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63장. 카잔#4-
[일꾼27268]
근력:[2] 순발력:[3]
지구력:[3] 감각:[1]
마나:[1]
“일꾼? 27268?”
지금 ‘관찰’로 살피고 있는 중년 남자는 분명 비각성자였다.
마나 항목의 ‘1’이라는 수치 또한 정상이었다.
각성자가 아니라도 인간은 호흡을 통해 자연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인다.
그것을 마나로 보고 수치화한 것이다. 실제로 스킬을 사용하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뭐지, 도대체?’
비각성자가 각성자처럼 상태창이 나타났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다음 항목이었다.
스킬:
[채집], [운반], [하역]
스킬이 있다.
스킬의 내용도 이상하지만, 스킬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비각성자가 분명한데 스킬이 존재한다.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일꾼’이라는 클래스부터가 이상했다.
게다가 스킬이 ‘채집’, ‘운반’, ‘하역’이다.
일꾼이라는 클래스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의 스킬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준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찰’을 사용해 보았다.
“음!”
마찬가지다.
모두가 숫자만 다를 뿐 ‘일꾼’이라는 클래스였다.
스킬 또한 똑같다.
‘이거 도대체 뭐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준혁은 이번에는 ‘탐색’을 사용했다.
“허!”
점입가경, 깊이 들여다보니 한층 더 이상한 것이 보인다.
‘기운’이 보였다.
기운은 비각성자에게도 중요한 에너지다.
아주 미량이기는 하지만 호흡을 통해 기운을 받아들이고,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기 위한 유지를 한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이 기운의 유무였다.
인간의 몸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물리적인 에너지다.
그 물리적인 에너지는 음식 섭취를 통해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호흡을 통해 몸속에 산소를 공급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기운은 없어서는 안 되는 에너지다.
그러니 비각성자라 해도 몸속에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 카잔시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하단전 부위에 기운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그 양이 꽤 많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창에 표시되어 있는 마나 수치는 1이었다.
즉, 사용할 수도 없는 에너지가 몸속에 쌓인다는 말이다.
당연히 연상되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채집’, ‘운반’, ‘하역’이다.
사용하지도 않는 기운을 몸속에 모으고 있으니 자연스레 저들의 스킬이 떠올랐다.
‘저게 채집이면?’
준혁은 유심히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단전에 기운이 가득 차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운반이라는 건 그냥 기운이 가득 찬 상태로 돌아다니는 걸 말하는 것 같고…….’
마지막은 ‘하역’이었다.
준혁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탐색의 범위를 넓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단전에 기운을 가득 채운 상태로 생활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푸른빛의 형태로 가득 차 있던 하단전이 갑자기 비워지는 경우가 더러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표본이 너무 적었다.
준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선 채 긴 시간 공을 들여 상황을 살폈다.
낮 시간 동안은 큰 변화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던 기운을 비우는 일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해가 넘어가자 상황이 변했다.
카잔시 곳곳에서 그런 현상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집이었다.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서자 하단전의 기운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즉, 집으로 돌아가면 ‘하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하역’이 일어나는 순간 그 기운이 어디로 향하는지 준혁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뭐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준혁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카잔시는 러시아와 아즈키스탄 사이의 국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분쟁이 발발한 후에 일어났다.
‘로건 베런즈.’
놈이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이 무엇보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일상이었다.
카잔시의 사람들은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정치를, 사업가들은 사업을, 직장인들은 자신의 업무를 했다.
마치 원래 이 도시에는 아이들이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자식이 있던 집에는 분명 아이들의 책이나 옷가지, 장난감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물건을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더 심각한 건 학교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교사들은 자신의 직장인 학교로 출근을 한다.
당연히 아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카잔시의 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극이라도 찍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러시아까지 범위를 넓히지 않는다고 해도, 카잔시는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였다.
그 도시와 연관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외부로 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미친 게 아닌지 의심해야 할 수준이다.
준혁은 카잔시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탐색’으로 살펴보았다.
흑호를 타고 돌아다니고, 볼가 강 밑바닥을 뒤졌으며, 백효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가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낮 시간 동안 알아낸 것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역시 이 문제는 내가 봐서 될 게 아닌 것 같네.’
준혁이 살펴보는 것은 결국 현상의 관찰이다.
한층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린디웨밖에 없었다.
***
흑호의 ‘도약’을 통해 준혁과 린디웨가 들어선 곳은 어느 작은 방이었다.
“후우, 후!”
린디웨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겠냐?”
“아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린디웨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일전에 보았던 현상, 영력이 소멸하는 현상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미 양 볼이 핼쑥할 정도로 야위었고,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이 영락없이 중병을 앓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곳 카잔으로 데리고 온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물론 준혁과 린디웨는 노크하기 전에 이미 누군가 다가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선 사람은 릴리안 우드와 리아 클레르였다.
린디웨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했다.
“반가워. 나는 린디웨.”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누구에게든 반말로 말하던 린디웨 고유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릴리안 우드입니다. TV를 통해서 활동하는 모습은 보았었어요. 반갑습니다.”
“리아 클레르. 뭐, 이야기는 들었겠지만 던전 관리자. 반가워.”
리아 클레르는 여전히 손목에 찬 구련환이 불만인지 불퉁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린디웨가 본론을 꺼냈다.
“아이들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각성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각성이 일반적인 각성이 아닌 ‘일꾼’이다. 그리고 기운을 모아서 어딘가에 모으는 것으로 보인다. 맞지?”
대단히 딱딱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린디웨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소멸을 향해 가고 있는 터라 단 1초의 시간이라도 아껴야 했다.
“어, 맞아.”
“으음…….”
홀로 뭔가를 고민하던 린디웨가 힘겹게 흑호의 등에 올라탔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밖? 어디?”
“이 도시의 중심부.”
“중심부?”
준혁은 이미 도시 곳곳을 살피고 다녔기에 대강의 지리는 알고 있었다.
“어. 강가에 있는 성(城) 같은 게 도시 한가운데였던 것 같은데?”
릴리안 우드가 불쑥 끼어들어 설명을 덧붙였다.
“카잔 크렘린이에요. 지리적인 중심지를 말하는 거라면 카잔 크렘린이 맞습니다.”
“응. 거기로 가자.”
“어. 가자.”
준혁도 이미 한 번 살펴본 곳이었다. 별다를 것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군말 않고 린디웨의 말에 따랐다. 자신이 보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릴리안 우드와 리아 클레르도 뒤를 따라왔다.
두 사람은 니캅이라 부르는 이슬람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둘렀다.
카잔시는 이슬람 인구가 50퍼센트에 육박하는 곳으로, 크렘린 내부에도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니캅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카잔은 히잡을 사용하는 편인데 얼굴을 가리는 니캅의 등장에 멈칫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딱히 눈여겨보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린디웨는 ‘은신’을 펼친 흑호의 등에 올라탔고, 준혁은 메구탈로 얼굴을 바꿨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 네 사람은 카잔 크렘린에 들어섰다.
“음, 왼쪽. 왼쪽으로 조금 더 틀어서 가자.”
린디웨의 설명에 흑호가 방향을 잡고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크렘린 안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다.
“여기?”
준혁의 물음에 린디웨가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지하.”
“음, 지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의 손에 무상곤이 들렸다.
정확하게는 거대한 삽 모양으로 변한 무상곤.
“아니.”
하지만 급히 저지하는 린디웨의 목소리에 준혁은 삽질을 시작할 수 없었다.
“응?”
“땅 파면 안 돼. 섣불리 건드렸다가 탈이 나는 수가 있거든. 여기 성당에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게 있을 거야.”
무상곤을 갈무리한 준혁이 물끄러미 성당을 바라보다 릴리안 우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아는 거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없어요. 인디애나 존스는 취향이 아니라…….”
이런 곳에 무력 조직의 아지트를 둘 리가 없으니 릴리안 우드도 특별히 조사할 일은 없었으리라.
그때 리아 클레르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나한테 있을지도?”
“뭐, 진짜?”
“어. 일단 연락부터 해 보고.”
리아 클레르가 휴대폰을 한 번 흔들어 보인 후 통화를 시작했다.
***
지형이라는 것은 긴 세월 지반 활동과 다양한 자연 현상을 거쳐 완성된다.
물결조차 거의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하지만 거대하기 짝이 없는 호수 한가운데 섬 하나가 불쑥 솟아 있었다.
둥그스름한 산세와 두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거북이를 연상시켰다.
그런 이유로 배면계로 소환당한 후, 이 섬을 거치는 모든 배면계 각성자들은 마치 짠 것처럼 이 섬의 이름을 똑같이 불렀다.
거북섬.
그 거북섬 서쪽 끄트머리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었다.
“와, 이 형님 이렇게 늦으면 어쩌자는 거야?”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는 사람은 강이찬이었다.
이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준석이었다.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지 오늘로 꼭 6개월째가 되는 날이었다.
일행들은 벌써 나흘 전에 도착해 김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리쉬옌의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시…….”
하지만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차마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일행들은 이어지지 못한 말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
리쉬옌의 목소리가 그 정도로 불안하게 떨린 탓이었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준석 형님은 흑태자 형님의 형님이잖아요. 형제가 똑같이 재능이 그쪽인데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그때였다.
콰아아아-!
세찬 물소리가 모두의 귓바퀴를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과격하게 수면을 가르며 이쪽을 향해 오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일행들도 폭풍처럼 성장을 한 후였다. 인영의 얼굴 정도는 충분히 구분이 가능했다.
김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