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받고 각성 더!-184화 (184/240)

-184-

-64장. 인사#1-

“환장하겠네.”

생각지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낯설다는 의미는 아니다.

“볼 때마다 갑갑하네, 이거.”

‘탐색’으로 살핀 벽 너머의 광경은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것들과 비슷했다.

도면.

시스템 내부에서 보았고, 5인 위원회 회의장의 이면에서 보았던 그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갔다.

‘이게 왜 안 보였던 거야?’

준혁의 ‘탐색’은 에너지를 가시화한다. 그리고 이 도면은 어마어마한 기운 덩어리였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았다.

준혁은 황급히 고개를 털며 ‘탐색’을 멈췄다.

그리고 벽에서 뽑아낸 벽돌을 들어 올렸다.

“음!”

역시 이상하다.

이 벽돌에 어떤 비밀이 있어서 ‘탐색’을 막았던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벽돌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도면 자체가 어떤 작용을 하고 있었던 건가?’

준혁의 수준으로는 저 도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 근데 생각해 보니…….’

심각한 상황인데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저걸 도면이라고 부르는 건…….’

도면은 어떠한 물건, 혹은 건축물 등을 만들기 위해 종이 위에 그것을 그려 놓은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실제 기운으로 구성된 하나의 장치로 봐야 했다.

이 상황에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떠오른 건, 어쩌면 더 이상 저것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장치? 장치라고 부르면 되려나?’

엉뚱한 생각을 해 보지만, 결국은 다시 저 장치에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저 장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린디웨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흑호가 공간을 열고 나타났다.

당연히 등에는 린디웨를 태운 채였다.

“여긴?”

린디웨의 물음에 릴리안 우드가 앞으로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린디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벽의 통로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육안으로 보면 뚫려 있는 통로인데, 내민 린디웨의 손바닥에서는 저항감이 느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읍!”

손을 대자마자 린디웨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들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린디웨는 한참을 더 그렇게 서서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내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린디웨가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다시 십여 분이 흐른 후였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음?’

다가가려던 준혁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린디웨의 미소가 묘했다.

‘뭐지?’

하지만 그저 멈칫했을 뿐, 그 미소에 담긴 감정을 제대로 읽어 낼 수는 없었다.

린디웨의 미소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준혁은 섬세하지 못한 탓이었다.

“어때?”

“일단 정리부터 하자면……. 이건 일종의 장치야.”

“그건 나도 알…….”

“너는 알지만 저 사람들은 정확하게 모르잖아.”

린디웨가 릴리안 우드와 리아 클레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그건 그렇지.”

린디웨는 준혁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두 사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잘 들어.”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린디웨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무식한 놈이 절대 설명을 안 했을 것 같아서 대략적인 개념부터 말하자면, 일단 마나와 영력이 같은 에너지에서 출발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네.”

린디웨는 준혁을 디스하며 설명을 시작했고, 두 사람은 가만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설명이 끝난 후, 릴리안 우드가 물었다.

“지금 들은 설명을 종합하면, ‘기운’이라 부르는 그 에너지만으로 설계자가 원하는 메커니즘을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린디웨의 모습에 릴리안 우드가 매우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즉, 에너지 자체를 성형하는 것만으로 특정한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죠?”

릴리안 우드는 공학자였다.

BR코퍼레이션에서 나오는 모든 물건은 그녀가 만들어 낸 물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린디웨가 한 이야기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스킬.”

“네?”

“스킬을 생각해 봐. 너희가 사용하는 스킬이 그거랑 같아. 너희의 경우는 ‘마나’를 사용하는 거지. 어쨌든 마나를 어떤 방식으로 배열하고 가공하느냐에 따라 스킬이 실현되는 거잖아. 같은 이치야.”

“아! 그렇다면 던전에서 얻는 아이템도 같은 이치인가요?”

“그렇지.”

“그럼 그 원리를 알고 있으면 임의로 스킬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죠?”

“그렇게 볼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 릴리안 우드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큰 관심을 보이는 릴리안 우드와 달리 리아 클레르는 시큰둥하다.

관심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 그럼 설명은 끝났고…….”

그렇게 대략 마무리를 한 린디웨가 통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 알았지?”

“그래.”

준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린디웨는 다시 통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지지직!

아무것도 없던 통로 입구에서 갑자기 새파란 뇌전이 튀어 올랐다.

“끅!”

린디웨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보이지 않는 벽을 미는 듯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통로 입구에서 튀어 오르는 스파크가 한층 거세게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는 동안 린디웨의 손에서 푸른 영력이 솟구쳤다.

솟구친 영력이 입구의 보이지 않는 벽을 완전히 감쌌다.

급기야 영력으로 뒤덮인 보이지 않는 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아!”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외침이 린디웨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꽝!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뇌전이 사라졌다.

“허억!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린 린디웨가 황급히 흑호에게 몸을 기대며 가까스로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네가 나 좀 태우고 다녀야겠다.”

린디웨의 말에 흑호가 거대한 몸집을 줄였다.

말보다는 조금 작지만, 사람이 올라타기 적당한 수준의 크기였다.

“가자.”

흑호의 등에 올라탄 린디웨가 명령을 내렸고, 준혁을 선두로 네 사람과 한 마리가 통로로 들어섰다.

***

“좋지 않아요.”

높은 산봉우리에 선 채 주변을 살피던 리쉬옌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민섭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어느 정돕니까?”

리쉬옌이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행동에 다른 일행들 역시 대충 자리를 잡고 앉는다.

“원래라면 우리는 이미 신수를 마주쳐야 했어요.”

그 말을 받은 사람은 김준석이었다.

“우리가 감지한 영력이 착각이 아니었군요?”

김준석의 말대로 일행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짙은 영력의 잔향이 가득했다.

그것도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강력한 영력이었다.

“네. 그게 신수의 영력이에요.”

리쉬옌의 확답에 모두의 표정이 한층 무겁게 변했다.

영력의 잔향이 이 정도라면, 실제 신수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새삼스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이미 현세에 있을 당시에 도쿄에서 준혁이 만상만투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리고 이미 높은 등급에 올랐기에 영력을 감지하는 수준 또한 높았다.

영력의 잔향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수의 무서움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새삼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맞이하게 될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탓이다.

물론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도 있었다.

김준석이었다.

김준석의 현재 등급은 천원급이었다. 등급만 따진다면 리쉬옌과 동급이었다.

물론 리쉬옌과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같은 천원급이라도 스탯으로 보면 리쉬옌이 확실히 높았다.

리쉬옌도 배면계에 온 후 끊임없는 훈련과 독자적인 실전을 통해 성장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 리쉬옌은 아슬아슬하게 천강급으로 올라서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쨌든 그런 높은 등급과 홀로 쌓아 온 경험이 있기에 겁먹기보다는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김준석이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고 이야기를 해 보죠.”

모두의 시선이 김준석에게 집중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동안 최대한 실력을 쌓고 돌아가야 합니다.”

애초에 그것이 배면계로 넘어온 목적이었다.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준석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수도 사냥해야 하죠. 그러니 묻겠습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신수를 사냥할 겁니까, 아니면 조금 더 실력을 쌓은 후에 도전할 겁니까?”

원래 호수를 건널 때의 목적은 당연히 신수를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신수의 영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고 나니 모두들 자신감을 잃고 위축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조금 더 실력을 쌓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리쉬옌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좀 더 준비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리쉬옌으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는 이 일행의 책임자였다. 그러니 단 한 명이라도 죽게 둘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쉬이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들 심각하게 갈등하는 표정으로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신수를 잡으러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실력을 쌓은 후에 도전하겠다.’

이런 생각은 ‘끝’이 없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라는 것은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감 없이 돌아간다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누구도 조금 더 준비를 하자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긴 침묵을 깬 사람은 최유나였다.

“신수 잡아.”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단답형의 말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가 모두의 표정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최유나의 말에 입을 열어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갈등을 끝내지 못한 것이다.

홀로 고민하던 김준석이 리쉬옌을 향해 물었다.

“린디웨와 둘이서 신수를 사냥했었다고 했죠?”

“맞아요. 모든 신수를 잡지는 못했지만, 사냥에 성공하기는 했었어요.”

“그 당시 쉬옌과 린디웨의 등급은 천원급이었죠?”

“네.”

“지금 쉬옌은 더 성장한 상태고, 저 역시 천원급입니다. 그리고 최유나 씨는 배면계 등급은 외천급이지만 던전 시스템의 등급이 S1이라 스탯만큼은 우리를 능가하죠.”

김준석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모두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강이찬이 나섰다.

“갑시다! 까짓것! 죽기야 하겠어요? 수틀린다 싶으면 그냥 술석 깨트리고 귀환하면 되잖아.”

이들에게는 배면계로 넘어오기 전 린디웨가 만들어 준 귀환 술석이 있었다.

애써 용기를 낸 강이찬의 말에 그제야 유민섭이 반응했다.

“같은 생각입니다. 준비만 하다 보면 결국 준비만으로 모든 시간을 사용하게 될 겁니다.”

다들 갈등할 때는 한두 사람이 먼저 결정하게 되면 그 결정을 따르기 마련이다.

“갑시다. 나는 유나만 믿고 가지, 뭐.”

“동의합니다. 차라리 몸으로 부딪치는 게 나아요.”

순식간에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김준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제가 이 자리에 있던 신수의 위치부터 찾아보겠습니다.”

“아!”

리쉬옌이 새삼 탄식을 터트렸다.

김준석은 엽사였다. 그리고 엽사는 사냥감을 쫓는 탁월한 추적자이기도 했다.

모두들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김준석이 빠르게 방향을 틀어 어딘가로 달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