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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장. 협상#3-
준혁의 얼굴에 순간적이지만 막막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시스템이 괜히 시스템은 아니네.’
시스템은 세계의 흐름에 변화를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당장 준혁이 알고 있던 배면계 시스템만 해도 신수의 난동을 제압하기 위해 다른 세계의 사람을 소환할 수 있다.
던전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 인간 세계로 찾아와 게이트라는 것을 만들어 지구라는 환경의 법칙을 뒤흔들었다.
그 정도의 힘이 인간 모습을 가진 한 개체에게 모여 있는 것이다.
약하다거나 만만할 거라 생각하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된다.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후우!”
복잡한 감정을 담은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시스템이 준혁을 향해 비죽이 웃으며 물었다.
“무서운 모양이지?”
“무서운 건 아닌데……. 그냥 죽도록 고생하겠구나 싶네?”
“흐음, 생각보다 자신감이 과하군. 너도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거냐?”
시스템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추측이었지만,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건 또 무슨 반응이지?”
“뭐, 시스템을 등에 업고 있어서 엄청 힘이 되는 건 사실이지. 근데 그래서 자신감이 있는 건 아니거든.”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
“그냥 뭐……. 지금껏 싸운 놈들도 죄다 나보다 강했던 놈들이라 딱히 감흥이 없달까?”
시스템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 지나치게 스스로를 과신하는 성격이구나.”
“과신이라기보다는 축적된 경험에서 나오는 자신감 정도로 해 두자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서 저 짐승들을 우르르 몰고 온 것인가?”
“저런 전력을 동원하는 것도 내가 가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
명백하게 비웃는 표정으로 던지는 말이었지만, 준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아니, 받아넘겨야 했다.
‘시간을 좀 끌어야…….’
지금 당장 싸우는 건 힘들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시스템은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고 저 모습이 완성형도 아니라고 한다.
그에 반해 준혁은 아직 준비가 더 필요했다.
지난번에는 대율을 이용한 무기로 허세를 부려 밀어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힘들 수도 있었다.
지금은 무기도 없었다.
대율의 사체를 이용한 건 이미 흩어져 버렸고, 만상만투의 사체는 아직 제대로 손질도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시간을 끌고,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저 짐승 놈들이 도움이 되기는 할까?”
-죽엇!
갑작스레 영력이 폭발하며 날카로운 황금색 선이 시스템을 향해 뻗어 나갔다.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린다.
-컥!
하지만 신음을 흘린 쪽은 육탄 돌격으로 달려든 황금 까마귀였다.
황금 까마귀를 후려친 시스템의 모습은 평온하기만 하다.
그저 황금 까마귀의 깃털만이 힘없이 흩날릴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 힘인가? 짐승 놈들……. 환계라고 했던가? 환계니, 환수니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참 별 볼 일 없군.”
-감히!
황금 까마귀가 쓰러진 상태에서도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황금 까마귀만이 아니다. 함께 온 모든 환수들이 또 한 번 영력을 폭사시켰다.
하지만 지금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준혁이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구웅!
묵직하게 뻗어 나간 에테르가 환수들을 한꺼번에 감쌌다.
“자자, 진정들 하고.”
그 말에 환수들이 그제야 기운을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환수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준혁과 시스템을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준혁에게는 으르렁거리면서도 섣불리 힘을 쓰지 않았는데, 준혁보다 강한 시스템에게는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내뱉은 말의 정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태도가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자식은 왜 이러지?’
준혁은 이미 시스템을 몇 번이나 만났다.
겨우 몇 번의 만남으로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준혁과 만난 경우는 꽤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달았었다. 그렇기에 시스템의 태도 차이도 준혁은 구분이 되었다.
이전이었다면 시스템 역시 환수들에게 다짜고짜 공격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도발할 뿐 직접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황금 까마귀가 먼저 공격을 했음에도 그저 막아 내기만 했을 뿐이다.
‘왜 이래? 어, 그러고 보니?’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은 떠올랐을 때 바로바로 묻는 게 낫다.
어쨌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할 상황이지 않은가.
“근데 네가 환계나 환수를 어떻게 아냐?”
“나 역시 배면계 시스템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건가?”
“아, 그랬지.”
“그리고 신수 놈들에게도 들었지.”
“아아, 그 새끼들?”
대답을 하는 준혁의 두 눈에 또 다른 의혹이 떠올랐다.
‘뭐지?’
준혁의 뇌리를 스친 것은 기시감이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을 한 번 겪은 것 같았다.
기시감과 함께 떠오른 의문도 있었다.
“오늘따라 되게 친절한데?”
“내가 언제는 친절하지 않았던가?”
“친절하기는 했었……. 아!”
대꾸를 하던 준혁이 불현듯 해답을 떠올렸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던 때가 있었다.
만상만투의 시체를 앞에 두고 등장했을 때.
세상이 뒤바뀌니 어쩌니 했을 그때도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었다.
자연스레 상황이 이해되고, 그것이 질문으로 이어졌다.
“너 뭐 하냐?”
“음?”
“나하고 이야기나 하려고 나타난 건 아닐 텐데?”
준혁의 말에 매우 성실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지금 준혁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이어 붙이는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즉, 시스템도 사실은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시치미를 뚝 떼는 시스템의 모습에 준혁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혓바닥이 길면 둘 중 하나거든.”
“혓바닥?”
준혁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시스템이 불쑥 제 혀를 내민다.
준혁이 한층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쫄리거나, 딴짓을 꾸미거나.”
시스템의 눈꼬리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준혁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것을 본 준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지금?”
“둘 다인 것 같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일단은 테스트부터!’
폭발적으로 쏘아져 나간 준혁은 에테르를 폭사시키며 시스템을 향해 무상곤을 휘두르고 있었다.
굉음과 함께 시스템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또 하나가 이해되었다.
환수들의 태도가 다른 이유. 준혁에게는 덤비지 않고, 시스템에게는 덤빈 이유.
환수들은 지능을 가진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동물이기도 했다.
동물들의 발달한 본능이 시스템을 싸워도 될 상대라고 여겼던 것이다.
시스템이 한참 바닥을 구르며 밀려나고, 준혁이 그 뒤를 쫓았다.
쾅, 쾅쾅!
무상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바닥을 찍어 댔다.
시스템 또한 빠르게 땅을 박차며 준혁의 공격을 피했다.
‘함정?’
갑작스레 변한 상황에 준혁은 저도 모르게 또 하나의 경우를 떠올렸다.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은 아닌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정이었다.
시스템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절대 덤비면 안 될 것 같은, 격이 다른 강렬한 존재감은 그런 걱정을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준혁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저것들 본능을 믿어 보자.’
환수들의 태도와 시간을 끌려는 시스템의 모습, 그리고 싸움을 피하는 현재의 정황까지.
‘전뢰보!’
콰지지직!
새파란 스파크와 함께 준혁의 신형이 뇌전과 함께 앞으로 뻗어 나갔다.
‘태산인!’
콰앙-!
무상곤을 쥔 손으로 넘어오는 묵직한 충격.
‘됐다.’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다.
상태창의 스킬란에는 ‘시스템 운영’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스킬은 오히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타석에 선 타자처럼 힘차게 휘두른 무상곤의 타격.
명확한 각도와 폭발적인 힘이 합쳐지며 시스템의 몸뚱이가 날카로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끝이 아니다.
준혁은 오랜만에 스킬을 마구 날리며 싸웠다.
‘무극’을 사용해 거리를 줄였고, 무상곤을 활로 바꿔 에테르로 자아낸 화살을 날렸다.
‘추종시’가 유도미사일처럼 시스템의 궤적을 쫓았다.
‘폭류격’, ‘천단참’ 등 타격 또한 쉴 새 없이 터트렸다.
‘화룡연무’의 화염이 붉게 타오르고, ‘금륜천전’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땅을 갈랐다.
폭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준혁의 표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졌다.
‘더럽게 단단하네!’
아무리 두드려도 시스템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방어력이었다.
그런데 공격이 형편없었다. 움직임도 느렸다.
날리는 공격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들어오는 공격도 걸치고 있는 묵린갑으로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 이상한 상태는 아마도 조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 조정이라는 게 끝난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괜한 걱정이 앞서던 중, 준혁이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바닥을 한 바퀴 굴렀던 시스템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
도발하듯 질문을 던지지만 준혁은 숨을 고르며 자신만의 생각에 몰두했다.
‘왜?’
시스템의 모습은 여전히 이상했다.
굳이 싸울 생각도 없다. 아니, 싸울 이유가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영원히 결과가 나지 않을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꿋꿋이 버티며 준혁의 공격을 맞아 주고 있는 이유.
‘뒤로 뭘 꾸미고 있기에?’
그때였다.
-주인님!
갑자기 흑호가 준혁을 불렀다. 깜짝 놀란 준혁이 급히 대답했다.
-왜?
어지간하면 준혁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는 흑호의 다급함에 불길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
-환계, 환계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뭐?
-신수들입니다.
준혁이 고개를 홱 돌려 시스템을 노려보았다.
“이거였냐?”
“이제야 알아챈 모양…….”
하지만 여기서 대거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가자!
준혁의 외침과 동시에 흑호가 준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이런!
준혁과 함께 환계로 돌아온 환수들의 입에서 경악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환수들이 일제히 자신의 영력을 폭사시켰다.
동시에 사방에서 강렬한 영력이 터져 나오며 무수히 많은 환수들이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준혁과 함께 인간 세계로 갔던 이들은 모두 일족의 왕들이었다.
그리고 그 왕들이 자신의 일족을 한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하아, 이 새끼들이!”
준혁이 무상곤을 고쳐 쥐며 이를 악물었다.
환계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와 불길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배면계의 신수들이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무려 30여 마리의 신수들이 환계 곳곳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준혁이 뒤를 돌아보며 환수들을 향해 말했다.
“거래 성립이다.”
이쯤 되면 환수들도 던전 시스템의 문제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동의.
-받아들인다.
한꺼번에 긍정의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환수들과 준혁 사이의 계약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먼저 간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준혁의 네 마리 환수가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