가지고 있는 전투력은 지금 이곳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릴리안 우드였다.
첫 번째 게이트를 연 리아 클레르를 포함한 두 사람은 마나 운용을 익히지 못했기에 전(前) 던전 관리자인데도 최약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이트를 열고 유지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괜찮겠어요?”
감각이 비틀린 곳에서 오랜 시간 지내게 되면 어딘가 잘못될 수도 있기에 물었다.
“괜찮습니다.”
릴리안 우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편안하게 대답하며 곧장 두 번째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 통과를 거듭할수록, 공간의 괴이함도 점점 정도를 더해 갔다.
초반에는 주로 감각이 이상해지는 형태였다.
위아래가 바뀌거나, 중력이 쉴 새 없이 뒤바뀌는 식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통과가 일곱 번이 넘어가자 단순히 감각이 교란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으윽! 이거 뭡니까?”
유민섭이 기겁하며 외쳤다. 다른 이들 역시 크게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팔이 있어야 할 곳에 다리가 달리고,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팔이 달려 있었다.
인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준혁이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이 역시 이전에 있었던 감각이 비틀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몸이 변한 게 아니라, 팔다리가 존재하는 좌표가 뒤엉킨 것뿐입니다. 실제로 우리 몸은 멀쩡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준혁도 팔다리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진지하게 말을 하니 이상하게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
“윽! 기분 진짜 더럽네. 막 토할 것 같은데?”
유민섭이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법.
준혁은 얼른 유민섭의 입을 막기 위해 말을 이었다.
“이번에느 유 길드장 차례죠? 어서 게이트나 열어요.”
“으으……. 알겠습니다.”
감각이 교란돼도, 좌표가 뒤바뀌며 몸이 이상해져도 시스템 내부로 향하는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게이트 열기를 거듭한 끝에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준혁과 리쉬옌 두 사람이었다.
마지막 차원은 아예 두 사람의 신체가 서로 뒤바뀐 방식의 이상 현상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배면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최고의 베테랑이었다.
그 정도 이상 현상쯤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리쉬옌이 게이트를 열고, 그 너머로 준혁이 다시 몸을 날렸다.
“흐음, 이건 또 뭐야?”
마침내 시스템 내부로 들어선 준혁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황무지, 저 멀리 지평선까지 온통 메마른 흙으로 뒤덮인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뭐지?”
예전에 왔던 시스템 내부는 이런 장소가 아니었다.
뭔가 현실을 초월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황무지가 나타났다.
‘잘못 왔나?’
혹시나 리쉬옌이 실수해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준혁은 일단 그 자리에 앉아 차근차근 상황을 살폈다.
‘제대로 왔는데?’
엉뚱한 곳에 떨어진 게 아니었다. 리쉬옌은 제대로 게이트를 열었다.
앞서 거쳐 온 차원처럼 감각이 비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분명 던전 시스템의 내부였다.
준혁이 소유한 시스템을 통해 점검해 보아도 똑같은 결론이었다.
“흐음…….”
제대로 온 것이 맞는다면, 시스템 내부의 풍경이 변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었다.
“왜?”
이전에 보았을 때와 지금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시스템.’
던전 시스템이 인간의 형태로 실체화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빛 덩어리였던 것이 금속으로 빚은 것처럼 변하더니, 이제는 진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차이는?
‘없지.’
그렇다면 지금 준혁이 떠올릴 수 있는 환경 변화의 원인은 던전 시스템의 실체화밖에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다 떠올려 보았는데도 명확한 것이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준혁이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발로 뛰어야지.’
벌떡 몸을 일으킨 준혁이 현재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가늠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방향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준혁이 소유한 시스템이 던전 시스템을 조사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평선 끝까지 황무지가 펼쳐진 이 거대한 땅을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으리라.
시스템 코어가 있는 방향을 잡은 준혁이 빠르게 내달렸다.
던전 시스템의 내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지금 준혁의 능력이라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한 시간째 달리고 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처음 보았던 것과 똑같은 풍경만이 눈앞에서 반복될 뿐이었다.
“더럽게 넓네!”
준혁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체력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데미지는 있었다. 똑같은 광경만을 한 시간 동안 보고 있자니 정신이 어디론가 아득히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어?”
그때 주저앉은 준혁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메마른 땅에 아주 작은 틈을 벌리고 찔끔 솟아 있는 푸른 무언가.
새싹이었다.
급히 손을 뻗어 새싹이 있는 땅을 통째로 퍼 올렸다.
새싹이 확실했다.
물론 준혁이 놀란 것은 작은 생명이 힘차게 움을 트고 있다는 데 대한 경이 따위가 아니었다.
변화였다.
시스템 내부는 단순히 황무지 같은 환경으로 변한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싹이 자라는 장소도 있었다.
준혁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원래 달리던 방향으로 다시 내달렸다.
지표면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한 새싹이 아닌 풀로 뒤덮인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이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갑자기 거대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더니,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역시 이번에도 너였군.”
등장한 것은 당연히 실체화한 던전 시스템이었다.
준혁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 아니면 누구겠냐?”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게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군.”
“내가 좀 집착이 쩌는 남자라서 말이지.”
“스스로를 잘 아는 모양이군.”
“그런 셈이지.”
“그래서 여기는 또 무슨 일로 찾아왔지?”
실체화한 시스템의 외형은 또 한 번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준혁이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자냐, 남자냐?”
시스템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원래는 분명 남성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이나 체형, 목소리까지 모두 남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 속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미성이었다. 그런데 그게 남자 목소린지, 여자 목소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완성형으로 가는 중이지.”
“완성형?”
“보다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빚어 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럴 리가?”
준혁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완성된 인간이 자웅동체일 리가 없잖아.”
“너는 항상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준혁 나름대로 회심의 드립이었으나, 시스템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준혁이 시스템과 만담을 하기 위해 던진 말이 아니었다.
진짜는 관찰이었다.
‘음!’
그리고 지금 확실히 눈에 어떤 변화가 들어왔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초원의 풀이 조금씩 말라 가고 있었다.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변화는 지극히 미세했다.
100포기의 풀이 있다면, 그중 1포기가 미세하게 말라 가는 정도.
하지만 시스템이 등장했을 때부터 발밑을 살피고 있던 준혁은 그 변화를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눈앞에 있는 시스템의 얼굴 또한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즉, 지금 이 장소의 환경 변화와 던전 시스템의 육체의 변화가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곳의 환경이 말라 갈수록, 실체화한 놈의 육체는 제 입으로 말한 완성형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상징.’
시스템 내부의 환경이 황무지로 변한 건 일종의 이미지화(化)였다.
현재 시스템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처음 준혁이 떠올렸던 던전 시스템의 실체화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했던 생각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는 뜻이다.
‘조정.’
실체화된 던전 시스템은 자신의 몸 상태를 조정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조정이 끝을 향해 갈수록 실체화한 던전 시스템은 완벽한 인간의 외형을 가지게 됐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 눈으로 확인한 변화까지.
그 조정이라는 것이 던전 시스템을 실체화된 신체에 옮겨 넣는 작업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이놈이 등장한 이유도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방해할까 봐 무서웠던 모양이네?”
준혁이 소유한 시스템은, 던전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였다.
천적 수준으로 겁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심하게 껄끄러운 수준은 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나타난 것.
물론 던전 시스템이 그것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군.”
“과연 그럴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의 양손 위에 거대한 술식이 떠올랐다.
“무슨!”
흠칫 놀란 던전 시스템이 준혁을 막으려 달려드는 찰나, 양쪽에서 떠오른 술식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화룡연무!”
두 마리 거대한 화룡이 열기와 함께 술식을 비집고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