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207화 (207/240)

-207-

-69장. 원정#1-

(혹시 땅 사 놓은 거 없습니까?)

준혁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땅을 물었다.

질문을 받은 유민섭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갑자기 무슨 맥락으로 땅을 물어본단 말인가.

“땅이요?”

생뚱맞다는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준혁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네, 비어 있는 땅. 가능하면 지방 쪽이면 좋을 것 같은데……. 임야 같은 거 사 놓은 거 없습니까?)

있었다.

유민섭의 흑역사가 지금 준혁이 말한 비어 있는 임야라는 키워드로 존재하고 있었다.

헌터를 시작한 초창기, 돈 버는 데 재미를 붙인 유민섭이 속아서 산 땅이 있었다.

개발 호재 어쩌고 하는 얘기에 속아 덜컥 샀다가, 지금 팔지도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 황무지 같은 야산이 하나 있었다.

그 후로 유민섭은 땅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애물단지가 된 땅만 생각하면 이불킥을 백만 번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흑역사는 쓰라리지만 준혁이 이렇게 물어보는 것을 보면 필요하다는 뜻.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 유민섭이 준혁에게 말했다.

“있죠. 저한테 살래요?”

(네? 판다고요?)

“물론입니다. 들어 보니 준혁 씨한테 지금 땅이 필요한 모양인데?”

(아니, 안 쓰는 땅이라면서요. 그럼 잠시 빌려주면 되죠.)

“어차피 준혁 씨가 마음대로 쓸 거 아닙니까? 돈도 많은데 저한테 사세요.”

휴대폰 스피커 너머에서 기묘한 정적이 넘어왔다.

잠시 고민하던 유민섭이 한마디 덧붙였다.

“쯧! 어차피 안 쓰던 땅인데 리조트나 하나 지을까?”

(쳇! 삽니다. 살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축 허가 따위 나오지 않는 땅이었다.

유민섭은 편법과 불법의 줄타기를 통해 허가를 얻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었다.

“콜! 좋습니다. 지금 와서 계약서……. 아니, 그냥 등기부등본 정리하죠. 얼른 오세요.”

(갑니다.)

그렇게 유민섭은 자신의 흑역사 하나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

“어? 어……. 어…….”

쿵, 쿠웅!

땅이 울리고, 풀썩풀썩 피어오른 먼지가 유민섭을 한 차례 휘감고 지나갔다.

하지만 굉음은, 그리고 피어오르는 먼지는 끝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무언가는 하나같이 괴악하게 생긴 것들뿐이었다.

온몸에 팔이 달려 있는 거대한 고릴라, 머리는 하나인데 뒤로 뻗은 몸뚱이가 수십 개나 되는 뱀, 숯 덩어리 같은 거대한 새의 사체.

“이게 뭡니……. 엇!”

질문을 던지려던 유민섭이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한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준혁이 가장 먼저 떨군, 문어라도 되는 양 수십 개의 기다란 몸뚱이를 늘어트린 거대한 뱀의 사체였다.

“에테르?”

그 뱀의 사체에서 에테르가 느껴졌다.

준혁을 통해 거듭 각성하게 된 유민섭은 더 이상 영력이나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에테르를 기본 에너지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몸속의 기운을 운용하는 것은 배면계에서 완벽하게 습득한 상태.

외부의 에테르를 감지하는 것도 이제는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다.

그런 유민섭의 감각에 강렬한 에테르가 전해져 왔다.

“신수?”

괴상한 생김새 때문에 조금은 예상을 했었다.

그리고 사체가 에테르 덩어리로 변하는 것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쿵, 쿠웅-!

그러는 동안에도 준혁은 끊임없이 신수의 사체를 떨궜다.

“아니, 도대체 몇 놈이나 잡아 죽인 겁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물어보지만, 준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신수의 사체를 떨굴 뿐이었다.

그렇게 굉음과 먼지가 멈췄을 때, 유민섭이 준혁에게 팔아 치운 야산에는 무려 서른두 마리 신수의 사체가 널브러졌다.

“허, 허어…….”

입을 헤 벌리고 신수의 사체를 바라보는 유민섭 옆에 준혁이 자리를 잡았다.

탁탁!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가볍게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말이 없다.

그저 가만히 서서 신수의 사체를 감상하듯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수의 사체는 꾸준히 에테르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슬쩍 준혁에게 시선을 던진 유민섭이 물었다.

“저걸로 뭘 할 생각입니까?”

하지만 대답이 없다.

“저것도 뭐 무기 같은 거 만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에 기대감이 실려 있다.

준혁이 갖고 있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준혁이 신수의 사체로 무기를 만든다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 나올까.

그리고 저렇게 재료가 많으니 괜한 기대도 품게 된다.

하지만 준혁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흐음…….”

팔짱을 낀 채 지그시 신수들의 사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민섭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

그 이상한 태도에 유민섭도 더 이상은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준혁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혁이 갑자기 발을 떼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목이 잘린 사자의, 백안의 사체를 향해서였다.

백안의 사체는 에테르화가 마무리돼 있었다.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했기에 에테르화 역시 가장 빠른 것이다.

백안의 사체에 손을 올린 준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테르화가 끝났습니다.”

“네…….”

유민섭이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르화라는 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몰랐다.

하지만 그 명칭과 신수의 사체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테르의 기운을 생각하면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에테르화가 끝나면 좋은 게 뭔지 아세요?”

“뭡니까?”

백안의 사체에 얹은 준혁의 손에서 에테르가 쏘아져 나간다 싶은 순간, 백안의 사체가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준혁의 손에 축구공 크기의 빛나는 공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음껏 성형할 수 있다는 점이죠.”

준혁은 저글링을 하듯 에테르 덩어리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에테르는 영력도 마나도 될 수 있는 힘이죠. 스킬의 근원이기도 하고.”

“예. 그건 저도 압니다.”

“그래서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 것도 굉장히 쉽습니다. 성형과 특성 부여가 편하다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이야기가 나왔는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유민섭이 아니었다.

“장비 제작?”

준혁이 어울리지 않게 검지를 세워 흔들며 감탄하듯 외쳤다.

“빙고!”

“무기를 만들 겁니까?”

“내 무기도 만들고, 사람들 무기도 만들고, 뭐 또 따로 쓸데도 있죠.”

“그렇군요.”

유민섭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준혁이 또 입을 꾹 다물고는 유민섭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탓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참기 힘들어진 유민섭이 뭐라도 말을 해 보려는 찰나였다.

“얼마에 살래요?”

“네?”

유민섭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준혁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이 귀한 걸 공짜로 받으려고 했습니까?”

“물론 그건 아니죠. 제가 언제 공짜로 뭐 받으려고 한 적 있습니까? 그런데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 좀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나도 돈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온 경우는 처음이라 그러죠.”

“그랬습니까? 아무튼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아니……. ‘얼마까지 알아보셨어요?’도 아니고 뭐 하는 겁니까? 그냥 얼마 받고 싶은지 말을…….”

장황하게 이어지려는 유민섭의 말을 준혁이 잘랐다.

“여기 땅값이 얼마더라?”

“네?”

“벌써 잊은 건 아니죠? 여기 등기부등본 정리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허, 허허! 설마 그거였습니까?”

이제야 알겠다.

준혁이 계속 말을 씹은 이유도, 에테르화가 끝난 사체를 가지고 자랑질을 한 이유도 모두 이 한 가지 이유였다.

유민섭이 허탈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억울하다니, 어떤 게?”

능청을 떨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준혁을 보며, 유민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딱 그 가격에 살게요.”

빠른 항복에 준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유민섭의 흑역사는 또 한 편의 외전을 만들었다.

***

-우리 모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환계의 땅도 내어 주도록 하지.

붉은 곰의 말에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들끼리 회의를 하더니 별다른 토론도 없이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 버린 탓이었다.

“왜?”

-왜라니?

“시스템 보고도 별로 긴장을 안 하던데?”

시스템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의사 결정이었다.

다들 긴장하기는 했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지구에서 시스템에게 덤볐다가 재미를 못 보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환수들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환수들에게도 강력한 한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족의 왕은, 자신의 일족을 품으면 그것을 통해 몇 단계나 강해질 수 있었다.

거기에 환수들끼리의 연합도 있었다. 힘을 합치면 전력은 몇 배나 강해진다.

서너 마리가 모이면 신수조차 봉인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이니 의아할 수밖에.

-오해를 하고 있군.

“오해?”

-네 말대로 우리는 놈에게 겁을 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놈을 이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음?”

-놈은 법칙이다. 그리고 법칙이 환계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시스템에 의해 신수들이 환계로 넘어왔었다. 이는 시스템도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싸우면 되는 거 아니냐?”

-놈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인데, 거기에 더해 놈이 환계의 법칙에 영향을 끼친다면?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법칙을 건드린다는 건 환수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환계라는 세계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저들 입장에서는 준혁과 손을 잡고 싸워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준혁을 향해 붉은 곰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상하군.

“뭐가?”

-우리와 손을 잡기를 원했는데,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뭐, 신경 쓰이는 건 짚고 넘어가는 성격이라서.”

-그렇군. 그러면 일단 인간들에게 임시로 내어 줄 땅부터 확인할 텐가?

“좋지.”

-따라오라.

붉은 곰을 따라간 곳은 네모난 모양의 꽤 너른 평지였다.

-여기를 시작점으로 저쪽 강과 산, 그리고 숲의 경계까지다. 이 정도 땅이면 괜찮은가?

붉은 곰의 말에 준혁이 천천히 방향을 틀며 평평한 대지를 훑어보았다.

뒤로는 산맥이 받치고 있고, 산맥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기역(ㄱ) 자로 꺾여 흘렀다.

그렇게 산맥과 물줄기가 세 개의 변을 이루고, 나머지 한쪽 변은 넓은 숲이 경계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준혁이 필요로 했던 것보다 두 배는 됨 직한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절반만 쓰겠다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

-다른 볼일은?

“없지.”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지금부터 그 법칙을 물리칠 때까지 이곳은 인간의 땅이다.

그 말을 끝으로 붉은 곰은 빠르게 돌아갔고, 준혁과 네 마리 환수만 그 자리에 남았다.

준혁은 주변의 지형을 거듭 확인한 후, 인벤토리에서 하얗게 빛나는 덩어리 다섯 개를 꺼냈다.

신수의 사체로 만든 에테르 덩어리였다.

준혁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천천히 자신의 에테르를 불어넣었다.

이제부터는 환계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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