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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장. 카잔#3-
“그 말을 믿으라고?”
리아 클레르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히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무시다.
자신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아예 거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화를 낸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리아 클레르는 후자를 택했다.
괴물 같은 준혁의 힘에 강한 열등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탓에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걸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쩌면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발버둥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화를 내 자신이 겁을 먹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격렬한 리아 클레르의 반응에 준혁이 슬쩍 릴리안 우드를 보았다.
“릴리안은 어때요?”
“믿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리아 클레르는 다시 한 번 격렬하게 반응했다.
“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는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배면계 시스템의 아바타, 그 아바타를 통한 던전 시스템 내부로의 침입, 배면계와 던전의 더블 각성, 던전 시스템의 의지, 위원회 회의의 이면에 숨어 있는 정보의 수집, 던전 시스템과 함께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로건 베런즈, 마지막으로 이상하게 변해 버렸던 미구엘 페레스까지.
어느 것 하나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준혁이 시스템 내부로 침입했다는 사실은 위원회 시스템을 통해 보았으니 믿는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흠, 못 믿겠으면 어쩔 수 없는데…….”
준혁은 굳이 리아 클레르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리아 클레르의 신뢰를 얻기 위해 굳이 심력을 소모할 생각은 없었다. 거칠기는 해도 속성으로 처리할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한 이야기를 믿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부려 먹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뭐, 너 알아서…….”
그때 릴리안 우드가 갑자기 준혁의 말을 끊었다.
“참 모자란 사람이군요.”
“뭐?”
리아 클레르의 두 눈에 바짝 독기가 어린다.
준혁이 무서운 거지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릴리안 우드는 하등 무서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리아 클레르보다 더 과장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준혁이었다.
항상 점잖은 태도를 보이던 릴리안 우드였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사람을 평가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릴리안 우드는 준혁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가면을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릴리안 우드의 눈에 떠오른 감정은 일종의 경멸감이었다.
“준혁은 최소한 당신과 신뢰 관계를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의 비밀을 말한 거야.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당신을 믿게 만들려면 오히려 그럴싸한 말을 꾸미는 게 빨랐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군.”
“그렇다면 저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한 것이니 오히려 믿어야 한다? 그게 오히려 궤변이라고 생각지는 않아?”
“사람을 봐 가면서 그런 잣대를 들이대야지. 김준혁 정도로 강한 자가 한없이 약한 당신을 상대로 거짓을 꾸며 꼬일 이유가 뭐가 있다고 생각하지? 오히려 죽이고 관리 권한만 뺏는 게 더 간단한데?”
“그, 그런 말을 잘도 지껄이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준혁은 릴리안 우드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릴리안 우드는 준혁의 신뢰를 얻기 위해 꽤 손해를 감수했었다.
그런데 정작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리아 클레르는, 준혁이 진실을 말해 주었는데도 믿지 않으니 감정적인 반응이 먼저 나온 것이다.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았고, 깊은 지혜를 갖고, 헌신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인간 본연의 감정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면서 호의를 기대하는 게 정상은 아닐 텐데?”
“호의인지 악의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 악! 뭐야?”
격렬하게 반응하던 리아 클레르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 댔다.
준혁이 갑자기 리아 클레르의 손목을 낚아챈 탓이었다.
“이런 식으로 개시할 줄은 또 몰랐네.”
그렇게 말하는 준혁의 반대쪽 손에는 묵색의 원형의 고리가 들려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리아 클레르의 손목에 고리를 걸었다.
지이잉!
고리가 잘게 떨리는가 싶더니 빠르게 둘레를 줄여 순식간에 팔찌 정도의 사이즈가 되었다.
“이건 또 뭐…….”
하지만 리아 클레르는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팔찌에서 피어오른 묵색의 영력이 곧장 리아 클레르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리아 클레르가 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준혁이 리아 클레르의 손목에 끼운 것은 다름 아닌 구련환이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것은 묵혀 놓았고, 새롭게 장비를 장만할 때 함께 만든 새 구련환이었다.
그 첫 대상자가 된 것이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기를 5분여.
“커헉! 헉헉!”
온몸이 땀에 절은 리아 클레르가 바닥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숨을 몰아쉰 끝에 겨우 호흡이 진정됐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음……. 믿지 않은 대가.”
“그게 무슨?”
“뭐, 두고 보면 알아. 자, 그럼 일단 일어서.”
“어어! 뭐, 뭐야!”
벌떡 몸을 일으키는 리아 클레르의 얼굴에 기겁한 표정이 떠올랐다.
갑자기 몸이 절로 움직이는 것 같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마치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가 된 느낌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뭐야?”
“몸소 체험해 놓고 뭘 새삼스레 물어?”
“내 몸이 왜 네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냐고?”
“응,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릴리안.”
준혁의 부름에 릴리안 우드가 차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리아 클레르를 향해 조금은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사실 준혁도 계속 구련환을 채워 놓을 생각은 없었다.
일종의 길들이기였다.
리아 클레르는 이상한 근성이 있었다.
준혁의 강력한 힘에 한 번 멘탈이 깨져 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준혁의 말에 이상한 반항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대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증거를 보여 주는 과정은 생각보다 지난하다.
믿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구련환으로 반항을 원천 봉쇄하고 차차 진도를 나갈 생각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구련환을 이용하는 게 속이 편했다.
준혁이 손짓으로 흑호를 부르며 말했다.
“일단 당신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그래요.”
잠시 후 흑호가 세 사람을 태우고 공간을 뛰어넘었다.
“여긴 또 어디야?”
리아 클레르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준혁의 명령이었다.
“너는 이 장소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알았지?”
구련환에 걸렸을 때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네, 알겠습니다. 젠장! 내가 또 뭐라고 한 거야?”
“그냥 순순히 받아들여. 반항하면 너만 힘들어진다.”
“크윽!”
고통에 부르르 몸을 떠는 리아 클레르의 모습에 릴리안 우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준혁이 자신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매서울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처음부터 준혁과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한 선택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릴리안, 이제 회의를 시작하죠.”
“좋아요.”
릴리안이 컴퓨터를 조작하자 큰 화면에 러시아의 지도가 떠올랐다.
지도가 점점 확대되더니 화면에는 한 도시의 위성사진으로 바뀌었다.
“카잔, 러시아 연방에 속해 있는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예요.”
릴리안 우드의 설명에 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리아 클레르를 찾아가기 전에는 분명 로건 베런즈를 잡을 방법을 논의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러시아 연방이 어쩌고 하는 말을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러시아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그 아래에 8개의 연방관구가 있고, 그 속에 20여 개의 공화국과 40개가 넘는 주 등이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준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러시아에 대한 정보라고는 소련이 해체되며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 저 도시를 보여 주는 것일 터.
준혁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러시아와 아즈키스탄의 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도시에 변화가 생겼어요.”
그 말과 함께 화면에 카잔시 내부의 위성사진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준혁도, 리아 클레르도 그 사진을 보여 주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대부분 일상의 사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점 못 느꼈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릴리안 우드가 곧장 답을 말해 주었다.
“아이들이 없어요.”
“어?”
듣고 보니 그랬다. 거리의 사진 속에 어린아이가 찍혀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방금 보여 준 사진은 모두 같은 날 촬영한 사진들이에요.”
즉, 아이들이 없는 풍경만 골라서 찍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이상했다.
“자세히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정확하게 만 17세 이하는 거리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카잔시에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생긴 그날, 시스템 메시지에는 ‘링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엇!”
준혁이 깜짝 놀라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링크가 무엇인지는 린디웨를 통해 들었었다.
심증뿐이기는 하지만 저 카잔시가 배면계와의 링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뭘 해야 합니까?”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진 준혁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 내부를 심층적으로 관찰하는 게 우선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준혁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며 말했다.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두 가지요?”
준혁이 검지를 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째, 저의 관찰과 탐색을 통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에너지의 흐름을 살펴봐야 합니다. 혹시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시스템의 농간 같은 걸 찾을 수도 있겠죠.”
‘관찰자’로 각성한 준혁의 스킬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릴리안 우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준혁이 다시 중지를 펴며 말했다.
“두 번째, 시스템 아바타를 통해 그곳을 살피게 합니다.”
“아!”
릴리안 우드는 생각지도 못했었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준혁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상의 범위 바깥의 이야기였기에 쉬이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놀란 사람은 리아 클레르였다.
“뭐? 그 시스템 아바타 이야기가 진짜라고?”
여전히 준혁이 했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근성이 있기는 했다.
“내가 언제 거짓말이라고 했냐?”
“아니, 그럼 처음부터 그 아바타라는 걸 보여 줬으면 되잖아!”
굳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준혁은 어쩔 수 없이 대꾸를 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처음부터 내 말을 믿지 그랬냐?”
“아니, 그걸 말만 듣고 어떻게 믿으라는 건데?”
“그래서 시스템 아바타를 보여 줬으면 내 말을 다 믿었고?”
“일단 아바타라는 존재는 믿었겠지.”
여전히 근성이 넘친다.
“됐다.”
손을 휘휘 저은 준혁이 다시 흑호를 불렀다.
아까 확인한 바로는 카잔의 위치는 러시아와 아즈키스탄의 분쟁 지역에서 꽤 가까운 편이었다.
분쟁 지역까지는 흑호의 ‘도약’으로 이동하고, 그 이후는 백효를 타고 날아가면 되리라.
***
“흠…….”
백효를 타고 카잔까지 날아온 준혁은, 다시 흑호를 부른 후 그 등에 올라타 ‘은신’을 펼치게 했다.
일단 육안으로 확인해 보니 릴리안 우드의 말대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커다란 구역을 정해 그 안에 있는 집들도 뒤져 보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학교도 텅텅 비어 있었다.
‘확실히 이상하네.’
일단 육안으로 확인이 끝났으니 이 다음은 스킬을 통한 조사였다.
‘관찰.’
첫 번째 방법은 ‘관찰’이었다.
“어! 이건 또 뭐야?”
관찰을 사용한 준혁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