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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장. 개벽#5-
“제길!”
와락 인상을 구긴 시스템이 황급히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커다란 구 형태의 막이 펼쳐져 시스템을 감쌌다.
“나중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시스템의 모습이 꺼지듯이 사라졌다.
처음 미구엘 페레스의 몸이 변했을 때 사라지던 것과 똑같은 형태였다.
“음!”
준혁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참,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눈동자의 방향은 하늘이었지만, 정작 준혁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준혁의 감각으로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엄청난 양의 문장들이었다.
준혁이 기억하는 것은 처음의 몇 줄밖에 없었다.
[시스템을 업데이트합니다.]
[업데이트에 실패했습니다.]
[시스템을 업데이트합니다.]
[업데이트에 실패했습니다.]
두 개의 문장이 몇 번이나 반복되더니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졌었다.
그리고 시스템이 뻔한 대사와 함께 사라진 직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금 준혁의 눈앞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메시지들이다.
그중 준혁이 제대로 본 것은 몇 가지밖에 없었다.
[기존 시스템을 삭제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설치합니다.]
단 3개의 문장이 떠올랐을 때만 시스템 메시지가 잠시 멈췄었다.
그 사이사이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메시지가 올라갔다.
사실 속도가 아니라도 준혁은 메시지를 읽을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문자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자는 위원회 회의 이면에서 보았던 문자와도 또 다른, 전혀 알 수 없는 문자였다.
그리고 시스템을 설치한다는 안내 이후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시커메진 하늘은 점점 더 짙어지더니, 급기야 태양마저 완전히 가렸다.
마치 밤이 찾아온 듯 새까맣게 변한 하늘이었다.
하지만 진짜 밤이 아닌 탓에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진짜 밤이라 해도 시커멓게 변한 하늘은 그마저도 가렸으리라.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파도가 잦아들었고, 바람마저 멈췄다. 그렇게 모든 자연 현상이 멎었다.
마치 일시 정지를 누른 동영상 화면 같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준혁의 주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더 나아가 아시아, 지구, 아니 우주 전체가 완전한 정지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준혁의 시야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준혁 본인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치된 시스템을 구동합니다.]
팟!
준혁의 시야에 갑자기 거대한 광원이 떠올랐다.
‘아…….’
짙은 어둠은 시야를 앗아 간다. 그리고 거대한 빛 또한 시야를 앗아 간다.
빛으로 물든 준혁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준혁마저도 정지된 세상과 하나가 되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준혁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수천수만 가닥 빛의 실타래였다.
하늘거리며 퍼져 나온 빛의 실이 허공에서 쉴 새 없이 얽히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준혁의 몸이 빛으로 물들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정지된 세상.
그 속에서 준혁의 몸에서 새어 나온 빛의 실타래만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빛이 움직이는, 정지했으면서 정지하지 않은 역설의 순간이었다.
측량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는 그 순간의 반복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어느 때.
인식하지 못한 사이 준혁의 몸에서 새어 나왔던 빛의 실타래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쩌엉-!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음과 동시에 준혁을 중심으로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 더럽게 복잡…….”
준혁은 역설의 순간을 맞이하기 직전의 감정을 그대로 토해 내며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마무리하지 못했다.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구동되었습니다.]
[새로이 구축된 시스템에 맞춰 ‘상태’를 재구축합니다.]
[각성을 무효화합니다.]
[보유하고 있던 모든 특성을 재정립합니다.]
[재정립을 완료합니다.]
‘빠른데?’
준혁의 첫 감상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두 번째 각성 당시였다.
그때는 적성 인자가 어쩌고 하며 진행률이 올라가는 데 꽤 시간을 소모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 버렸다.
20년 차이가 있는 두 대의 컴퓨터 성능 격차 같은 느낌이다.
준혁은 곧장 상태창부터 열었다.
‘어?’
그리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스템 제어 권한을 부여합니다.]
‘제어 권한?’
두 가지가 놀라웠다.
첫 번째는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제어 권한’.
5인 위원회의 위원들이 가진 던전 관리 권한 같은 한정적인 권한이 아니다.
시스템을 준혁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배면계 시스템의 아바타였던 린디웨가 시스템에 관여할 수 있는 정도보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간 힘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자였다.
‘시스템 제어 권한을 부여합니다.’라고 준혁의 눈에 비치는 글자는 생전 처음 보는 종류였다.
준혁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자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문자였다.
그런데 준혁은 그 문자가 아주 자연스럽게 독해되었다.
문장을 읽고, 단어의 뜻을 생각하고, 의미를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없다.
평생 사용했기에 그러한 과정이 필요 없는, 한글을 읽듯 자연스러웠다.
‘뭐냐, 도대체?’
이 과정이 시작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시스템 업데이트는 무엇이며, 시스템의 재구축은 또 뭐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앞 단계에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단순히 신수의 사체에 준혁이 칼을 꽂아 넣는 것만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가.
이럴 때 의문을 풀 단서는 상태창에 있다.
‘상태창.’
준혁의 생각에 연동되어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음!”
그리고 준혁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태창]
김준혁
직업:시스템 관리자
스킬:[시스템 운영]
스탯이 사라졌다.
더블 각성으로 얻게 된 두 가지 직업은 물론이고, 스킬도 몽땅 사라졌다.
준혁은 반사적으로 손에 든 무상곤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쾅!
굉음이 터져 나오고, 무상곤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땅속 깊숙이 박혔다.
‘힘은 그대론데?’
사실 힘만이 아니다. 세상을 느끼던 감각도 그대로다.
스탯 자체가 변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상태창에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흐음!”
가만히 상태창을 들여다보던 준혁이 이내 결정을 내렸다.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행동을 해 보는 게 준혁의 성향.
‘시스템 운영.’
생각과 동시에 준혁의 시야가 바뀌었다.
마치 암전이 된 듯 눈에 담기던 풍경이 사라지고 온통 어두운 암흑만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암흑의 공간에 무수히 많은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도면, 아니 장치였다.
시스템 코어에 들어가서 보았던 그것과 유사한 장치들이 준혁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미, 미친!’
너무 놀라 생각을 이어 가는 것조차 잠시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내가 이걸?’
장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각각의 장치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후우, 후!”
놀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연거푸 숨을 들이마신다.
한참을 반복한 후에야 호흡이 진정되고, 그때부터 준혁은 장치의 의미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자연에 퍼져 있는 기운, 준혁은 그것을 막연하게 ‘기운’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 그것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에테르.’
그리고 그 에테르를 기본으로 각각의 장치들이 구축되어 있었다.
모든 장치는 각각 하나의 모듈로서 독립적인 역할을 하고, 그 모듈들이 쌓여 전체적인 시스템으로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를 읽어 가며 준혁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외곽이 수많은 모듈의 집합이었다면, 내부는 각각의 모듈을 구성하는 논리 단위의 덩어리들이 모여 있었다.
각각의 모듈이 필요로 하는 작은 단위의 논리, 혹은 연산을 내부에서 빌려 와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외곽에 있는 하나의 모듈을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내부에 있는 논리 덩어리는 엔진, 변속기, 구동축, 바퀴, 핸들 등등의 부품 역할이었다.
‘후우, 후!’
들어갈수록 놀라운 상황에 준혁은 거듭 숨을 고르면서도 한층 더 깊이 파고들었다.
시스템은 아주 작은 단위의 논리와 연산의 거대한 집합체였다.
내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작은 단위의 연산들이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비유한 자동차로 따지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부품의 단위가 톱니바퀴, 볼트, 너트의 수준이 되고, 더 깊은 곳은 철광석 같은 원자재의 수준까지 파고드는 셈이었다.
그리고 준혁은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아!”
그곳에서 준혁은 지금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시스템의 기원을 알 수 있었다.
‘하, 시스템 이 구라쟁이 새끼!’
신의 권능이 신의 파편과 만나면 질서가 변한다느니 했던 이야기조차도 거짓말이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지금 준혁이 운영권을 가진 이 시스템은 배면계 시스템의 변형이었다.
지금 이 모든 일은 배면계 시스템의 안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시작은 로건 베런즈와 신수들의 만남이었다.
그 접촉을 감지한 배면계 시스템은 그때부터 전체를 꾸준히 관찰했다.
그리고 던전 시스템이 자신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배면계 시스템은 그에 대한 방어를 시작했다.
로건 베런즈와 신수들이 힘을 합쳐 배면계 시스템을 복제했을 때는, 배면계 시스템이 자신의 기능을 바꾼 이후였다.
이는 배면계 시스템의 자의적인 움직임이 아닌, 배면계 시스템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기능이었다.
그 기능의 핵심은 잠복이었다.
이 잠복 기능은 아무것도 아닌 척 숨죽이고 있다가, 정작 다른 시스템 속에 녹아 들어간 후에야 활동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던전 시스템을 파악했고, 그것을 부수기 위해 자신을 변형시켰다.
준혁이 ‘관찰자’라는 이름으로 재각성을 한 것 역시 잠복해 있던 배면계 시스템이 관여한 결과였다.
준혁을 던전 시스템과 싸울 적임자로 보고 그렇게 각성시킨 것이었다.
당연히 ‘무급’으로 승격한 것도 배면계 시스템의 잠복 기능이 작용한 결과였다.
던전 시스템이 준혁의 정보를 보지 못한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변수가 더해졌다.
린디웨가 소멸 직전, 배면계 시스템의 지식을 준혁의 머리에 심은 행위였다.
처음 시스템 업데이트를 실패한 원인이 그것이었다.
그로 인해 시스템을 다시 구축해야 했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거기까지 읽은 후, 준혁은 ‘시스템 운영’에서 빠져나왔다.
“후우!”
길게 숨을 뱉어 냈다. 그 속에는 뭔가 큰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이제 한판 제대로 붙어 볼 수 있게 됐네.’
던전 시스템이 가진 힘은 아주 거대했다.
놈은 단순히 시스템이 아닌 세상의 정보를 모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켰다.
미구엘 페레스의 육체로 구현했던 그것은 시스템의 힘의 일부.
조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놈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다음번에 만나게 된다면 진정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등장할 것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준혁 또한 지금 이 시스템으로 또 한층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선 준혁이 만상만투의 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부드럽게 풀려 나간 기운, 아니 에테르가 만상만투의 사체를 휘감았다.
에테르에 휘감긴 만상만투의 사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준혁 또한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쏴아-!
준혁이 사라진 해변에는 파도 소리만이 잘게 부서졌다.
잠시 후, 그 해변으로 갑작스러운 인파가 몰려들었다.
실미도에서 준혁을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뭐, 뭐야? 어디 갔어!”
정무헌 통안부 장관의 외침이 파도 소리 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