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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장. 협상#2-
-땅을 빌리자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말 그대로 내가 여기 환계 땅을 임시로 좀 쓰겠다는 말인데?”
-이유를 말하라.
“일정 기간 동안 세 들어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더더욱 모를 말을 하는군.
“간단하게 말해서, 일정 기간 동안 인간들이 이주해 와서 좀 살아도 되겠냐는 말이지.”
명확한 설명에도 붉은 곰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라, 인간.
“이해가 안 간다고?”
-이 세계에 인간이 들어와 지낸다는 건 죽겠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었다.
각성자라 해도 환계에서는 살 수 없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환계의 독특한 환경이었다.
사람이 사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기부터 지구와 달랐다.
하루 이틀 정도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누적되면 지구나 배면계와는 다른 그 독특한 환경으로 인해 몸에 이상이 생긴다.
두 번째는 환계의 환수들이다.
환수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시스템으로 인해 계약을 맺은 사람에 한해 적대감을 푸는 정도다.
그런데 계약도 맺지 않은 인간이 환계를 돌아다니면 환수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준혁은 이시이 카게루를 이곳 환계에 떨궈 내는 방식으로 응징하기도 했었다.
두 번째 문제인 환수들의 적대감이야 준혁과의 협상으로 어찌할 수 있다고 해도, 첫 번째 문제는 태생적인 한계였다.
붉은 곰은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준혁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한다는 건 방법이 있다는 뜻.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임시로 사람들이 머무는 것만 용인해 주면 돼.”
하지만 붉은 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거야 알지.”
환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환수들이 무리를 이루어 산다.
그리고 각각의 일족들이 자신들만의 독립된 영역을 차지하고 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역으로 인한 분쟁도 있다.
일족의 규모가 커지면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그 과정에서 종족들 사이의 전쟁도 벌어진다.
그런 곳에 인간이 넘어와 지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일을 시행하려면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장 먼저 환계에 있는 모든 종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 후에는 어디의 땅을 내어 줄 것인가?
그로 인해 자신의 영역을 내어 주어야 하는 일족이 손해 보는 영역에 대해, 다른 일족은 얼마만큼의 영역을 양보해 줄 것인가?
하지만 그 전에 붉은 곰이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해관계나 절차적인 문제를 떠나, 붉은 곰 개인의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에테르, 너희 말로는 근원을 다룬다는 걸 잊은 모양이지?”
-근원을 다룰 수 있다고 해도 환경을 바꾸지는 못할 텐데?
“유사하게 만들 수는 있지.”
-유사하게……. 그렇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나는 어디까지나 임시라고 말했잖아?”
-그렇군.
붉은 곰은 금세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린 후 되물었다.
-즉, 너는 그 법칙과의 싸움이 시작될 때 인간들을 이곳 환계로 대피시키려는 생각인가?
“그렇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인간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다. 인간 세상보다 훨씬 좁은 이곳 환계에 인간을 모두 대피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환수가 지구의 인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준혁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내가 무슨 수로 그 많은 인간을 전부 여기로 대피시켜?”
-그렇다면?
“일부만 대피시킬 거다.”
세계의 인구는 무려 70억이 넘었다.
환계의 땅이 넓어서 그 사람들이 임시로 거주할 공간이 있다 해도, 현재 준혁의 능력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옮기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준혁의 계획은 자신을 포함해 던전 시스템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만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이기적이라고 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었다.
-그렇군. 알겠다.
이제 남은 것은 일족들 간의 합의를 끌어내는 것.
그렇게 논의가 시작되었다.
넓디넓은 환계에 존재하는 종족만 해도 무려 백여 종이었다.
그들 모두가 모여 한 마디씩만 해도 백 마디의 말이다.
작은 합의를 이루는 데만 한 세월이었다.
당연히 준혁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회의는 난항이었다.
가장 먼저 합의를 끌어내야 할 부분부터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인간이 환계를 더럽히는 꼴을 두고 보자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임시로 머무는 것이지.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나는 한순간도 인간의 환계 진입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군. 그렇게 말한다면, 당장 저기 서 있는 인간부터 쫓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저자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흥! 제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비겁한 놈이로군.
-감히!
-합리적으로 생각하라. 이상하게 변한 법칙이 이곳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지. 그 법칙을 막기 위해서는 저 인간과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연대를 위해서는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필요도 있다.
-그 또한 확신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직접 확인하지 않았는데 미리 결론부터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뭔가 이야기 하나가 나올 때마다 무수히 많은 말이 쏟아진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멀뚱히 지켜보던 준혁이 미간에 짙은 주름을 잡았다.
“흐음, 이거 좀…….”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환수이니만큼 인간과 그 가치관도, 합리의 기준도 다를 수 있었다.
또한 저들이 지금까지 겪어 본 적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니 그 또한 낯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선행할 일이 있었다.
게다가 언제 끝날지 모를 저 회의의 결과를 기다릴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준혁이 끼어들었다.
“어이.”
준혁의 말에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내 황금 까마귀가 신경질적으로 한 소리 내뱉었다.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물론 준혁은 그런 정도는 깔끔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또 무슨 제안을?
“지금 이런 걸 논의하지 말고, 그 망할 법칙이라는 놈에 대해서 먼저 확인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
-그건 또 그렇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너희끼리 회의부터 하니까 말할 기회도 못 잡았네. 아무튼 일단 나하고 임시 계약하고 넘어갈 놈들부터 뽑아.”
-말을 삼가라!
“아, 됐고. 아무튼 빨리 나와.”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는 준혁의 모습에 모든 환수들이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처음부터 저렇게 거침없기는 했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준혁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확인이 우선이었다.
일족마다 하나씩 환수들이 앞으로 나섰고, 준혁과 계약을 진행했다.
준혁의 시스템은 배면계 시스템을 근간으로 하기에 환수들과의 계약도 문제가 없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임시 계약이 마무리됐다.
그렇게 계약을 맺은 환수는 기존에 준혁이 데리고 있던 청랑, 흑호, 백효, 적사를 제외하고 모두 117마리였다.
‘더럽게 많네.’
뭔가 거추장스러운 걸 잔뜩 매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이 계약의 형태가 준혁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들이 계약을 맺은 상대는 준혁이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준혁에게 딱히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준혁이 흑호를 향해 말했다.
“가자.”
***
“어?”
지구로 돌아온 준혁이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되게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이 자식을 어디서 찾지?’
지금까지 시스템과 만났을 때는 항상 시스템이 준혁을 찾아왔었다.
준혁이 직접 시스템의 위치를 찾아본 적이 없다.
‘으음…….’
갑자기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걸 어쩌지?’
갑작스러운 난감함에 준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환수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는데 말이야.”
-무엇인가?
“나는 그 던전 시스템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게 무슨?
“그러니까 놈의 내부로 들어갈 수는 있는데, 그건 시간이 좀 필요하고. 지금은 그 자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거든.”
지금의 던전 시스템은 굳이 따지면 둘이 된 상황이었다.
하나는 린디웨와 들어갔던 실제 시스템인, 장치들로 구성된 시스템의 본체.
그리고 미구엘 페레스의 몸을 이용해 만들어 낸 실체화한 시스템.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시스템의 본체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알지만, 인간 형태의 몸을 가지고 있는 실체화한 시스템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놈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 ‘조정’이라는 것이 끝난 상태에서 온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면, 준혁이 환계의 땅을 빌려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했던 계획을 진행할 시간이 없었다.
묘하게 진퇴양난의 상황.
그런데 그때였다.
지잉-!
갑자기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준혁이 서 있는 주변 일대를 내리눌렀다.
-음!
-이 힘은?
깜짝 놀란 환수들이 크게 동요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준혁의 정면에 강렬한 빛이 폭사되었다.
빛이 사그라지며 나타난 것은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금속으로 빚어 낸 것 같은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질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 진짜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부터 얼굴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보통의 사람이 보았다면 저절로 고개를 숙일 정도로 초월적인 신비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실제로 빛이 있는 것은 아닌데, 머리 뒤에서 후광이 강렬하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
숭고함, 혹은 고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설마 벌써 그 조정이라는 게 끝난 건가?’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놈은 지금 당장 전쟁을 시작하려 할 것이다.
잔뜩 긴장한 준혁이 무상곤부터 꺼내 들었다.
하지만 놈은 준혁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눈으로 준혁의 뒤쪽을 살폈다.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서 와 봤더니……. 네가 데리고 다니던 짐승들과 같은 놈들인 모양이구나.”
-짐승이라니!
이번에도 발끈한 황금 까마귀가 버럭 한 소리 내질렀다.
과앙-!
동시에 황금 까마귀 바로 앞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했다.
무시무시한 압력에 휘말린 환수들이 한꺼번에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짐승이 아니라면 뭐라는 거지?”
여전히 무시하듯 꺼내는 말에 환수들이 일제히 영력을 폭사시켰다.
-변질된 법칙 따위!
일대가 순식간에 거대한 압력에 휘감겼다.
일촉즉발의 상황, 준혁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잠깐만!”
“뭐지?”
“지금이 그 조정이라는 게 끝난 거냐?”
준혁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애써 긴장감을 감춰야 했다.
당장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시스템의 무심한 시선이 준혁을 향했다.
“아직 멀었다. 나는 위대함으로 나아갈 존재. 겨우 이런 정도가 최종 형태일 리가 없지.”
대답을 듣는 준혁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젠장! 이거 점점 답이 안 나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