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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장. 인사#2-
‘전뢰보’를 펼친 김준석의 발자취를 따라 푸른 뇌전이 궤적처럼 그어졌다.
빠르게 내딛는 김준석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다.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영력의 흔적을 정확하게 쫓는다.
이렇게 내달리다 홀로 신수를 맞이하게 된다면?
당연히 위험하다. 하지만 김준석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감정은 없었다. 떠올라 있는 것이라고는 굳건한 의지, 그리고 묵직한 자신감이었다.
이는 단순히 높은 등급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 등급에 오르는 동안 거쳐 왔던 수많은 싸움과 위기가 자신감의 바탕이었다.
만약 그가 등급만 믿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지금의 등급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연달아 ‘전뢰보’를 펼치던 김준석이 스킬의 사용을 멈추고 단순한 달리기로 바꾼 것은 두 번째 능선을 넘었을 때였다.
단순히 스킬 사용만 그만둔 게 아니라 내딛는 걸음도 지극히 조심스럽게 변했다.
그리고 그조차도 멈춘 순간은 세 번째 능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엽사는 기본적으로 ‘엽맥’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익힌다.
이 스킬은 엽사, 사냥꾼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몸놀림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발걸음을 포함한 몸의 움직임과 몸속의 영력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기척을 죽였다.
그에 반해 사냥감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감각은 최상급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대강 가늠해 보기로는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의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밀려오는 영력이었다.
그렇게 거리가 벌어져 있는데도 온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압도적인 영력이었다.
‘준혁이 이놈의 자식, 저런 괴물을 혼자서 잡았다고?’
생각할수록 동생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곳에서 홀로 지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려 왔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준석은 한층 더 기척을 죽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신수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작은 발소리도, 수풀을 건드리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는 지극히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걸음은 시속 4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다.
꾸준히 걷는다면 1킬로미터 정도는 15분이면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김준석의 신중한 몸놀림은 그 15분의 시간을 1시간으로 만들었다.
누가 보았다면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을 모습이지만, 이런 때에 신중한 움직임은 필수였다.
그렇게 산 능선을 넘고 넘은 김준석은 마침내 신수의 지척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능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이거 뭔…….’
김준석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미친! 저게 신수라고?’
김준석이 있는 곳에서 신수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미터가량이었다.
그런데 김준석의 눈에는 지척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정도로 거대한 놈이었다.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떠오르는 고민이 하나.
‘저걸 신수라고 부르는 게 말이 되나?’
신수는 그 명칭 그대로 신의 격에 올라선 짐승이다.
하지만 지금 김준석이 맞이한 신수는 ‘짐승’이 아니었다.
산(山)이었다.
땅이 높이 솟아 능선과 계곡을 이루는 지형을 흔히 산이라 부른다.
김준석이 보고 있는 것은 진짜 그 ‘산’이었다.
심지어 빼곡하게 자리 잡은 나무는 숲을 이루고 있었고, 계곡을 따라 물이 흘렀으며, 크고 작은 동물들까지 살고 있었다.
‘씨발! 어쩌라고…….’
저걸 신수라고 부를 수 있느냐 아니냐를 떠나, 저것과 어떻게 싸우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원론적인 궁금증이 있었다.
‘저걸 죽이는 게 가능해?’
산은 단순한 지형이다. 그걸 죽이는 게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순간이 되어야 죽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저딴 게 어떻게 움직인 거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김준석이 영력의 흔적을 따라오는 동안, 저 거대한 산이 움직인 흔적 따위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의문을 품었어야 맞는다.
기본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몸집을 가진 신수가 움직였는데 지형의 변화가 조금도 없다는 건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준혁이 이놈은 저런 걸 또 어떻게 잡은 거야?’
과거 배면계에서 귀환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수를 봉인했어야 했다.
즉, 준혁은 저 이상한 신수 또한 봉인했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누구냐?
“흡!”
김준석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최대한 기척을 죽였다.
절대 걸리지 않을 거라 자신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들켜 버린 것은 왠지 모르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산 형태의 짐승이 하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익숙한 느낌인데,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라. 명확하지 않은 이런 느낌은 참으로 낯설군.
말을 하는데 그 말이 김준석 자신에게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말은 누구를 향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는 동안에도 산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기억에 있는 느낌이긴 한데, 정확히 똑같지는 않은 이건 무엇이지?
말의 내용이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산의 중얼거림이 서서히 조용하게 변했다.
‘일단은 빠지자.’
뭔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어서 좋을 일은 없어 보였다.
우선은 빠져나간 후, 일행들과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리쉬옌이 린디웨에게 신수의 정보를 받았다고 했으니, 그것부터 확인해 보아야 했다.
‘쯧! 나도 하나 달라고 할 걸 그랬네.’
그때였다.
-기억났다. 허허! 어떻게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있지?
산이 또다시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김준석은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일단 후퇴!’
어차피 정찰을 위해 온 참이었다. 진짜 사냥은 일행들과 함께할 일이었다.
-도살자, 김준혁!
“뭐?”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사방에서 영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휘몰아쳐 오는 영력의 폭풍에 김준석이 황급히 스킬을 펼쳤다.
[천천]
김준석의 신형이 그대로 하늘 높이 솟구친다.
-하하하! 도살자 김준혁. 놈의 핏줄이로구나!
‘아아, 동생 놈아!’
참 도움이 안 되는 동생이었다.
저 산이 말했던 문제의 그 ‘느낌’은 준혁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형제인 김준석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제길! 친형제인지 검사할 필요는 없겠네!’
이 정도면 신격이 인정해 준 친형제지간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산의 지형이 변하고 있었다.
콰르르르르!
지면이 칼로 자른 듯 갈라지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암벽이 솟구쳤다.
‘천천’으로 하늘 높이 떠 있는 김준석의 높이를 순식간에 초월했다.
갈라진 지면 두 개가 김준석의 앞뒤로 솟구쳤다.
즉, 김준석은 좁디좁은 협곡 사이에 낀 형국이었다.
‘이거 설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럴 때 떠올릴 수 있는 전개는 단 하나였다.
생각을 이어 갈 겨를도 없이 협곡이 그대로 맞물렸다.
콰콰콰콰!
하지만 거대한 바윗덩어리인 암반 속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절벽 상단에 구멍이 뚫리며 김준석이 튀어나왔다.
“와나, 미치겠네!”
김준석의 손에는 한 자루 삽이 들려 있었다.
무상곤을 변형시킨 삽이었다. 협곡이 닫히는 그 순간, 무상곤을 삽으로 바꿔 암벽의 바위를 파고 들어간 것이다.
참고로 김준석의 영력은 새하얀 색을 띠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무상곤도 하얀색이었다.
김준석은 새하얀 순백의 삽을 크게 휘두르며 바닥을 박찼다.
“허!”
지면을 향해 낙하하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던 김준석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독하게 물렸네.’
‘산’을 중심으로 거대한 암벽이 사방으로 솟구쳐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거대한 원통 안에 산 형태의 신수와 함께 갇힌 셈이었다.
콰앙!
내려설 곳이라고는 산의 몸뚱이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산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대율(大律)이라고 하지. 너는 도살자와 어떤 관계인가?
‘일단 시간을 좀 끌어 볼까?’
저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암벽이 솟았다면, 다른 일행들도 목격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쯤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테니 최대한 시간을 벌어 두는 게 좋았다.
“도살자? 그게 누구지?”
-김준혁이라는 이름을 쓰는 인간이었지.
“그랬나?”
-그랬지. 흐음, 확실히 보면 볼수록 비슷하군. 느낌만이 아니라 생김새도 비슷해.
“생김새?”
-알 수가 없군.
“뭘 알 수 없다는 거지?”
-어떤 부분에서 놀라는 것인지 모르겠군.
“너도 눈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거지.”
-하하! 혹시 그걸 도발이라고 하는 건가?
아무런 동요도 없는 ‘대율’의 목소리에 김준석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안 먹히는 모양이네?”
-신을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다는 발상부터가 인간의 한계다.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인가?
“이걸로 여기를 파고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냐?”
김준석이 손에 들린 삽을 흔들며 물었다.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군.
“싫다는 뜻인가?”
-누차 말하지만 신수를 인간과 같은 격으로 보는 것이 인간의 한계지.
대율에게 손해가 아니라, 김준석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테니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쉽네.”
-그런데 아직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는데?
“질문?”
-도살자와 무슨 관계인가?
“하아! 이거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홍길동? 그건 또 무엇인가?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할 수는 없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준석의 삽이 거대한 칼로 바뀌었다.
후우우우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변한 칼이 그대로 지면을 가른다.
꽈아앙-!
산이 뒤흔들리고, 지면에 거대한 칼자국이 남았다.
-소용없는 짓. 하지만 반갑구나. 도살자의 형이여!
“나는 안 반가워!”
거듭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참 도움이 안 되는 동생이었다.
‘일단은 뭐라도 해 보자!’
생각을 마친 김준석이 곧장 산봉우리로 몸을 날렸다.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리던 무상곤이 과격하게 지면에 박혔다.
하지만 대율은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방에서 무언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설치류의 작은 짐승부터 시작해 곰 같은 거대한 맹수까지.
하늘도 마찬가지였다.
참새부터 수리까지 크기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새까맣게 몰려든 새 떼에 갑자기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딴 놈들로 뭘 하려…….’
달려드는 짐승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기묘한 소음과 함께 짐승들의 온몸이 짙은 잿빛 영력에 휩싸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여전히 속도는 줄지 않았다.
‘망할!’
콰콰콰쾅!
자폭 공격이었다.
데미지는 거의 없었지만, 몰려오는 짐승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천천’으로 피하려 해도 하늘에도 새 떼가 한가득이었다.
오히려 폭발의 중심으로 몸을 날리는 꼴이었다.
무상곤을 장창으로 바꿔 거대한 반경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둔다.
쾅, 콰콰콰쾅!
창에 닿을 때마다 일어나는 폭발, 그로 인한 아주 미세한 데미지가 김준석의 몸에 쌓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작은 동물들의 차례가 끝나고, 덩치가 있는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늑대 무리, 그 뒤로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곰이 대기하고 있었다.
체감상 덩치가 큰 놈일수록 데미지는 크다.
‘이건 감당이 안 되네!’
죄다 받아 주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일단은 지금 상황부터 벗어나고 볼 일이었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켠 김준석이 비어 있는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뇌호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