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202화 (202/240)

-202-

-67장. 협상#1-

지구, 아니 우주까지 포함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있고, 이 세계의 뒷면인 배면계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지구에 열린 게이트, 그 너머의 던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던전 안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을 만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오크, 엘프, 드래곤만이 아니다.

수인들이 있고, 아예 짐승의 모습으로 지능을 가진 존재들도 있다.

심지어 지구처럼 탄소 생명체가 아닌, 어떤 무기질을 기반으로 생장하는 생명체까지 존재한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각각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세계’ 중에는 환계도 있었다.

준혁과 계약을 맺은 청랑, 흑호, 백효, 적사의 고향이다.

그리고 오늘 네 마리 환수가 아주 오랜만에 환계에 모였다.

준혁을 가운데 두고 호위하듯 바깥쪽으로 노려보며 웅크리고 있었다.

네 마리 모두 온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을 둘러싼 수천 마리의 환수들 때문이었다.

사나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숫자 자체가 위협이었다.

아무리 얌전한 동물도 이 정도 숫자에 둘러싸이면 위협적이다.

하물며 환수라는, 영력을 사용하고 스킬까지 가진 존재들이라면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환수 중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까마귀였다.

두 발로 서 있는데 그 머리 높이가 인간의 두 배는 되었다.

-환계에 거래를 제안했다는 인간이 그대인가?

단순히 앞으로 나서기만 했을 뿐인데도 휘황찬란한 금색의 영력이 짙게 퍼지며 주변 일대를 짓누른다.

그리고 그 영력이 한 점에 모이더니 거대한 압력이 되어 준혁을 내리눌렀다.

쩌저저적, 쿵!

준혁의 두 발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땅이 폭삭 내려앉았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미 견디지 못하고 으깨졌을 힘이다.

하지만 준혁은 멀쩡했다.

-환계의 일족 중 무려 넷을 권속으로 두었다더니, 역시 보통의 인간은 아니구나.

그 말에 준혁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보통만 아닐까?”

그 모습에 황금색 까마귀가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동시에 금색의 영력이 한층 짙어지며 준혁을 내리누르는 힘이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준혁의 얼굴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이거 손님 대하는 태도가 영 안 좋은데?”

말과 동시에 가볍게 떨친 준혁의 손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흩뿌려졌다.

빛무리가 빠르게 떠오르더니 금색의 영력을 휘감는다.

-아니, 그것은?

빛무리에 휩싸인 영력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금색의 영력이 사라지니 자연스레 준혁을 누르고 있던 압력 또한 해소되었다.

준혁이 성큼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이, 까마귀.”

-말을 삼가라! 나는 위대한 금오 일족의 왕이다.

“그게 까마귀지.”

약간은 비아냥대는 듯한 준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한곳에 모여 있던 금오 일족이 동시에 영력을 끌어 올리며 준혁을 압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준혁의 몸에서 퍼져 나온 에테르가 금색의 영력을 모두 흩어 버렸다.

동시에 무상곤을 뽑아 든 준혁이 거세게 땅을 찍으며 외쳤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이런 거 안 배웠냐? 다짜고짜 싸대기 날려 놓고 좋은 말 듣기를 원하는 게 멍청한 거 아냐? 일단 한판 뜨고 얘기할까? 응?”

무상곤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에테르가 황금 까마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때리지는 않았다. 그저 묵직한 힘으로 밀어낼 뿐.

지이이익!

날카로운 발톱이 땅바닥에 긴 흔적을 남기며 황금 까마귀의 몸뚱이가 속절없이 밀려 나간다.

-싸우자는 건가?

“미친놈이네, 이건? 좋게 얘기 좀 하자고 왔더니 다짜고짜 때린 놈이 뭔 개소리야?”

준혁의 언행이 괴물들이나 신수를 만났을 때 거친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말이 사납다.

게다가 적이 아닌 이에게는 사납기보다는 능글맞거나 정중한 준혁의 평소 모습과도 사뭇 다르다.

당연히 준비된 연출이었다.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주인님. 가능하면 힘으로 누르고 시작하십시오.’

청랑의 조언 때문이었다.

한참을 밀려 나간 황금 까마귀가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이야기를 해 보자, 인간.

순식간에 그를 밀어내던 에테르가 사라졌다.

“쯧!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준혁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환수들을 향해 외쳤다.

“번거로운 말이 아니고, 깔끔한 주먹으로 얘기할 놈 있으면 지금 나와!”

일대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말을 하던 준혁이 모여 있는 환수들 전체를 에테르로 은근히 압박한 탓이었다.

짧은 정적을 깬 것은 푸르게 타오르는 듯한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그대는 우리 푸른 늑대 일족의 아이와 영혼의 계약을 맺은 자. 고로, 푸른 늑대 일족은 그대를 지지한다.

그 말에 청랑이 슬쩍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뒤이어 새하얀 털을 지닌 수리부엉이가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눈의 수리부엉이 일족 또한 푸른 늑대 일족과 뜻을 함께한다.

백효 또한 제 일족의 왕을 향해 절도 있게 감사를 표했다.

마지막은 검은 호랑이였다.

-그대와 계약을 맺은 아이는 한때 우리의 일족이었으나, 지금은 축출된 몸. 우리 검은 호랑이 일족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일족의 연으로 그대를 지지할 이유가 없다.

앞서 나선 푸른 늑대와 하얀 수리부엉이와는 다른 이야기에 준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검은 호랑이의 말이 이어졌다.

-하나 그대는 ‘근원’을 다루는 자. 그 격에 대한 예우는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바, 그대를 지지하겠다.

청랑, 흑호, 백효의 일족이 준혁의 편으로 돌아섰다.

적사의 경우는 따로 무리를 이루지 않는 종족이기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감사를 표하도록 하지.”

조금은 건방진 태도였지만 검은 호랑이는 거기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호랑이의 말대로 준혁은 근원, 즉 에테르를 다루는 자였다.

이는 환계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힘의 영역이었기에 그것을 예우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변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거대한 무언가가 앞으로 나섰다.

곰이었다.

붉은, 단순히 털의 색이 붉은 것이 아닌 붉은빛을 뿜는 털을 가진 거대한 곰 한 마리.

지구에 존재하는 곰보다 거의 네 배 가까운 거대한 크기의 곰이었다.

-내가 대표로 이야기를 하는 데 불만이 있는 일족이 있다면 지금 나서라.

붉은 곰의 말에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환계에서도 나름 방귀깨나 뀌는 족속인 모양이었다.

무언의 동의를 얻은 붉은 곰이 준혁을 향해 말했다.

-나는 빛나는 붉은 곰 일족의 왕, 어떤 거래를 하자는 건가?

이제야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준혁이 털썩 자리를 깔고 앉으며 말했다.

“올려다보느라 목 아픈데 좀 편하게 이야기하면 안 될까?”

-그 정도 배려는 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 붉은 곰의 덩치가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이내 인간 성인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붉은 곰이 준혁처럼 바닥에 앉고,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인간 세상의 일을 아는 자가 있나?”

-그쪽은 관심이 없기에 모른다. 다만, 배면계에 이변이 생겼다는 정도만 느낄 뿐.

“배면계 일을 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 일단 배면계에 무슨 일이 생겼냐 하면…….”

서두를 꺼낸 준혁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그게…….

붉은 곰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곰의 얼굴에 저런 풍부한 표정이 나타난다는 게 신기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환수였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

붉은 곰은 물론 주변의 환수들 역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준혁은 담담하게 끝까지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게 현재의 상황.”

-법칙이 자신의 틀을 바꾸고, 다른 법칙을 집어삼켰다고?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불신 가득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했다.

우우웅!

준혁의 몸에서 흘러나온 에테르가 주변에 있던 환수들을 다시 한 번 휘감았다.

이번에는 공격적인 기운 운용이 아닌,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흐름이었다.

-이, 이것은?

“좀 익숙하지 않냐?”

준혁과 연결된 시스템은 배면계 시스템을 베이스로 쌓아 올린 시스템이었다.

당연히 배면계의 기운이 남아 있었고, 배면계와 협약 관계에 있는 환수들은 그 기운을 감지한 것이었다.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이 에테르, 아니 너희들 표현대로 근원을 다룰 수 있겠냐?”

-그렇군. 그래서 제안하겠다는 거래는 무엇인가?

“동맹.”

-동맹이라?

“던전 시스템이 환계라고 가만히 둘 것 같아? 아니지. 놈이 하는 짓을 보면 여기도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준혁도 거기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던전 시스템의 움직임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기도 했다.

-어떤 식의 동맹인가?

“동맹이 별거 있나? 연합군을 만들자는 거지.”

-그것은 불가하다.

“왜?”

-우리 중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자는 인간과 계약한 자들밖에 없다.

“그게 왜?”

-그대가 말한 연합군이라는 것이 한둘은 아닐 터. 최소 수백에서 수천은 필요할 터인데……. 우리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인간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붉은 곰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본 붉은 곰이 다시 물었다.

-왜 그러는가, 인간?

“너는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음?

“내가 계약하면 되지.”

-그대는 이미 넷의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영혼이 감당하기 벅찬 숫자. 그런데 천 단위의 계약을 하겠다는 건가?

“하아, 이래서 고정관념이 무섭다니까?”

-뭐?

“누가 인간이랑 계약하랬냐? 시스템과 계약하랬지.”

-아!

그제야 준혁의 말을 이해한 붉은 곰이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군. 그런 방법이 있겠어.

“그럼 결정해라.”

-흐음, 나는 어디까지나 대표가 되어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다. 그러한 제안은 각각의 일족이 자신들만의 방향성을 결정할 뿐.

“그래? 그래서 너희는?”

-변해 버렸다는 그 법칙을 목격해야만 결정할 수 있다.

준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리 그럴싸해도 눈으로 보는 게 좋긴 하겠지. 좋아. 임시로 계약하고 인간계로 가자. 그런데 다른 쪽은?”

준혁이 주변을 빙 돌아보며 물었다.

-나도 확인부터 하겠다.

-나 역시.

-보통 사안은 아니니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지.

푸른 늑대, 하얀 수리부엉이, 검은 호랑이 일족이 먼저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환수 일족들은 쉬이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모두들 일족 단위로 모여 각자의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하나둘 준혁에게 임시 계약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보통 일은 아니니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붉은 곰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요구 사항이 하나 더 있는데 말이지.”

-요구 사항? 무엇인가? 일단 말해 보라.

“여기 환계에 땅 좀 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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