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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장. 하나의 마무리#1-
준혁은 빠르게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상태창을 살폈다.
‘외천급, 거기에 던전 시스템으로 인해 A급에서 S급까지의 스탯이 더해졌고……. 어?’
준혁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며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엽사?’
김준석이었다.
엽사인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준혁을 놀라게 한 것은 김준석의 등급이었다.
‘천원급?’
배면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 다른 사람들이 외천급인데 김준석은 천원급이었다.
그런데 엽사의 성장은 다른 직업에 비해 많이 더딘 편이었다.
이는 준혁 본인 또한 엽사이기에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제약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등급이라니.
‘어이구, 저 미련한 곰탱이.’
얼마나 홀로 고생을 했을지 눈에 선했다.
그때였다.
-도살자, 만나서 반갑다!
대율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묵직한 바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꽈앙-!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무상곤에 묵직한 충격이 얹혔다.
거대한 바윗덩이 하나가 준혁의 무상곤에 막혀 허공에 떠 있었다.
충돌과 동시에 준혁이 재빨리 뒷걸음질을 치며, 무상곤을 활의 형태로 바꿨다.
순식간에 다섯 대의 영력 화살을 바위를 향해 쏘아 냈다.
그 짧은 순간, 사람의 형태로 변하고 있던 바위가 준혁의 화살 세례에 터져 나갔다.
“하, 반갑다. 이 벌레 새끼!”
준혁의 외침에 리쉬옌을 비롯한 배면계에서 지금 막 돌아온 헌터들이 흠칫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벌레?’
저 거대한 산을 보고 벌레라니.
헌터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리쉬옌이었다.
린디웨에게 받은 정보에 따르면, 대율은 그냥 거대한 산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들 머릿속 한편에 준혁의 말이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대율의 외각부터 깎아 들어올 때, 산으로 보이는 지표면 등이 동물의 무언가처럼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종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몸, 네놈과 마지막을 함께해야겠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꾸드드드득!
그런데 그 소리가 마치 어떤 동물의 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모두 피해……. 엇!”
팀원들에게 주의를 주려던 유민섭이 갑자기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율의 몸뚱이인 거대한 산맥의 바깥, 그러니까 대율이 오기 전 이 장소가 무엇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도, 도시?”
대율의 몸뚱이가 너무 큰 탓에 이제야 그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 거대한 신수가 땅을 뚫고 튀어나왔으니, 당연히 그로 인한 인명 피해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
문제는 대율의 몸뚱이 바깥쪽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뭡니까, 이거?”
그 외곽을 살피던 유민섭이 기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 난리가 났는데 대피는커녕 놀라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유민섭을 향해 준혁이 빠르게 ‘감응’으로 말을 전했다.
-지휘권, 지휘권 걸어요!
“아!”
유민섭이 황급히 준혁에게 ‘지휘권’을 걸었다.
곧장 효과가 나타나며 준혁의 스탯이 일정 비율로 상승되었다.
하지만 준혁이 ‘지휘권’을 원한 이유는 사람들과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준혁의 ‘감응’은 준혁과 대상 사이에만 대화가 가능하지, 모두 함께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모두 잘 들어요.
대율의 몸뚱이, 산세가 요동치고 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공격은 없는 상황.
사람들은 모두 준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대율에게 거래를 제안할 겁니다.
김준석이 황급히 물었다.
-거래라니? 무슨 거래?
아무래도 동생이 하는 일이다 보니 걱정부터 하는 것이다.
-아, 그건 일단 좀 이따. 아무튼 거래가 성립되면 대율도 공격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사람들을 구하세요.
준혁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반신반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카잔시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시스템에 의해 ‘일꾼’이라는 이름의 이상한 각성을 한 상태였다.
지금도 이 난리가 났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이지(理智)를 상실한 사람들인데 제정신을 차릴 가능성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척하기는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역시나 최유나였다.
뒤이어 다른 이들은 모두 대답을 했고, 마지막에 김준석만이 동의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준혁이 한 번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대답을 확인한 준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대율!”
-말하라, 도살자.
“거래를 할까 하는데?”
-거래? 너와 나 사이에 주고받을 것이 있었던가?
“있지.”
단정적인 준혁의 말투에 대율도 곧 긍정을 표했다.
-어떤 거래인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준다면, 너하고 일대일로 붙어 주지.”
대율보다 더 빨리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야, 무슨 소리야?
김준석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동생이 저 무지막지한 괴물과 일대일로 싸운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괜찮아.
준혁은 단호하게 형의 말을 끊어 버리고는 이내 ‘지휘권’도 거부했다.
“야, 인마!”
당황한 김준석이 육성으로 외쳤지만, 준혁은 대율에게만 집중했다.
잠시 준혁의 말을 곱씹던 대율이 물었다.
-무슨 의미지?
“나하고 일대일로 맞붙고 싶지 않냐? 싸움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너도 마음에 안 들잖아?”
신수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집착이 심한 놈들이다.
아니, 필멸의 존재가 신의 격을 얻으려면 그 정도 집착은 필수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은 다른 분야에도 적용된다.
준혁을 다시 만난 신수들이, 준혁만 보면 날뛴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그리고 준혁이 이런 거래를 제안할 수 있었던 근거가 또 하나 있었다.
‘어차피 종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몸’이라고 대율은 말했었다.
거기에 더해서 거의 모든 신수가 지구로 넘어왔는데 대율만이 배면계에 남아 있었다.
대율은 자신의 존재를 더는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최후를 자신과 싸우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 들었다.
준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잠시 할 일이 있거든. 그 일 마무리하고 올 동안 가만히 기다려 준다면 아무도 관여하지 않고 일대일로 싸우겠다.”
-좋다.
준혁이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올 거라는 걸 어떻게 믿느냐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가 이런 일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율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혁이 유민섭을 향해 말했다.
“그럼 움직이세요!”
하지만 유민섭을 포함한 열 명의 헌터들은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준혁이 대율과 한 거래 내용을 이미 들은 탓이었다.
“시간 없습니다!”
좀 더 센 어투로 윽박지르듯 말을 던진 준혁이 재빨리 백효를 불렀다.
훌쩍 백효의 등에 올라탄 준혁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것은 하나의 술석이었다.
준혁의 영력을 받아들인 술석이 가벼운 소음과 함께 깨어지고, 이내 푸른 영력으로 뭉친 화살표가 허공에 떠올랐다.
린디웨가 만든 술석이었다.
제주도에서 준혁이 로건 베런즈와 싸울 당시에, 린디웨가 로건 베런즈에게 걸었던 술법이었다.
지금 저 화살표는 로건 베런즈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로건 베런즈는 대율을 이곳으로 소환하기 위해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로건 베런즈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준혁이 결정타를 날릴 수 없었다.
이기는 것은 가능해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상대가 바로 로건 베런즈였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가자!”
준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효의 비행이 시작되었다.
***
로건 베런즈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던 아즈키스탄의 수도, 그중에서도 대통령궁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실제 거리는 꽤 되기는 하지만, 백효를 타고 날아오니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꽤 멀리서부터 로건 베런즈의 존재를 확인한 준혁은 백효의 등에서 ‘탐색’을 사용하고 있었다.
‘모두 스물다섯.’
영력을 품은, 무명회 소속이 분명한 배면계 귀환자의 숫자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영력과 마나를 동시에 품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로건 베런즈였다.
배면계 귀환자들의 위치를 모두 확인한 준혁은 묵룡비부터 띄워 올렸다.
씨이잉-!
백효와 나란히 비행을 하기 시작한 묵룡비는 모두 48자루.
‘한 놈에 두 방씩!’
준혁에게는 명확하게 보이지만, 놈들은 아직 준혁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 가던 중, 준혁이 묵룡비를 날렸다.
공기를 터트리며 준혁을 앞질러 날아간 48자루의 묵룡비가 거침없이 대통령궁의 벽을 뚫고 들어갔다.
소란은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빠른 공격에 무명회 소속 배면계 귀환자들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탐색’을 통해 24개의 영력이 사그라지는 것을 확인한 준혁은 거침없이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내려선 준혁의 앞에는 거대한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침대에 누워 있던 로건 베런즈가 기겁한 얼굴로 준혁을 보았다.
양 볼이 움푹 파일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실제로 놈은 제대로 상체를 일으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준혁의 예상이 맞은 것이다.
“잡았다, 이 아무개새끼!”
준혁의 얼굴에 떠오른 싸늘한 미소에 로건 베런즈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방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로건 베런즈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시체와도 같은 얼굴.
그것은 모든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사실은,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온 로건 베런즈에게는 죽음과 동의어였다.
즉, 준혁의 등장과 동시에 로건 베런즈는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
일견 안쓰러운 느낌도 들었지만, 준혁은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섬세하다 해도 저런 놈에게 줄 동정이나 연민은 없었다.
“너, 시스템이랑 짬짜미했지?”
“이미 알면서 물어보는 저의는 뭡니까?”
“하! 끝까지 존댓말이네?”
왠지 허세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에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더 따질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이랑 뭘 한 거냐?”
“이 상황에서 그것마저 알려 주면 제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찌질한 놈, 억울할 것도 많네.”
“지금 저를 모욕하는 겁니까?”
“가족을 잃었다고, 억울하다고 세상 사람 다 죽이려 드는 게 찌질한 게 아니면 뭐냐?”
“이익!”
로건 베런즈가 이를 악물며 준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대거리를 하지는 않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준혁이 김빠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을 해 주지는 않을 것 같네.”
“당신의 태도를 보고 말할 기분이 들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어차피 말 안 할 거였잖아? 그냥 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의 무상곤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후두두둑!
침대 시트 위로 붉은 핏물이 거세게 번졌다.
세계를 위기에 빠트린 자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망한 결말이었다.
준혁은 시체가 된 로건 베런즈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혹시 미구엘 페레스처럼 빛의 형상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쯧!”
준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찬 후, 곧바로 흑호를 불러 ‘도약’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이제 대율과 결전을 치러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