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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장. 원정#2-
“이 에테르라는……. 물질? 에너지? 뭐라고 불러야 하죠?”
서두를 꺼냈던 유민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하게 에너지죠. 지금 손에 든 건 신수의 사체에 에테르가 스며든 거죠. 일종의 배터리?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튼 이것 참 신기하네요.”
그렇게 말한 유민섭이 손에 든 공 같은 에테르 덩어리에 자신의 에테르를 밀어 넣었다.
에테르 덩어리가 둘로 나뉘더니 하나는 검정색 슈트로, 다른 하나는 짧은 지팡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스로 움직여 유민섭의 몸에 걸쳐지고,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장착 상태가 되니 덩어리일 때처럼 빛나지도 않는다.
“진짜 신기하네?”
또 한 번 감탄을 터트리는 유민섭의 모습에 준혁이 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좀 합시다.”
“아니, 신기해서 그러죠.”
유민섭은 저렇게 입었다 벗었다 하기를 벌써 10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준혁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일단 지금 받은 장비들은 각자 스타일에 맞게 만들어진 거니 잘 쓰시고…….”
준혁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고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춘 후, 하던 말을 이었다.
“입금도 잘하시고. 입금 안 되면 강제 회수 합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준혁이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일전에 길드원들 합류시키겠다던 이야기, 어떻게 됐습니까?”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강태웅이었다.
“무훈 길드는 총 10명 합류할 예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빠지겠다고 하더군요.”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강제로 끌고 오려던 것이 아니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 주면 그뿐.
백호진도 입을 열었다.
“백호 길드는……. 안유정 헌터만 합류합니다.”
백호 길드는 원래 A급 헌터로 구성된 길드였다.
모두들 이런 큰 싸움에 선뜻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백호진으로서는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각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다만 연인인 안유정만큼은 강권에 가깝게 설득했다.
백호진이 보기에는 이쪽에 합류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처드 개런이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팀 히어로는 아무도 합류하지 않습니다.”
팀 히어로는 미국의 길드였다.
다들 먼 한국으로 넘어와 거대한 적과 싸우는 일을 꺼려 했다.
모두의 이야기를 들은 준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시간 이후로는 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세 사람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이 바로 말을 이었다.
“환계라는 곳이 있습니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환수들의 세계죠.”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환계를 이야기하니 당연한 반응.
“그곳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네?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 갑자기 그건 왜요?”
결국 참지 못한 유민섭이 물었다.
“우리는 시스템, 그리고 신수와 싸워야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 괴물 같은 것들이랑 싸우는데 가족들 걱정을 하면 안 될 거 아닙니까?”
단번에 준혁의 의도를 깨달은 유민섭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럼 우리 가족들을 위한 대피소 같은 개념입니까?”
“그렇죠.”
준혁의 대답에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중 네 사람의 표정이 매우 복잡하게 변했다.
유민섭과 강태웅, 백호진, 리처드 개런이었다.
무훈 길드, 백호 길드, 팀 히어로에서 합류하지 않은 과거의 동료들을 떠올린 것이다.
유민섭은 원래 무훈 길드를 이끌던 사람이었기에 강태웅과는 같은 마음일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과의 싸움이 만들어 낼 여파는 어디에 어떻게 퍼져 나갈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가족들이 안전한 곳에 대피해 있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리라.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조금 전 준혁이 더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길드원들의 합류는 준혁이 아닌 자신들이 원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온 것이니 더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사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금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그럼 대피소 일부터 마무리하죠.”
준혁이 말했고,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인간들은 참으로 불편하군.
붉은 곰의 말에 준혁이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답했다.
“섬세함이지.”
하지만 붉은 곰 일족의 왕은 준혁의 말은 듣지 못한 척 자신의 말을 이었다.
-먹고, 자고, 싸는 데 저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섬세한 거라고, 이 짐승 놈아.”
-그 말은 모욕적이다.
이전이었다면 당연히 화를 낼 말이었지만, 붉은 곰은 가볍게 그것을 받았다.
함께 신수와 맞서 싸운 덕분에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붉은 곰의 시선 끝에 환계에서는 본 적 없는 것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버스를 개조한 수십 대의 캠핑카였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곳에서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영위할 방법이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천막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끼리 공동체가 되어 지내기 위해 만들어 낸 공공건물 개념이었다.
그 사이로 헌터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장자리에 태양광 패널 설치, 캠핑카 배치, 생활용수 사용을 위한 펌프 설치 등등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도 작업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작업자가 모두 외천급 이상의 각성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고급 기술을 요구하는 게 아닌 이상 육체노동만 하는 것으로는 세상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일꾼들이었다.
-저 길쭉한 건 뭔가?
붉은 곰이 가리키는 것은 각 캠핑카에서 외부로 연결된 파이프였다.
순간 준혁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얼버무리는 듯 설명했다.
“음…….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한 관이지.”
-그렇군.
차마 생활하수를 강에 흘려보내기 위한 파이프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환경오염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괜히 찔리는 준혁이었다.
그런 준혁의 표정은 읽지 못한 채, 붉은 곰이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법칙과 싸우는 동안, 이곳이 습격당할 위험은 생각지 않는가?
“응?”
-인간계에서 우리가 법칙과 싸울 때, 신수라도 한 놈 이곳을 공격한다면……. 저 인간들은 매우 위험해질 텐데?
“굳이 뭐 하러?”
-음?
“우리는 수명에 한계가 있잖아.”
-그렇지.
환계의 환수라 해도 영원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인간보다는 훨씬 긴 생을 살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끝을 맞이한다.
“그래서 필멸의 존재들은 종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번식을 하지. 말 못하는 짐승들도 제 새끼를 목숨 걸고 지키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고……. 인간이나 환수처럼 문명을 이룬 존재들은 그 바탕 위에 감정을 더해. 가족, 혹은 일족 간의 짙은 유대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런 거잖아.”
-인정한다.
“그런데 시스템은 그걸 이해하지 못해.”
-법칙이 그것을 모를 리가 있나?
“뭐랄까? 지식의 형태로는 알아도 공감하지는 못해. 그래서 딱히 가족을 인질로 잡는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지.”
-그러면 굳이 저 인간들을 여기로 대피시킬 필요가 있는가?
“시스템과 우리가 싸우면 지구 전체가 전장이야. 그 파편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잖아.”
잠시 준혁의 말을 곱씹은 붉은 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것을 그리 잘 아는 거지? 마치 놈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을 하는군.
“어. 들어갔다 나왔지.”
-음?
“뭐, 그런 게 있어.”
준혁이 얻은 시스템은 이미 던전 시스템의 내부에 들어가 그 속을 모두 읽었다.
물론 준혁이 갖고 있는 것 또한 시스템이니 그런 감정적인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보를 읽어 내는 사람은 인간인 준혁이었다.
시스템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파악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환수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환계에 만들어진 주거 공간 조성도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
“준비됐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30여 명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쉬옌, 최유나를 비롯한 배면계를 다녀온 10명, 릴리안 우드와 리아 클레르, 그리고 무훈 길드에서 이쪽으로 합류한 헌터와 백호 길드 소속이었던 안유정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각각 다른 길드에 속해 있던 이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혼원 길드로 소속이 변경된 이들이다.
가족들을 환계로 임시 대피 시키고 난 후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던전 시스템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공격이 없기에 다행스러운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조용하니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불안함을 잊기 위해서라도 준혁은 길드원들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게이트 오픈’ 스킬의 훈련이었다.
교관은 릴리안 우드와 리아 클레르였고, 준혁과 배면계 경험자 10명이 훈련생이었다.
준혁 또한 ‘게이트 오픈’은 능숙한 편이 아니었기에 따로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훈련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피훈련자 11명 모두 에테르 사용에 매우 능숙하기에 ‘게이트 오픈’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정확도였다.
머릿속에 어떤 장소를 특정하고, 그 장소에 정확하게 게이트를 여는 데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그런 정밀함의 답은 끊임없는 반복이었다.
그렇게 보름의 시간 동안 보유한 에테르를 모두 소진하고 보충하기를 반복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지금 그 목표치를 달성했기에 원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그럼 리아 클레르부터.”
준혁의 말에 리아 클레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게이트를 열었다.
지이잉-!
이전과 달리 하얗게 빛나는 게이트가 모두의 눈앞에 펼쳐졌다.
늦게 합류한 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란을 떨지는 않았다.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중대한 일에 참여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준혁이 리아 클레르를 향해 물었다.
“얼마나 유지할 수 있겠냐?”
“음……. 대략 하루 정도.”
과거 던전 관리자들은 필요할 때 게이트를 열고, 사용한 후 바로 닫는 방식으로 ‘게이트 오픈’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게이트를 열어 놓은 채 그것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지금 저 게이트의 출구는 지구상이 아닌 다른 차원에 있었다.
예전에 린디웨가 시스템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었다.
시스템의 본체가 있는 장소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장소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복잡한 경로 계산이 필요하고, 게이트를 열어 그 경로를 한 번에 연결할 수 있어야 했다.
린디웨는 시스템 아바타였기에 그것을 한 번에 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한 번에 갈 수 있는 게이트를 열 수 없었다. 여러 장소를 경유해야만 시스템 내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시작부터가 지구와는 다른 차원이니, 게이트를 열어 놓고 유지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빨리 움직입시다.”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성큼성큼 게이트로 들어섰다.
혼원 길드의 헌터들, 일명 시스템 원정 팀이 준혁의 뒤를 따라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