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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장. 개벽#1-
“나 참, 형도 엽사라니.”
준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어이가 없더라.”
“쯧! 망할 배면계 시스템은 끝까지 마음에 안 드네.”
준혁이 과장스레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각성이라는 것이 누군가 정해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탓이었다.
오히려 린디웨에 대한 생각을 빨리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언급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그 대상을 떠올림으로써 오히려 감정을 희석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준혁의 방법이었다.
어떠한 감정을 마모시키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실제로 지금 방 안에서도 각자의 모습이 달랐다.
리쉬옌은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고, 강이찬은 연거푸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으며, 장민호는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최유나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그저 먼 산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혼원 길드의 회의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민섭, 그리고 릴리안 우드와 리아 클레르가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직 카잔시에 머물고 있었다.
원래는 모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고, 일종의 해산식을 가지려 했었다.
하지만 카잔시의 상황 때문에 유민섭이 빠진 터라 그것도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준혁이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구분이 되었다.
린디웨의 소멸로 침울해져 있는 그룹과 린디웨와 딱히 친분이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그룹.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모두가 같을 수 없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각자 오늘 갑작스러운 성장으로 몸의 감각과 밸런스가 많이 다를 겁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갑자기 키가 크면 몸의 밸런스가 흐트러지듯, 각성자의 성장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서서히 성장할 때는 충분히 스스로 균형을 맞출 수 있지만, 갑자기 단계를 뛰어넘는 수준의 성장은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지금 이들은 등급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등급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한 단계 올라서는 게 힘들다.
외천급이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외천급이었다. 하지만 외천급 시작 지점과 외천급 끝 지점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어차피 유 길드장도 매우 바쁘니 일단 오늘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세요. 나중에 따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준혁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이 정도였다.
“따로 시간을 보내면서 갑작스러운 성장에 적응하는 훈련이라도 하면서 기다리세요. 그럼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준혁은 곧장 김준석을 데리고 흑호의 ‘도약’을 펼쳤다.
“아빠-!”
비명에 가까운, 어쩌면 돌고래 소리가 아닐까 싶은 환호와 함께 지유가 도도도 달려왔다.
“우리 지유, 잘 있었어?”
김준석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두 팔을 뻗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층간소음을 무시한 채 전력질주로 달려온 지유가 제 아빠의 품에 덥석 안겼다.
“이야, 우리 지유 하나도 안 컸네?”
김준석이 지유의 머리에 얼굴을 비비며 기쁜 듯이 말했다.
“보통은 ‘몰라보게 많이 컸네.’라고 하는 거 아니냐?”
불만스럽게 말을 툭 던진 사람은 준혁이었다.
하지만 김준석의 입장에서는 저 말이 맞는다.
이곳에서는 한 달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배면계의 김준석은 무려 5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지유의 모습이 너무나 반갑다.
“잘 다녀왔어?”
이세연도 조용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응!”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준석은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쯧!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준혁이 또 한 번 투덜거린다.
김준석의 저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준혁은 과거에 배면계에서 무려 10년의 시간을 보냈었다.
“거, 자식, 왜 이렇게 투덜거려?”
김준석이 타박하듯 말했지만, 준혁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휘휘 저으며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카 키워 봐야 아무 소용 없다더니, 딱 그 짝이네.”
끝까지 투덜거린 준혁이 서둘러 신발을 신는다.
“어디 가냐? 밥도 먹고, 이야기도…….”
“일 없네요.”
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사실은 형네 가족들끼리 오붓하게 회포를 풀라는 준혁의 배려였다.
“에이그, 솔직하지 못한 놈.”
그런 배려를 잘 아는 김준석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이세연이 급히 말했다.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어.”
“알았어요. 기대할 테니 오늘 제대로 힘 좀 주고 차리십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준혁은 집을 나섰다.
일단 가족들끼리 시간을 가지라고 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딱히 할 일이 있지는 않다.
‘뭐 하지?’
생각해 보면 특별히 취미랄 게 없었다.
취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취미를 가질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생활 자체가 고달팠다. 당장 먹는 것, 하룻밤을 보내는 것조차 버거운데 무언가를 즐길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배면계를 다녀온 후에는 운동을 시작했고,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훈련에만 매진했었다.
프로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항상 경기만 생각했고, 쉬지 않고 훈련했다.
인터뷰를 하면 취미가 훈련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팀 동료들도 그런 준혁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훈련량을 늘렸을 정도였다.
리그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가진 준혁이 그것도 모자라다며 훈련만 하는데,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훈련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어떻게 된 게 인생에 여유가 없냐?”
어쩌다 보니 지난 일들을 찬찬히 돌이켜보니 참 빡빡하게도 살았다 싶었다.
헌터가 된 후에는 더 심했다.
아니, 처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특별히 취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길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
훈련을 빙자해 형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매일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일상을 보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 시간은 잠깐이었다.
시스템의 이상이 도드라졌고, 그것을 쫓으며 잠깐의 여유는 사라졌다.
싸우고, 쫓고, 파헤치는 일을 반복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신수가 세상에 나와 날뛰기 시작했다.
“쯧쯧……. 고달프다, 고달파.”
떠올리다 보니 새삼스레 참 힘들게 살았다 싶었다.
준혁은 한참을 그렇게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엉뚱하게도 자신의 빈 곳을 인지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변화가 생길 리 만무하다.
이제 와서 특별히 취미를 가진다거나 무언가를 즐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 그런 것을 하게 된다면, 던전 시스템과 신수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이후일 것이다.
‘그래도 뭔가 취미를 가진다면…….’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
당연히 떠오르는 게 없다.
취미라는 게 뭘 하겠다고 정하고 하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걸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흥미가 생기고, 그 흥미가 꾸준히 이어지면 취미로 변하는 법이다.
물론 그런 것 자체를 고민해 본 적 없는 준혁으로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음, 어쩔 수 없지.”
결심을 굳힌 준혁은 재빨리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흑호를 불렀다.
***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버럭 소리를 지른 사람은 유민섭이었다.
“이야기 다 했는데 뭘 또 물어요? 다시 설명해 드릴까요?”
대답한 사람은 준혁이었다.
팔짱을 낀 채 준혁을 빤히 올려다보던 유민섭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와아…….”
“네?”
“내가 가끔 그런 고민을 해요.”
“고민?”
“네, 고민. 준혁 씨를 보면서 가끔 하는 고민인데…….”
유민섭은 슬쩍 말꼬리를 흐려 준혁의 신경을 집중시켰다.
“무슨 고민인데요?”
“이 사람은 어쩌면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반문하는 준혁이었지만, 유민섭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면 이렇게 바쁜 판에 굳이 찾아와서 묻는다는 게, 취미? 취미이? 좋은 취미를 추천해 달라고오?”
말꼬리를 쭉쭉 늘리며 싸울 듯이 묻는 유민섭을 보며 준혁이 피식 웃는다.
“유 길드장 말대로 여기가 바쁜 편이기는 한데…….”
준혁의 시선이 슬쩍 움직여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투명한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병 속에는 약간 탁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점도가 있는 것 같은 액체가 들어 있었다.
준혁이 한층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유 길드장이 바빠 보이지는 않네요.”
병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얼린 보드카였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보드카는 얼려도 술이 얼지 않는다. 약간 젤 같은, 혹은 묽은 슬러시 같은 상태가 된다.
보드카를 마시는 지방에서는 이런 방법이 정석으로 알려져 있다.
즉, 유민섭도 지금은 잠시 쉬면서 우연히 얻은 보드카를 맛보려는 참이었다.
딱 첫 잔을 마시려는데 준혁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산통이 깨졌다.
유민섭의 구시렁거림은 그 때문이었다.
“자자, 일단 한잔하시고.”
준혁이 어린애 어르듯 손짓을 하고, 유민섭도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오오!”
단숨에 한 잔 들이켠 유민섭이 감탄을 내질렀다.
“이야, 이건 또 이거대로 색다른 맛이 있네요.”
그 말에 준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나한테 설명할 때……. 보드카는 무색, 무미, 무취라면서요?”
“그건 설명해 줘도 모를 테니 그냥 넘어가죠. 자, 그래서 취미라고요?”
“네.”
“흐음, 취미라는 건 말이죠. 그냥 당기는 걸 하는 겁니다.”
“네?”
“당연하지, 이 사람아. 사람마다 취향이 십인십색인데 내가 준혁 씨 취미를 무슨 수로 만들어 줘요?”
“아니, 그거야 알죠. 그래도 뭐 해 보니 괜찮더라, 이런 거라도?”
“그게 나한테 괜찮은 거지, 준혁 씨한테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다.
“으음…….”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준혁이 홀로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유민섭은 준혁이 그런 한가한 고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아무튼 잘됐습니다.”
“네? 뭐가 잘돼요? 내가 취미를 고민하는 게?”
“뭐래, 이 사람이? 그거야 당신 마음이지. 그렇잖아도 힘쓸 사람 필요했는데, 준혁 씨가 딱이네.”
“힘? 힘을 써? 아니, 당신도 지금 외천급 거의 끝자린데 뭘 나한테 힘을 쓰래요?”
유민섭 역시 대율의 근원에서 얻은 힘으로 강제로 성장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유민섭도 할 말은 있었다.
“제가 신수 사체를 해체해 본 경험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에?”
“아니, 이 사람이 뭘 들은 거야? 배면계에서 신수는 죽으면 그냥 끝입니다. 육체는 그대로 소멸하고, 근원만 따로 봉인된다고. 그러니 내가 신수 사체를 다뤄 봤을 리가 없잖……. 흠, 그런데 그거 해 보는 건 나쁘지 않겠는데요?”
괴수도, 영수도 아닌 신수다.
그 신수의 사체를 이용한다면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 수 있을까.
준혁에게 신수란 그냥 죽이면 사라지는 놈들이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상만투를 죽였을 때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사체를 그냥 버려두고 왔던 것이다.
준혁이 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가 봅시다!”
“어딜요?”
“어디긴? 대율 그놈 몸뚱이 좀 썰러 갑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은 이미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유민섭이 황급히 준혁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