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63장. 카잔#2-
주변에 거원의 시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각자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지구의 시간을 기준으로, 이들이 배면계로 온 지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배면계에서 보낸 시간은 이미 3년을 넘어 만 4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리쉬옌의 혹독한 훈련과 목숨을 건 실전으로 이미 지천급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천급은 던전 시스템의 기준으로는 S1급이었다.
이제는 쾌적한 환경을 오히려 낯설게 느낄 정도였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말의 내용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팀원들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곳에 온 직후부터 상황은 좋지 않았다. 또한 리쉬옌으로부터 꾸준히 들어온 말이 배면계의 영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두들 말은 하지 않지만, 좀 더 고생해야겠다고 가볍게 전의를 다진다.
하지만 리쉬옌의 표정은 심각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라요.”
그제야 다들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배면계에서 사람들을 이끌며 리쉬옌의 내성적인 성격은 꽤 외향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생각이나 감상을 말하는 데는 여전히 기존의 내성적인 면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섣불리 이거다 저거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판단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이었다.
이미 3년이 넘는 시간을 매일 함께해 온 팀원들이었다.
그런 리쉬옌의 성향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리쉬옌은 아주 확신에 차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강이찬이 냉큼 손을 들어 말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겁니까?”
“음…….”
리쉬옌은 즉답을 피하고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가.
꽤 외향적으로 변한 리쉬옌이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쉬이 바뀌지가 않았다.
팀원들도 그런 리쉬옌의 성향을 알기에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을 기다렸다.
긴 고민 끝에 리쉬옌이 대답했다.
“1년.”
“네?”
“앞으로 이곳에서 훈련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최대로 잡아도 1년입니다. 짧다면 반년 정도가 한계예요.”
“어!”
그렇잖아도 심각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층 딱딱하게 굳었다.
이들은 모두 보았다.
일본, 도쿄에서 어떤 괴물이 등장했는지. 그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리쉬옌과 의논한 끝에 정해 둔 목표가 있었다.
지금 구성된 팀으로 최소한 두 마리 이상의 신수를 한 번에 상대할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그 정도는 돼야 준혁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시스템의 문제로 세상이 뒤집어져도 인류가 버틸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등급은 던전 시스템의 S3급쯤으로 볼 수 있는 천원급이었다.
리쉬옌과 린디웨의 등급이 바로 이 천원급이었다.
천원급 헌터 10명이라면 신수 두 마리까지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으리라.
약간은 별개의 이야기지만, 리쉬옌은 리쉬옌 나름대로 등급을 올리기 위해 혼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일행들의 훈련과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들이 일정 수준에 오른 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팀원들 스스로 훈련하고 사냥하고 성장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만들었고, 리쉬옌은 리쉬옌대로 따로 자신의 성장에 매진해 온 것이다.
물론 아직은 천원급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리쉬옌이 말을 이었다.
“이제 방식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저도 함께 움직입니다. 사냥 대상은 영수들 중에서도 상급으로 평가되는 놈들을 위주로 합니다.”
“상급이라면 어느 정돕니까?”
“다들 잠실에서 사면오공을 본 적 있죠? 그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팀원들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리쉬옌이 합류한다면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자, 그럼 주변 정리를 좀…….”
그때였다.
“잠시만요.”
번쩍 손을 들고 입을 연 사람은 김준석이었다.
“네?”
“저는 좀 따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김준석의 말에 리쉬옌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배면계 생활이 3년이 넘었다. 이곳의 환경이 얼마나 혹독한지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런데 혼자 움직이겠다니.
하지만 김준석은 이미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엽사라는 직업이 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움직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엽사라는 직업은, 굳이 따지면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무기를 들고 몸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술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술법도 익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홀로 수련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리쉬옌만이 차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겪었던 배면계 생활에서 이미 엽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리쉬옌의 관점에서는 그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정도의 일이었다.
홀로 떨어져 수련한 후 돌아왔을 때는 일취월장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죽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건 말릴 수 없었다.
엽사가 당연히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리쉬옌은 바로 결정하지 못했다.
준혁이 제 형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혁도 김준석이 엽사로 각성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세요.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죠?”
“방금 말했던 최소한의 시간, 6개월로 하죠.”
“알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동쪽으로 움직일 거예요. 이곳에서 정동 방향으로 쭉 따라가면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호수가 나와요. 그 호수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그걸 거북섬이라고 불렀었죠. 거기서 만나요.”
이미 배면계를 경험했던 리쉬옌이었다.
지금부터 움직이게 될 동선과 거리를 명확하게 계산해서 내놓은 접선 장소였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대답한 김준석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영영 보지 않을 것도 아니니 이런 때의 이별은 단출할수록 좋은 편이다.
“그럼 그때 다시 봅시다.”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김준석이 훌쩍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작아지는 김준석의 뒷모습을 보며 유민섭이 조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그리고 리쉬옌이 가볍게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서두릅시다.”
***
“이거 상당히 신기하군요.”
“누구냐!”
콰앙!
갑자기 들려온 말에 기겁한 목소리와 함께 폭음이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여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날린 마법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매캐한 연기가 사라지고, 연기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여자는 또 한 번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너는!”
연기 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가면과 커다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또 한 사람은 여자가 이미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김준혁!”
태어나서 가장 큰 공포심을 안겨 주었던 대상이 그곳에 서 있었다.
덤으로, 그 곁에는 거대한 검정 호랑이도 한 마리 웅크리고 있었다.
여자는 청색이었다.
“어, 어떻게?”
청색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게이트 오픈으로 장소를 옮긴 후, 바깥출입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덤으로 마련해 둔 거대한 지하 벙커에 웅크린 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벙커에 머무는 수하들도, 가장 믿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감금하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이 있는 장소로 찾아왔으니 기겁할 수밖에.
“인사해. 이쪽은 금색.”
“다, 당신이?”
“반가워요.”
후드를 쓴 사람은 당연히 릴리안 우드였다.
그녀는 청색의 모습보다는, 방금 자신을 이곳으로 이동시킨 흑호의 ‘도약’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게이트 오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장소를 옮기는 스킬에 흥미가 돋은 모양이었다.
준혁이 여자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어지간하면 좀 더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급해서 말이야.”
“무슨 말이지?”
청색이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그런데 손님이 왔는데 앉으라는 말도 안 하냐?”
침입자 주제에 손님 대접을 받겠다고 뻔뻔하게 말을 한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해 대니 청색의 입장에서는 기가 찼다.
하지만 그런 모습 덕분인지 청색은 어느 정도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이상한 경험 또한 하고 있었다.
“일단……. 앉아.”
“좋아. 그래야지.”
준혁과 릴리안 우드가 당당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고, 청색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청색의 부하들이 황급히 달려왔지만, 청색의 가벼운 손짓에 모두들 돌아간다.
그리고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모르고 있네? 자, 정식으로 인사부터. 나는 김준혁.”
“반가워요. 금색이고, 이름은 릴리안 우드입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청색도 자연스레 대화를 받았다.
“리아 클레르(Lya Clerc).”
“프랑스 출신인가요?”
“국적이 프랑스.”
“지내는 건 미국에서?”
“땅덩어리가 넓어서 일을 꾸미기가 훨씬 편하니까.”
짧은 대화로 간단한 통성명을 마친 후, 준혁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 그래서 어쩔 거야?”
맥락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리아 클레르는 바로 알아들었다.
“어쩌긴? 협조해야지.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은데?”
체념한 듯 말하는 리아 클레르의 모습에 준혁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
지난 며칠간 준혁은 백효를 통해 리아 클레르를 살펴보았다.
미구엘 페레스의 사례가 있었기에 미리 그 사람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던전 관리자가 되어 쌓은 조직과 힘을 통해 특별히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어 보였다.
세계 곳곳에 하부 조직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모두 합법적인 단체였다.
애초에 5인 위원회의 청색은, 던전 관리자의 힘을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정도로만 사용하자는 비둘기파이기도 했다.
비둘기파인 척했던 로건 베런즈가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리아 클레르는 그런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대화를 시작하지.
“어? 이건 또 뭐야?”
리아 클레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입도 열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준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탓이었다.
준혁이 ‘감응’으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 스킬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돼. 아무래도 기밀 유지에는 이쪽이 좋으니까.
“나도?”
-생각을 전달한다는 느낌으로 해 봐. 바로 될 거야.
어차피 ‘감응’을 통한 대화는 준혁의 스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 대상이 된 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다.
-이제 내가 아는 걸 이야기해 줄 테니, 잘 들어.
그렇게 입을 연 준혁이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리아 클레르, 그리고 자세한 내막을 처음 듣는 릴리안 우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